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묘원님 말씀대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걷는 동작, 앉는 동작, 밥 먹는 동작, 눕는 동작 등등 가급적 천천히 하면서 그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마음을 알아채면서 갈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되는 듯 싶다가도 저도 모르게 마음과 동작이 한 순간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뒷북치는 격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마음을 새로 냅니다. 몸은 자꾸 원심력처럼 치고 나가려고 하고 마음은 그 속도를 늦추면서 의도와 느낌들을 잡아 구심력으로 끌어드리려고 하는 그런 상태가 매일 매일 지속되는 듯 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알아차림을 나름대로 하면서 "내가 왜 이 수행을 하는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지만, 제 마음속에서 분명한 외침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보단 나아지고 싶다는 것, 변하고 싶다는 것 예전처럼 살진 않겠다는 것, 그것도 탐심이겠지만, 이 정도는 수행을 계속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수행을 하면서 믿음을 쌓아가고 더 좋은 동기들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합니다.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두서없이 쓰다보니 장황해졌습니다. 선생님의 자비로운 글에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 생각하는 내용이 있으면 바로잡아주십시오. 앞으로도 자주 질문 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수행하시길 ....
합장
답변 ⑤
(1) 일상의 알아차림은 좌선과 경행을 해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때 일상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어서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디고 가고 있는가." 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른 방법보다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어느 정도 된 뒤라야 실행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 마음을 선택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마음에 고정시켜놓고 하는 수행입니다. 마음이 하나하나 동작에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숙달되기만 하면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사마디가 성숙된 뒤에야 제대로 될 것입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행자가 수용할 수 있는 알아차림(sati)과 집중(samaadhi)과 노력(viriya)이 얼마나 갖추어 졌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힘은 전적으로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의 삼박자가 맞아야 하지만 이것과 다른 외적 요인도 있습니다. 이때는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되었는가 하는 것도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계율을 지키는 것과 마음의 청정도 한몫을 합니다. 이것은 계청정과 심청정과 혜청정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수행이 차츰 발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릴 대상도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서 알아차리고 집중하는 힘이 배양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단순한 알아차림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특히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지계의 청정과 마음의 청정이 되어있어야 상승효과를 얻습니다. 특히 남을 위해서 보시를 한다던가 또는 봉사를 한다던가 하는 바라밀 공덕의 또 다른 힘까지 작용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수행자라는 것은 모든 것에 모범적이고 한 인간으로서도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므로 수행방법도 전 방위적이어야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무엇 하나만 잘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해에 미얀마에 도착하여 새로 수행을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명상홀에 전기 불이 자주 꺼지고 손가락 같은 가느다란 초가 타버리면 불이 꺼진 상태로 명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제가 한국에서 가지고 간 크고 둥그런 초를 제 방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 초를 명상홀에 갖다 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제 방에서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며칠을 갈등하다가 어느 날 명상홀에 이 초를 가져다 놓고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명상을 했는데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 무렵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가 되면 호흡이 사라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미얀마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년 정도는 쓰려고 생각했던 초를 명상홀에 내 놓고 명상을 하니 한 순간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수행을 할 때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과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음단계로 이어져 나갔는데 이때 갑자기 이런 현상이 생기니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당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초 한 자루를 보시한 마음이 스스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예상하지 못한 정신적인 단계를 뛰어넘게 한 것에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선업의 마음과 보시가 얼마나 수행에 도움이 되는 가를 새삼 깊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선업이라는 행은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어떤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즉석에서 자신의 마음이 가져다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이 발전적인 삶을 가져오듯이 모든 것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자신이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을 바라고 하는 보시나, 대외적 과시용의 보시나, 자기 우월감의 성취를 위해서 하는 보시는 그만큼 순도가 떨어져서 과보도 적을 것입니다.
경전에서 보면 수행을 위해 바라밀 공덕을 쌓을 것을 말합니다. 바라밀 공덕에 대해서 가장 효과를 보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은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부처는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수승한 바라밀을 쌓아서 그 과보로 부처가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가장 수승한 바리밀을 쌓은 분이 가장 수승한 지혜를 얻은 것이란 의미로 오직 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은 오직 남을 위해 그 지혜를 활용하여 인류 각자가 스스로 번뇌를 해결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에 하는 일이 수행보다는 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불사르듯이, 운동선수가 메달을 위해 온갖 노력과 불굴의 사투를 거듭하듯이 수행자도 닙바나에 들어 도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불굴의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어찌 이러한 노력보다 뒤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과를 얻기 위한 노력은 단지 단순한 노력에 그치지 않고 가능한 모든 방법과 수단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라밀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반의 힘과 스승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바라밀[parami]은 저쪽 피안으로 건너갔다는 말인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말은 수행의 완성을 말하며 완전함, 도피안(度披岸)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밀은 수행을 위한 열 가지 덕목을 말합니다.
열 가지 바라밀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보시(普施) ② 지계(持戒) ③ 출가(出家) ④ 지혜(智慧) ⑤ 정진(精進)
⑥ 인내(忍耐) ⑦ 진실(眞實) ⑧ 발원(發願) ⑨ 자비(慈悲) ⑩ 평정(平正)
여기서 말하는 출가는 비구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재가자는 선원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밀을 쌓는 사람을 보디사타(bodhisatta)라고 합니다. 보디사타를 우리말로는 보살(菩薩)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중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또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보디사타의 유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지성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의 성향은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보살로 명상을 선호합니다.
둘째, 헌신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은 믿음과 신앙심이 깊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기복으로 믿지 않습니다.
셋째, 활동적인 보살이 있습니다. 이 보살은 남을 위해 활동적으로 봉사를 합니다. 봉사나 보시를 해서 얻은 기쁨을 행복으로 알고 노력을 합니다. 특별하게 명예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칭찬과 비난에 개의치 않고 노력합니다.
결과적으로 바라밀의 초석 없이는 수행을 하는데 한계가 있고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수행을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에서 이기적이기 쉬운 마음을 바라밀로 따뜻하게 해야하며 자비로움으로 초석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
(2) 수행의 특성이란 처음에는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섯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또 다른 요인은 전혀 새로운 의식세계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소에 가지고 있는 탐진치의 습관으로부터 관용, 자애, 지혜의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삿된 견해인 아만심은 하루 이틀에 생긴 불선업의 성향이 아닙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연륜에 비하면 위빠싸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 소멸되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신비할 정도로 빠른 것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의 특성은 고요함을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대상의 성품을 알아 지혜를 얻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혜의 성숙과정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혜의 성숙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체계화 되어있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지혜가 빠르게 성숙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승의 가르침을 얼마나 확실하게 따르느냐 하는 문제만 있습니다. 위빠싸나는 다른 수행에 비해서 거의 완벽할 정도로 체계화되어 있어서 수행자들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행을 시작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런 현상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입니다. 이런 과정의 배경에는 유신견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수행은 나라고 하는 아만심(我慢心)을 없애는 것이 목표 중의 하나인데 수행을 시작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된다면 이 아만심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마 수행을 하기 이전보다 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질 것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것인데 조금만 잘 되어도 됐다, 기회다, 이번에 아라한이 되자, 하고 금방 아라한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이런 아만심 때문에라도 처음부터 수행이 잘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생, 고생을 하다가 코가 좀 납작해졌을 때 조금 진전이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렇게 무수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라고 하는 아상(我想)이 마모되어 갑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과의 승부입니다. 그러므로 불선업의 탐진치의 마음이 그냥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고,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당한 수행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알아차림 하나만큼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야 비로소 약발을 받습니다.
닙바나님께서 대상을 모르고 지나치다 나중에 뒷 북을 치듯이 아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예 뒷 북조차 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북을 친 것이 가장 빨리 친 것입니다. 이렇게 치다 보면 나중에는 숙달이 되어서 엇박자가 생기지 않고 제 박에 장단을 칠 수 있게 됩니다. 처음부터 북을 잘치는 명 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고수가 주위에 시선을 판다거나 소리꾼의 소리에 넋을 잃고 귀가 팔리지 않으면 됩니다. 고수는 항상 눈을 창자의 입에 고정합니다. 그래서 소리와 함께 장단을 쳐서 함께 판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다른 곳에 정신을 판다거나 아니면 소리가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취하여 그만 귀가 팔리면 박자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이것을 판소리에서는 귀팔렸다고 하는데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귀팔리면 박이 삐는데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고수가 북가락 장단을 자랑하려고 요란하게 앞서서 북을 치게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소리를 방해하게 됩니다. 고수는 다만 보조자로서 상황의 흐름을 타고 함께 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에서는 억지로 만들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에서 소리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이고 고수의 북은 대상을 겨냥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소리와 수행이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고수가 화려한 북 가락을 뽐내는 것은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만들어서 한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역할은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보고 대상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가 나는 길입니다. 일고수 이명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소리에서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행에서는 이와 같이 대상을 겨냥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심력은 습성이고 구심력은 알아차림입니다. 누구나 알아차림보다는 습성이 강하게 마련입니다. 습성은 밖으로 나가 이것저것 시비를 가리며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인데 알아차림은 현재를 알고 내면의 본질을 아는 선업이라서 쉽지가 않습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사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습관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고정관념입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로 살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과연 깨어있는 자기 의지로 사는 삶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볼만한 일입니다. 누구나 거의가 탐진치와 망상의 연속입니다.
또한 태어난 이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마음은 부단히 밖으로 향해 끊임없이 욕망과 성냄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삶의 방법, 새로운 수행방법을 익히셨으므로 한 장, 한 장씩 벽돌을 쌓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벽돌이 성글게 쌓이지만 차츰 조밀해 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 사념처 수행의 이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① 마음의 청정 ② 슬픔과 근심의 극복 ③ 비탄의 극복 ④ 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⑤ 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⑥ 네 가지 도과(道果)의 성취 ⑦ 열반의 성취
그리고 사념처 수행을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에까야나(ekaayan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의 길, 유일한 길, 또는 일승도(一乘道), 하나의 목표로 통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라는 위빠싸나 수행에 대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여기서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에까야나(ekaayana)의 여러 가지 뜻을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① 단 하나의 길.
샛길이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확신을 갖고 처음부터 자유롭게 될 때까지 이 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②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 길.
어차피 혼자 태어나서 혼자 성장하다가 혼자 죽는 것인데 깨달음에서 누구도 자신의 집중이나 지혜를 남에게 주거나 받을 수 없고 오직 혼자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한 분의 길.
한 분의 길이란 사념처 수행은 부처님께서 보살로서 선업을 쌓으신 공덕의 과보로 찾아내신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오직 한 분이신 부처만이 알아내신 길임을 의미합니다.
④ 유일한 길.
이 길만이 오직 닙바나에 인도하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닙바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길이 아닌 사념처 수행의 길에 들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⑤ 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
사념처 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림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르게 되고 고통을 해결하고 마음의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을 의미합니다.
이상은 위빠싸나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가장 극명한 경전의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확신에 찬 믿음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여 도과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묘원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합장
묘원님의 글을 보며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이리치고 저리치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달려 왔는데,이제야 조금 알 것 같네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