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교인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할까?
국회의원 300명을 뽑는 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도 치러진다. 그런데 그동안 있었던 선거들이 보여준 여러 특징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를 오늘은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위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다.한국사회에서 부자를 위한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기꺼이 표를 던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는 반복적인 현상으로서 각종 선거(대통령,국회의원,지자체 단체장) 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이기에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이 특징을 한국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가? 총선이나 대선 등에서 가난한 교인들이 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하는가.그렇다는 판단을 한다. 이 특징이 일반 사회보다 더 두드러지면 두드러지지 덜 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회에 몸 담고 살아오면서 경험적으로 얻은 판단이다.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하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다. 이유는 무엇일까?
검룡소라는 곳이 있다.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에 있는 물웅덩이로서 한강의 발원지다. 생명수가 도도히 흐르는 성경이라는 강의 발원지는 어디 일까. 성경의 검룡소는 출애굽 사건이다.이 사건은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노예들 손을 잡고 만들었다. 파라오가 통치하는 고대 이집트 체제에서 착취당하고 학대받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에 야훼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 역사에 개입해 행동하시는 야훼의 인도에 히브리 노예들이 순종함으로 그역사는 이루어졌다. 출애굽사건의 목적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 건설이다. 새 사회의 현장은 가나안이었다. 그 사회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위한 각종 법과 제도가 마련되었는데 그 알맹이는 '희년법'이다.(레위기25장) 이는 50년마다 한번씩 대대적인 사회개혁(물론 7년에 한번씩 있는 안식년도 사회개혁적 성격을 갖는다.)을 하라는 법으로서 그 개혁의 핵심은 사람과 땅에 대한 것이다.이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똑같은 출발선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서, 노예(종)는 무조건 풀어주고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내용을 갖고 있다. 빚도 탕감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라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남에게 팔리는 사람도 생기고, 재산이 타인에게 넘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희년법 정신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다. 희년법을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며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희년의 실현이었다. 그는 회당에서 성경(이사야 61장)을 읽으시며 '주의 은혜의 해'(요벨의 해 .禧年. Year of Jubilee)를 실현하러 오셨음을 천명하셨다.(눅4:16-21)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만유의 주로서 온세계를 경영하시고 있다. 예수의 성령은 희년- 세상의 건설을 위해 일하신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금수저-흙수저' 계급사회라고 할만큼 심하게 양극화되어 있다. 지난 1990년 대에 겪은 IMF 이후 양극화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고 대물림되고 있다.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인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한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의 부의 불평등'(2000-2013년)을 보면, 우선 소득 상위 1%가 가진 자산 비중이 전체의 26%나 된다. 상위 10%의 자산 비중은 70%이다. 그런가하면 하위 50%의 자산 비중은 1.7%에 지나지 않는다. 한쪽으로 심히 기운 운동장 같은 사회, 이것이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이뤘다는 사회인 것이다. 자산 불평등보다 더 비인간적인 것은 소득 불평등 구조다.소득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임금 격차다.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노동 소득은 전체 소득의 90% 이상을 차지하기에 임금의 큰 격차는 심각한 문제다. 재분배 이전에 원천적으로 분배의 문제를 우리 사회는 안고 있다. 소득 불평등의 핵심은 정규직과-비정규직, 대기업- 중소기업간의 크나큰 임금 격차다. 우리 사회 상용 근로자 중 80%가 일하는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300인 이상)의 절반 수준이다. 2천만 근로 인구 중 절반이나 되는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된다. 한편 대기업이 얻는 순이익은 나라 전체 순이익의 2/3나 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재벌 100대 기업은 고용은 겨우 4%만 하는데 이익은 나라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상식을 벗어난 ,매우 불공정한 과정을 통해 임금 격차가 만들어지고 , 그로 인해 생긴 불평등 구조는 구조적으로 심화되어 돌처럼 굳어진 형국이다. 굳어 있기에 사회경제 그리고 정치가 활성화되지 않는다.그만큼 행복지수도 추락한다. 경제규모는 큰데 행복지수는 매우 낮다.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싹트고 자라기엔 사회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꽤 멀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그러나 빵을 통해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 구현되고 전달된다. 빵이 없는 자유,평등, 사랑은 없다.오늘 문제가 되는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라기 보다 상대적 가난이다. 상대적 가난의 지수는 자유와 평등, 사랑의 지수를 재는 척도다. 성경의 집중적 관심은 부 자체보다 빈부 격차에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에 있다. 야훼가 항상 문제 삼는 점은 바로 이 불평등한 관계다.정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울리는 괭과리다.그런데 정의는 저마다 정당한 제 몫을 받는 것이다. 한쪽으로 심히 기운 운동장 같은 한국사회에서 실세는 자본권력이다. 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에서 그 권력은 민주주의를 한낱 형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그리고 행정, 사법,입법부까지 요리하고 주무른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자본권력의 우산 아래 있다. 정당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대개 마찬가지다. 자본권력이 선거도 좌지우지한다. 미디어는 자본권력을 위해 아주 요긴하게 쓰임받는 수단이다. 날마다 눈만 뜨면 보게 되는 광고 속에서도 자본권력은 아주 디테일하게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논리를 관철시킨다. 종교는 어떤가? 대개의 종교도 그 자본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자발적으로 시중을 들기도 한다. 손을 높이 들고 돈신을 찬양하며 경배한다. 종교의 중심엔 황금우상이 좌정해 있다. 인류 역사에서 소수 지배 계층의 시녀 역할을 한 종교의 오랜 습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국교회는 누구인가. 한국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는 누구 편인가. 한국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한국교회는 무엇을 바라는가. 대다수 한국교회는 3.1운동(1919년) 이후 식민지배 세력에게 굴종하기 시작했다. 친일을 하며 신앙이 변질되었다. 체념하며 개인적이고 내세주의적인 체질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는 주술적인 기복을 바라며 성공-출세주의적 성향도 띠게 되었다.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사고가 신학을 지배하기도 했다.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회개는커녕 다시 미군정 아래로 스스로 들어갔다.미국을 등에 업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한 이승만은 월남한 기독교인들(특히 서북지역)을 이용하여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다.한국전쟁을 겪으며 더욱 세력을 확장한 월남한 기독교인들과 친일파 세력이 서로 손잡고 만든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마저 거스르는 사회였다.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사회였다. 수령주의적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주류 세력이 도모한 사회는 결국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다. 수령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회와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회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 사회에서 주류 한국교회는 소수 부자 계층 편에 서 있다. 한국교회의 대다수 회중은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정교 유착된 한국교회는 부자 계층과 권력을 지향하는 체질을 가진다.부자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된다. 출애굽 시대에 사랑이신 야훼는 히브리 노예들 편에 섰지만 한국교회는 결코 오늘의 히브리인들 편에 서 있지 않다.주류 한국교회는 오늘의 파라오와 그 추종 세력들 편에 서 있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 베푸는 일엔 동의하나 가난한 사람들의 실제적이고 사회적인 Exdos는 결사적으로 반대한다.가난한 사람들의 영적 해방이라는 거짓 복음은 크게 외치나 가난한 사람들의 전인적인 구원은 필사적으로 거부한다.하지만 한국교회는 영적,내세주의적 구원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주술적이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로또복권 당첨식 요행을 얻으려는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가난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밝히며 추구하는 사회구조적인 Exdos는 거부한채 기복적인 복을 추구하고, 개인적 성공을 갈구하며, 내면적이면서 주관적인 거짓 평안에 머문다. 구원과 해방을 밤낮없이 말하되 어디까지나 현대적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서, 종살이를 하는 가운데 얻는 뜬구름 같은 구원과 해방을 말할 뿐이다. 많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파라오의 통치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노예주나 부자, 귀족으로 성공하기 위해 성구를 아전인수격으로 악용하며 열심히 부르짖는다. 이러 식으로 기독교는 결국 파라오의 통치 체제와 부자 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종교로 전락되는 것이다. 출애굽사건을 주도하신 야훼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희년을 이루기 위해 일하시는 주님의 성령과도 아무 관계도 없는 종교 말이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희년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을 거스르는 행태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체질을 뼛속 깊이 비문처럼 새긴 한국교회에 몸 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여기서 옛 사람은 죄에 종노릇하는 사람이고 새 사람은 의에 종노릇하는 사람이다. (로마서6장) 오늘 돈(자본)에 종노릇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좇는 사람이라야 세례의 은혜를 진정 받은 사람이다.그런데 세례를 위해 우리는 늘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자신 속에서 돈(자본)이 왕노릇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을 주님께 고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체질을 그리스도로 바꾸는 지름길이다.자본권력을 추종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 자신을 주님 앞에 드러내며 자백하는 일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첩경이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 세월은 바로 이 세례의 은총을 받은 기간이라 할 수 있다. 40년 동안 옛 사람이 죽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애굽으로 들어가 출애굽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었다.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넘치는 새세상을 위한 여정에서 끝까지 야훼와 동행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받아야 할 은총은 세례의 은총이다.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 저자) ![6.2 지방선거 투표하고 왔습니다.](https://t4.search.daumcdn.net/argon/0x200_85_hr/KJ9EYaO4O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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