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교인들이 성당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30여 년 전에 내 친구도 성당으로 옮겨갔다. 그 후로도 내 주변의 교인들이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불편을 느낄 때면 차라리 성당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푸념조로 말하는 것을 들어 왔다. 그래서 요즘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불교,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의 조사에 따르면 항상 가톨릭이 가장 높고 개신교가 가장 낮다. 구체적으로 2010년도에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톨릭이 41.4%고 개신교가 20.0%였다. 그런데 최근에 불교사회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이 39.8%고 개신교가 10.2%여서 가톨릭은 비슷한데 개신교는 10% 가까이 하락했다. 그리고 20세기말부터 한국 가톨릭의 신자는 늘고 있는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개신교의 신자 수는 대폭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 많은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보면, 개신교의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성당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개신교회에서는 서둘러 그 이유를 알아내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계속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리와 제도를 비교하고 거기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500년 전에 개혁자들이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을 때 그들이 내세운 모토는 아주 참신하고 매력적이었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성경을 라틴어에서 자국어로 번역했는데,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그동안 성경을 읽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중세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대에 개혁자들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해서 성경을 읽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보다 더 매력적인 모토는 만인제사장주의였다. 목회자나 평신도를 가릴 것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제사장이라는 이 모토는 사제들의 권위에 눌려 살던 당시의 교인들에게 참신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제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개교회주의를 내세웠다. 교권적인 교황정치로 인해서 사제들이 교황의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했는데, 이제 그 숨 막히는 권위와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개신교의 목사들은 위 기관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고 소신껏 목회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교황의 전횡에 불만이 컸던 많은 사제들이 개신교로 돌아섰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개교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정신과 맥을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오늘날 개혁자들이 선포했고 교인들이 환영했던 개신교의 모토와 제도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역효과를 내고 있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하게 되자 개혁 초기부터 여러 가지 다른 성경해석이 나와서 분파가 만들어졌다. 루터파,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파 등이 성경을 기초로 해서 서로 다른 교리를 들고 나오더니, 그 후에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등이 나오고, 구원파, 신천지, 통일교 등의 이단적인 색채가 있는 교파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개교회주의로 인해서 대형교회와 미자립교회의 차이가 극심하게 되고 대형교회는 부패의 늪에 빠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각 교회들이 자본주의식 자유경쟁을 하다 보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대형교회에 남아도는 재정을 미자립교회나 개척교회에 분배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 일을 관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가진 자는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졌다. 개교회주의로 인해서 각 교단이 자유경쟁을 하게 되자 앞 다투어 교세를 확장하려고 단기간에 목회자를 배출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선교초기에 지적 능력이 부족한 목회자 지망생들을 단기간의 교육을 거쳐 배출한 결과 목회자의 자질이 낮아졌다. 그리고 신학생이 너무 많이 배출되면서 개척교회 과잉시대를 맞았다. 가톨릭과 대조되는 이런 교파간의 갈등과 경쟁, 교회간의 빈부격차, 그리고 목회자의 자질 문제는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쳐 왔다. 그리고 개교회주의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목사가 한 교회에서 20년이나 30년 동안 장기적으로 목회하게 된다는 점이다. 장기목회의 단점들 가운데 하나는 한 명의 목사에게서 신앙교육을 받는 신자는 폭 넓은 신앙적 안목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가 한 교회에서 장기적으로 시무할 경우 자기 아성을 쌓아 올려서 전횡하게 되고 목사가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점이다. 이 장기목회로 인해서, 오래 고인 물이 썩듯이, 교회가 부패한다. 이렇게 개교회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가톨릭의 중앙집권 제도가 오히려 좋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톨릭에서는 중앙에서 관리하고 조정하기 때문에 교회의 규모를 평준화할 수 있고 재정을 분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제들을 순환근무하게 함으로써 장기목회로 인해서 나타나는 교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개신교는 개체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교회를 전체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데 반해서, 가톨릭에서는 일사분란하게 교회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자유 민주사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중앙집권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톨릭은 교회 규모의 평준화, 사제들의 순환근무, 신학의 현대화 등을 통해서 개신교에 비해서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면들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관용의 시대를 맞아서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몰려가고 있다.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지금까지도 이야기했지만,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가톨릭에서는 사제와 신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어서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어떤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재정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가톨릭 사제들의 수준이 목사들의 수준보다 높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가는 주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십일조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당당뉴스>에서 발표한 2015년 20대 뉴스에서 1위와 2위는 십일조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사실은 교인들이 십일조에 대해서 불만이 아주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목회자들은 이 사실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외에도 중요한 것은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나타난 현대인의 의식에 맞추려는 가톨릭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미사를 라틴어로 드리던 그들이 각 나라의 말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타종교와 담을 쌓고 있던 그들이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었다. 그래서 개신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던 그들이 개신교를 갈려나간 형제라고 보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협력해서 공동번역 성경을 내기도 했다. 사제의 권위의식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제의 겸손을 강조하고 평신도 사역을 확대했다. 여성 사제를 세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소녀 복사를 세우고 있다. 또한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시행해서 전에 금기시했던 제사제도를 허용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가 순교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태도를 바꾸어서 제사를 허용한 데서 관용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그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실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적대시하던 과학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서 갈릴레오를 복권시켰을 뿐 아니라 진화론까지도 받아들였다. 이런 결과 종교개혁기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서 진보적이었지만, 1965년 이후에는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현대인의 의식에 맞는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주어진 사회의 문화와 사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개신교는 광신의 시대라고 부르는 16세기의 개혁자들이 내세운 관행과 교리를 대부분 답습하고 있다. 관용의 시대를 맞아서 관용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기 위한 획기적인 방안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주의와 교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목회자의 권위주의와 교회의 부패가 심각하다는 면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개혁기의 가톨릭과 비슷해졌다. 16세기에는 가톨릭의 대안이 개신교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개신교의 대안이 가톨릭인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간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지금은 이단을 처형하면서 자기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의 자유의사에 맡길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간단히 말해서, 많은 교인들이 성당으로 가는 것은 그들의 개신교에 대한 불만이 아주 크고 개신교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가톨릭에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인이 교리나 예배형식에서 개신교와 많이 다른 성당으로 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큰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더구나 개신교에서는 오랫동안 가톨릭은 이단이라거나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쳐 왔다. 옛날 같으면 이러한 개종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지금 그들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이 아주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교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인들의 불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지 인간의 입맛에 맞추는 것은 인본주의적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고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사랑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을 외면한다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면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IS 집단처럼 광신적인 신앙으로 기울게 된다. 우리는 신앙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앙의 주체들이 교회를 외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교회는 결국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개야 너는 짖어라 그래도 기차는 간다.’ 식으로 목회를 한다면 결국 개신교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16세기의 개혁자들이나 18세기의 지도자들이 내세운 교회조직이나 교리가 앨빈 토플러의 비유적 표현대로 제3의 물결에 휩싸인 21세기 사람들의 의식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만큼 과학적 기술이 발달한다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16세기에 아주 매력적이었던 개혁자들의 주장이 현대에 와서 역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16세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다. 성장은 고사하고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다. 토플러는 말한다. “낡은 사고방식, 낡은 공식과 정론, 낡은 이데올로기가 과거에 아무리 유효하고 존중되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현실에 적합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의 관행이나 신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교회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하게 되어 있다. 지금 기울고 있는 한국교회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개신교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교회주의의 관행을 수정 보완해야 한다. 완전히 자유경쟁에 맡길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리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미국의 감리교회에서는 교역자의 생활비를 조달하지 못하는 미자립교회의 경우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를 중앙에서 보조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누진세와 사회보장 제도는 개교회주의의 자유경쟁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선례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교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지만, 누진세 제도를 도입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게 하고 부자들이 낸 세금을 가지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생활비를 보조해 주거나 여러 가지로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정치권에서는 진즉부터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그 제도를 보완해 왔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개교회주의의 자유경쟁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신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그 복음을 행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정치권보다도 교회가 앞장서서 자유경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했어야 마땅하다. 이제라도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개교회주의를 제도적으로 개선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부자 교회가 가난한 교회를 돕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렇게 중앙에 관리기구가 생겨서 마자립교회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를 보조하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교회개척이 허가제로 바뀌어야 한다.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가 보장되어서 개척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많아질 경우 그 모든 미자립교회를 보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이 허가제로 바뀌면, 목회자 수급이 조절되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양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목회자의 질적 향상이 가능해진다. 제도 개선은 목회자의 순환목회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는 현재 많은 개신교인들이 몹시 불만스러워하는 십일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실상 십일조는 토지를 분배받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조달하려는 십시일반의 정신에서 나온 구약의 관행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약교회에서 실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생활비조차 대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작은 교회나 미자립교회에서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요즘 교인들이 십일조를 불신하는 주된 이유는 십일조를 거두어서 재정이 남아도는 중대형 교회에서 교회 재정이 비상식적으로 지출되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곳은 부패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부자 편에 서시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중대형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닐 뿐 아니라 교회를 부패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사탄적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도 사랑하는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세상, 즉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런데 청교도적 신앙을 중시하는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사랑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문화,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삶, 인간의 의식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외면하는 하나님 중심적 신앙은 광신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소위 ‘고르반’의 전통(막 7:11)을 비판하실 때 이러한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오시고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한국교회의 장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교회의 지도자라면 한국의 개신교가 난파당한 배처럼 기울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교인들이 성당으로 몰려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한국의 개신교가 부흥하지 않고 쇠퇴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신앙심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불만이 크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거듭나지 않는다면, 교인들이 계속 교회를 외면할 것이다. 그래도 되는가!? |
첫댓글 한국의 개신교는 신관의 변화와 배타주의, 개종주의,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하나님은 몇 천미터 상공에 계시고 잠도 안 주무시다가 인간의 일에 간섭하시고, 분노하시며 질투하시고 기도를 열심히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헌금을 많이하는 자의 천배 만배복을 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런 불평등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제발 초월적 유신론에서 번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