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 오, 천국 가는 길에 머뭇거리는 일이 없기를 [1] 그의 생애 ① 1718년 4월 20일. 코네티컷 해덤에서 출생. 아버지 해저카이어는 코네티컷 지방의 입법의원이었다. 그는 엄격한 청교도로 가족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개인 금식의 날까지 정할 정도로 경건생활을 추구했다. 브레이너드는 세 번째 아들이었다. ② 아홉 살. 그의 아버지가(46세) 세상을 떠난다. 브레이너드에게는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③ 14살. 어머니 도로시가 세상을 떠난다. 브레이너드는 시시 때때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일기 첫머리에 “나는 어릴 적부터 진지한 편이었고 쾌활한 기질보다는 우울한 기질이 강했던 것 같다.”고 썼다. ④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 이스트 해덤으로 이사하여 결혼한 누나 제루샤와 함께 산다. 그는 이 시절 자신의 신앙을 매우 신중하고 진지했으나 참된 은혜는 없었던 신앙으로 묘사했다. ⑤ 1738년 여름. 20세. 그는 장차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 회심하지 않은 상태였다. ⑥ 1739년. 21살. 거듭남의 날이 찾아온다. 어느 날 해 뜨기 삼십 분 전에 기도하려고 한적한 곳을 찾았다. “어둡고 울창한 숲 속을 거닐고 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이 내 영혼의 지각과 인식 지평에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 전에는 성부든 선자든 성령이든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느 한 위격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 순간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로 보였다. 내 영혼은 그런 하나님, 그토록 영광스런 신적 존재를 보게 되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했고 그분이 영원토록 만유보다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기쁘고 흡족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일기 원고 위에 “1739년 7월 12일, 주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에게 영원히 기억될 날”이라고 적었다. ⑦ 1739년. 목회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예일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신앙적인 분위기도 거의 없었다. 홍역까지 걸려 입학한 첫 해에 몇 주 동안 집에 내려가 있어야 했다. 그는 피를 토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집으로 보내진다. 그 젊은 나이에 이미 결핵을 앓고 있었고, 7년 후 그 결핵으로 결국 죽게 된다. 놀라운 것은 너무 일찍 요절한 것이 아니라 그처럼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래 하면서 많은 것을 성취한 것이다. ⑧ 1740년. 1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돌아온다. 학교는 영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조지 휫필드가 예일 대학을 다녀간 뒤로 많은 학생들이 신앙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갖게 되었고, 각성한 학생들과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수들과 교직원 사이에 갈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⑩ 1741년 졸업식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자로 초청된다. 일부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아직 회심도 못 했다고 비난받고 있을 때 에드워즈는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완전히 실망시켰다. 브레이너드는 에드워즈가 설교할 때 청중가운데 있었다. ⑪ 1742년 초. 3학년 때. 퇴학 조치를 당한다.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인 촌시 휘틀지에 대해 “그는 자기가 앉은 의자만큼이나 은혜가 없다.”고 평하고 신앙적 열정을 가진 학생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학장 같은 사람은 왜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대각성운동에 우호적인 일단의 목회자들이 설교할 권리를 허가해준다. 스코틀랜드 그리스도 전도협회 회원들은 1942년 11월 25일에 브레이너드를 선교사 자격 심사를 하고 인디언 선교사로 임명한다. ⑫ 1743년 4월 1일. 선교지에 도착해서 1년 동안 통역을 사용하여 설교하면서 스톡브리지의 베테랑 선교사인 존 서전트에게서 인디언 말을 배운다. ⑬ 1744년 6월 11일. 안수 받는다. ⑭ 1745년 6월 19일. 그는 뉴저지 크로스윅숭 지역의 인디언들에게로 첫 번째 설교 여행을 떠난다. 인디언들에게 영적 각성과 축복을 주셨다. 한 해도 못 되어 신도들의 수가 130명으로 불어난다. 회심한 이 새로운 공동체는 자신들의 땅과 마을을 갖기 위해 1746년 5월에 크랜베리로 이주하고, 브레이너드는 사역이 어려울 만큼 병세가 악화될 때까지 이들 인디언 부족과 함께 지낸다. ⑮ 1747년 5월 28일.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 들어오고 10월 9일에 에드워즈의 집에서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29년 5개월 19일의 삶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지낸 세월은 8년, 선교사로 지낸 시간은 겨우 4년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9년에 『브레이너드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고 그 책은 로버트 맥체인, 데이비드 리빙스턴, 앤드루 머리, 짐 엘리엇 등에게 많은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브레이너드의 삶이 병들고 연약하며, 낙심하고 넘어지며, 외롭고 악전고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놀라운 일을 이루어 달라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사용하신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생생하고 강력한 증거였다. 에드워즈의 딸 제루샤는 브레이너드의 일생에서 마지막 19주 동안 그를 간호하며 보살펴주었고, 그가 죽고 난 4달 이후 1748년 2월 14일 같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2] 그의 삶 ① 끊임없이 병과 싸운 삶. 1747뇬 5월.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서 의사들은 브레이너드에게 치료가 불가능한 폐결핵에 걸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그는 일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에게는 늘 병이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역에 매진했다. ② 반복되는 우울증과 싸웠다. 그는 거듭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계속해서 그런 고통을 잘 이겨냈다. 어릴 적부터. 회심한 후에는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이라는 굳건한 반석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1742년 11월 4일 일기에 “영혼 안에서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지독한 부패함을 느낄 때는 무척 괴롭다”고 썼다. 그는 적어도 22군데 이상에서 죽음을 불행에서의 해방으로 말한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사역과 헌신에도 장애가 되었다. 1743년 3월 9일 일기에 “몬토크까지 16마일을 말을 타고 가는데 가는 길에 마음속에서 달콤한 평안을 맛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서 인디언들을 본 후로는 마음속에 죽은 듯한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버림받고 잃어버린바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의 추악함과 비열함만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고 쓴다. 그는 낙심을 경험하면서도 언제든지 최선을 다했다. ④ 외로움과 싸움. 1743년 4월 어느 날, “내가 듣는 말의 대부분은 고지 스코틀랜드 말이나 인디언 말이다. 주변에 마음을 열고 내 영적인 슬픔을 털어놓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 대화하면서 총고도 듣고 함께 기도도 할 수 있을 만한 그리스도인 친구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역에 있어서는 끝까지 혼자였다. ⑤ 끊임없는 외적인 역경과의 싸움. 1743년 5월에 첫 선교지인 카우노믹에서의 생활을 “나는 의식주 면에서는 형편없이 산다. 먹는 음식은 대개 끓인 옥수수와 대충 만든 푸딩 따위가 고작이고 짚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일은 고되고 매우 힘들다. 편히 쉬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고 쓴다. 그는 숲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 본 경험담을 말한다. 말을 도둑맞기도 하고 식중독에 걸리기도 한다. 노먼 페티트는 “에드워즈는 산과 광야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로 본 반면 브레이너드는 오직 ‘거친 황무지’만을 보았다.”고 말한다. ⑥ 그는 인디언들을 사랑했다. 1742년 9월 18일 일기에 “영혼들을 향한 약간의 긍휼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에 더 많은 긍휼이 없는 것을 애통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온 인류에 대해 자비, 온유, 관용, 사랑의 마음을 느낀다.”고 쓴다. 1745년 7월 2일에 “거의 오전 내내 특히 말을 타고 가다가 기도 중에 내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저 불쌍한 인디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는다. 그는 소명에 충실했다. 예를 들어서 1744년 밀링턴에 있는 교회에서 청빙했지만 그는 인디언 선교를 계속하기로 한다. 그는 모든 난관에서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과 사역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때(눅 9장 51절. 53절)의 그 불굴의 정신은 세대를 초월하여 주님의 열정적인 모든 제자의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⑦ 이 세상의 어떤 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개인적인 성화와 인디언들의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를 맛보며 확산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매한 이상을 능가할 수 없다. 그는 더욱더 거룩해지고 더욱더 쓰임 받고자 하는 자신의 열심을 일종의 ‘기본 좋은 고통’이라고 불렀다. “오, 거룩해질 수만 있다면! 오, 내 영혼이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면! 오, 이 기분 좋은 고통이여! 그로 인해 내 영혼은 더욱더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 …오, 천국 가는 길에 머뭇거리는 일이 없기를!” 1747년 4월 17일에 “내게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위한 일로 채우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비록 육신은 너무나 약하고 설교와 많은 개인적인 대화로 지쳐 있지만 그래도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하고 싶었다. 이처럼 새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ㅇ;라고 쓴다. ⑧ 그는 공부와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한다. 1745년 12월 20일 일기, “하루의 대부분을 글쓰기에 할애했지만 공부와 기도를 병행할 수 있었다.” “몸의 기력이 다 떨어졌다고 느낄 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고도 쓴다. 그는 왜 모든 것을 글로 썼을까? 첫째는, 글쓰기는 우리가 독서하거나 생각하는 큰 주제들에 대해 분명한 사고를 정립하게 해준다. 둘째는 글쓰기는 위대한 진리에 대한 분명하고 구체적인 인식으로 촉발되는 감정을 강화시킨다. 인생은 하찮은 일에 낭비하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