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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 엘리야의 두려움과 하느님 체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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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엘리야의 두려움과 하느님 체험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오늘 독서의 엘리야는 동굴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굴에 있습니까?
그것은 동굴에 숨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시 왜 동굴에 숨었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숨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시 무엇이 왜 두렵습니까?
엘리야와 관련하여 이런 질문이 계속되는 오늘인데
자기를 죽이려는 이제벨이 두려워 숨은 것이지만
실은 이제벨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지 않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으면 이제벨 뿐 아니라 개도 두렵고 개똥이도 두렵습니다.
왜냐면 두려움은 사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내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최악을 각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 하나라면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이고 이것이 더 완전합니다.
최악을 각오한다는 것은 뒤집으면 선을 하나도 기대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내 문 앞까지 실제로 와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기까지는 프란치스코처럼
최선에서부터 마지막 하나 쥐고 있던 선까지 포기하는 가난과
작은 악에서부터 가장 싫어하는 악까지 껴안는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최악을 각오하게 되고 두려움이 없게 되었어도
오늘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인간은 다시 두려움 앞에 서는 존재이고,
그래서 오늘 엘리야처럼 다시 하느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이 또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앞에 있을 때 의지적으로라도 주님께 몸을 돌리고
오늘 엘리야처럼 하느님께서 나타나주시기를 바라고 기다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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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또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 5,29)
오늘은 여섯 개의 대당명제 중 둘째와 셋째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간음과 불륜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서간>에서 말합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그러기에, 응징 받아야 할 대상은 육신의 지체 자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를 부추기는 자발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를 뽑는 데는 옛 율법의 계명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죄를 짓게 하는 내면의 지체를 잘라내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 5,29)
이를 문자적으로 알아들으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자칫하다가 우리 몸이 하나도 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이는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내면의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눈은 죄를 불러오는 통로요, 손을 죄를 행하는 도구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자신의 몸을 단련하어 복종”(1코린 9,27)시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우리 안에 있는 나쁜 욕망들을 죽이는 것’(콜로 3,5)입니다. 그리고 그 그 길은 나쁜 욕망들을 “그리스도의 바위로 치는 것”(1코린 10,4)입니다. 곧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으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생각을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볼 때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이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주고 있는 빛을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투쟁의 길입니다. 그러니 영적 투쟁은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면서 빛의 조명으로 일치의 길을 갑니다(위 디오니시우스는 조명과 정화와 일치의 영성원리로 말한다.)
오늘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를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부터 영적 음료를 마시며, ‘의로움의 길’을 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와 자비로 이 길을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은 것이 낫다.”(마태 5,29)
주님!
겉으로 가려진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듯”(마태 6,22), 마음의 눈이 맑게 하소서!
마음속 떠도는 그릇된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마음속 깊게 새겨진 사랑의 법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항상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제 행실이 당신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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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까지 사랑하라」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지키는 것이 쉽지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는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 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굳이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기 바랍니다. 기쁨과 희망이 되어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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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둑 용어 중에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처음부터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포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먼저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이 포석에서 많은 집을 확보합니다. 같은 한 점이지만 포석에 따라서 20집이 되기도 하고, 30집이 되기도 합니다. 포석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 전체형세에서 집이 부족한 사람이 먼저 전투를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집이 부족하면 바둑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이때 작은 집을 포기하고 더 큰 곳을 차지하게 됩니다. 집이 부족한 사람은 눈앞에 있는 작은 집을 차지하지만 결국 바둑은 지게 됩니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 바둑에서는 ‘소탐대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벌써 18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당시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저의 강의는 4시부터이지만 1시에 가서 미리 봉사자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저의 강의 주제는 마리아의 신앙이었고, 제 앞의 신부님의 강의 주제는 성화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임을 마친 후 저는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당 앞에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습니다.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기에 저는 사우나에서 피곤을 풀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헌법재판소에서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에 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행정수도 옮기는 것을 부결하였습니다. 관습적으로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우나에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사우나에서 저의 이름을 부른 적도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2시에 강의를 하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했답니다. 봉사자는 제가 이미 와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신부님은 고맙다고 하면서 그럼 강의 시간을 바꾸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때부터 봉사자는 저를 찾아 다녔습니다. 5월 성모성월이라서 제가 성모동산에 있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사제이기에 성당에서 조배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본당 신부님과 대화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봉사자는 성당 밖에 있는 불가마 사우나를 보았고, 혹시 해서 저를 찾는 방송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저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후사정 이야기를 듣고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저의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봉사자가 생각한 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몸이 조금 편하자고 따뜻한 사우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도 ‘소탐대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소탐대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고,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것을 탐하면서 소중한 신앙교육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성당에 가지 않아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성당에 나갈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기도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일매일 삶 속에서 드러내는 실천이며 행동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목숨을 바치면서도 지켜온 신앙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모든 것이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소탐대실’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전을 신축하고, 병원을 세우고, 피정의 집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입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를 부활에로 이끈다는 믿음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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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죄의 뿌리인 마음의 살핌과 존엄한 여성♣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약성경은 간음죄를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에 대한 탐욕(탈출 20,17; 집회 41,23)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교의 미쉬나에서도 “손으로, 발로, 생각으로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좀더 근본적으로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간음죄를 범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인 마음부터 깨끗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5,30)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눈, 손, 발을 빼버리는 것이 소용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눈과 손, 발이 죄를 짓는다고 그 지체를 절단하는 것으로 유혹을 이길 수는 없으며 올바른 생활의 근원은 정결한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5,8).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도 늘 맑고 바른 마음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실 마음은 모든 죄악이 생겨나는 근원적인 자리이며, 마음이 비뚤어지면 왜곡되고 비윤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욕구의 비뚤어짐과 혼탁해짐은 그릇된 행동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고치려면 그 뿌리인 마음의 작용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움직임은 고요와 침묵 가운데에서 행동을 멈추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주의하면서 미세한 감정의 분출과 의식의 흐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은근한 움직임들 안에 나의 욕구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요인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께서는 남이 죄를 지을 기회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하며 여성의 존엄성을 절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가르치심입니다. 본디 이혼장을 써주는 제도는 이혼을 당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미흡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까지도 금지하십니다.
한 번 맺은 결혼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므로 재혼은 물론 허용되지 않고 나아가서 소박조차도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혼관입니다(5,31-32).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며 이기적인 욕망이나 지나친 쾌락의 요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는 이런 엄격한 가르침의 예외로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는 소박과 재혼을 허용하였습니다(5,32).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적 차별을 받던 여성들의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인정하시고 존중하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떤 동기나 조건, 가치에 따라서도 서로를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죄가 생겨나는 마음자리를 고요와 침묵 가운데 살피고, 존엄한 인간성을 서로 존중하는 거룩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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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약弱한, 그러나 강强한 인간”
-기도와 사랑도 선택選擇과 훈련訓練이 필수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14,1)
오늘 미사중 입당송 시편이 힘을 줍니다. 끊임없이 간절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시편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어제의 감동적인 예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주신 참 소중한 선물이 사랑입니다. 생전 처음 수도원에 피정왔다가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감동깊게 읽은 60대 중반의 참 순수한 자매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게 솟았었나 봅니다. 카톡을 통해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죄송해요. 자꾸만 신부님 생각이나요. 죄송합니다!!!
아 그러나 걱정마세요. 주님의 제자로 존경하는 의미로 좋아하고 생각나는 거예요. 걱정마세요.”
저를 좋아하는 마음에 다시 수도원을 찾아 와서 고백성사를 보고 떠난 자매에게 끝기도시 떠오른 진실한 내용 그대로와 어제 “하느님”이란 시도 보냈습니다. 저는 요즘 누구든 메시지를 보낼 때는 용감하게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호칭 앞에 붙입니다. 계속 붙이다 보면 정말 “순수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은 정말 축복 받으셨습니다. 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니까요. 하느님께서도 자매님을 참 많이 사랑하시네요! 저도 하느님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자매님 좋아하고 사랑하며 기도할께요. 좌우간 자매님은 하느님께 축복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될 것입니다. 저를 사랑했던 모든 분들이 결국은 모두 잘 되었거든요!”
끝기도후 즉시 답신을 보내고 참 만족했고 감사했고 행복했고, 즉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어제 “하느님”이란 시도 다시 보냈습니다.
“정말인가요 신부님!!
지금 시간에 신부님 소식이 오니 기적같습니다. 신부님 말씀 무조건 믿으며 감사합니다. 시 참 좋아요. 웬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나는 건 왜인지--- 신부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늘 봐도 새롭고 좋고 그리운 하느님이시다’ 이 구절 너무 아름다워요!”
기도와 사랑이 답입니다. 기도와 사랑도 선택이자 평생 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너나 없이 ‘질그릇’처럼, ‘유리 그릇’처럼 약해 깨지기 쉽습니다. 상처받기도 쉽고 깨지기도 쉬운 마음입니다. 예외없이 복음의 예수님도 제1독서의 엘리야도 똑같습니다. 참으로 약한 인간, 그러나 강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사랑과 기도가 답입니다. 저의 이러한 답신도 끝기도때 떠오른 선물같은 생각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쓴, “파스카의 꽃”이란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사랑의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는 주님 향한 사랑과 기도가 날마다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사랑 꽃으로 살게 합니다.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엘리야가 그러합니다. 매일 말씀을 볼 때는 맨앞 < > 짧은 말씀 요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요약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엘리야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앞부분,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도주하는 장면도 재미있는데 아깝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에는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19,7)라는 주님 천사가 엘리야를 격려하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전 수녀원에 피정갔다가 식당에서 발견하고 감탄한 구절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바로 이 미사중 성체를 나눠 주시며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의 엘리야도 참 절박합니다.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계속 절박한 상황입니다. 아합왕의 왕후인 악녀惡女 이제벨의 보복을 피해 호렙산으로 도망친 참 약하고 겁많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말씀은 호렙산 기도중에 나타난 사랑의 기적입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기도중에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에 이어, 지진이, 그 다음 역시 요란한 불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에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중에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을 때 한소리를 듣습니다.
“엘리아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제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주님과 엘리야의 대화의 기도요, 다시 주님은 엘리야의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이처럼 기도가 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기도하게 되고 주님은 분명 응답을 통해 답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의 장소인 산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 고요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새삼 우리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이 참 고맙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느님의 산 호렙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가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 서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라는 말씀 그대로 오늘 복음을 요약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남자들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트라피스트회 수도사제 ‘마이클 케이지’ 영성대가는 정결은 평생 과정이라 말합니다. 죽어야 비로소 정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는 충격 요법적 표현입니다. 간음으로 이끌어 죄짓게 한 오른 눈을 빼어 내던지라고 하며, 죄짓게 한 오른 손을 잘라 던져 버리라 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한다면 천국에 가면 남자들은 모두다 외눈 박이, 한 발의 불구자들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중하고 치명적인지, 절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도 젊고 힘있을 때 지을 것이지 나이 들어 약먹으면서 까지 죄지어선 안될 것입니다. 후유증도 상처도 커서 치유되는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며 잘 살기에도 얼마 안남은 세월인데 죄의 짐까지 더해 지면 노년의 삶은 더욱 힘들어 질 것입니다. 나이들면 대부분 약을 먹게 되는데 바로 이것은 내힘이 아니라 은총의 힘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인 것이니 더욱 기도해야 하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 역시 간절하고 절박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벽壁을 문門으로 바꿀수 있고, 폭풍暴風같은 분노도 미풍微風의 고요로 바꿀수 있고 식욕食慾, 성욕性慾, 물욕物欲도 정화하여 하느님 사랑의 열정으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뿌리에는 분노가 있고, 간음의 뿌리에는 음욕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의 선물, 성령의 선물을 통해 그 뿌리가 되는 마음 안 분노와 음욕의 정화요 성화입니다. 이어지는 지혜, 온유, 겸손, 사랑, 인내, 기쁨, 평화 끝없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질그릇 같은 약한 인간을 강하게 하는 기도와 사랑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영적 주식중의 주식이, 최고의 힐링 시간이,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질그릇 같이 약한 우리 모두를 당신 신망애信望愛의 선물로 날로 강하게 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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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는 자매님으로부터 남편과 부부 싸움을 심하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싸우셨는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었다면서, 왜 이런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사건의 원인은 커피였습니다. 식사 후에 “커피 타드릴까요?”라고 물으니 “좋지~~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하게 탈까요? 연하게 탈까요?”라고 묻고, 설탕을 몇 스푼 넣을지도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함께 산 지가 몇 년인데 자기 취향도 모르냐고 버럭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자매님은 너무 억울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타 주려고 물은 건데 이게 화낼 일에요?”라고 따졌답니다.
결혼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30년 넘게 같이 살았어도 싸운다고 하더군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서로 통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통하지 않기에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기 위해, 진짜로 통하기 위한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이혼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아내를 버리는 자도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라고 하시지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실험 카메라 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몸매가 좋은 여성이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쳐다볼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몇 명이나 쳐다보았을까요? 남녀노소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이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었다면 모두 눈을 뽑아버려야 할까요?
눈이나 손은 마음이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빼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은 곧 그러한 마음을 빼버리고 잘라 버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잘못된 마음을 모두 빼고 잘라 버리면서,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위해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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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따로 없다. 오직 우리의 생각에 달렸다(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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