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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송이 수선화로 시작된 봄날의 꽃 잔치는 진달래, 철쭉, 만병초가 가득한 아젤리아 가든(Azalea Garden)으로 이어지고, 그 꽃들이 시들해질 즈음에는 벚꽃 계곡(Cherry Valley)에 줄지어 선 백 년생 벚나무들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봄비에 떨어진 벚꽃 잎이 소복하게 계곡을 덮을 때면, 라일락 컬렉션(Lilac Collection)에서는 수백 그루의 라일락 꽃나무들이 진한 향기로 온 정원을 사로잡는다. 숨 가쁘게 이어져 온 꽃 잔치의 절정은 단연 6월의 장미. 그늘 한 점 없는 장미 정원(Rose Garden)은 식물원에서 제일 더운 곳이지만, 장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사도 사연도 다양한 수백 종의 장미들은 이맘때 본격적으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길게는 11월까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뉴욕식물원 장미 정원. (이하 사진: 필자 제공)
꽃나무들의 향연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가 주로 야생화라고 부르는 초본류 식물들은 일찌감치 꽃을 떨구었고 빠른 것들은 벌써 씨앗을 맺기 시작한다. 크로커스, 수선화, 튤립 등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대부분의 알뿌리 식물들은 어느새 내년에 쓸 양분을 알뿌리에 비축해놓고는 이미 깊은 여름잠에 들어갔다. 수많은 꽃들로 온 숲을 파스텔 톤으로 채색했던 단풍나무, 자작나무, 느릅나무 등의 교목들도 수분을 끝낸 암꽃에서 씨앗을 맺기 시작했다. 이맘때의 숲이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는 이유는 나무들의 성장 주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봄날의 햇빛을 충분히 활용한 꽃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풀과 나무들은 풍성한 잎을 내며 본격적으로 광합성에 돌입한다. 여름날의 강한 햇살을 받아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비축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다. 정오의 태양이 정수리에 따갑게 내려앉는 시기에 식물원도 이른바 ‘비수기’에 접어드는데, 이 시기에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매력적인 장소가 있으니 바로 숲 정원이다.
숲 정원의 부상
숲 정원(Woodland Garden)은 19세기 전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그 기원은 이집트와 근동, 인도와 중국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우리나라 전통 정원들도 숲을 정원의 일부로 끌어들인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정원의 생태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자연주의 정원이 큰 흐름을 만들면서 이런 유형의 정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숲 정원의 개념을 탄탄하게 정립하기 위한 연구들과 더불어 여기에 적합한 식물들을 선정하기 위한 시도들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나도 우리나라 조경가들과 함께 숲 정원 연구 모임에 1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의 가장 큰 고민과 관심사는 숲 정원의 식물 목록에 어떻게 더 다양한 초본류를 보탤 수 있는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숲 정원이라는 개념도 생소하거니와, 숲 관련 정책과 연구들이 목본류, 즉 나무에 치중되었기 때문이다. 북미 지역의 숲 정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숲속 식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뉴욕식물원의 경우 다양한 종류의 고사리를 포함해, 우산나물, 삼지구엽초, 곰취 등이 식재되어있고, 캐나다의 몬트리올 식물원에서는 그늘진 숲 길가에 머위를 심은 예도 있다. 이런 식물들은 우리나라에서 ‘나물’로 알려져 있고, 개중에 꽃이 예뻐서 관상 가치가 높은 것들도 ‘야생화’의 범주에 넣다 보니, 정원 식물로 시도하거나 활용하기까지는 가용성과 난이도에 관한 인식의 장벽이 있는 듯하다.
뉴욕식물원의 아젤리아 가든은 전형적인 ‘숲 정원’의 조건을 갖추었다. 키 큰 나무(교목) 아래는 풍년화, 산딸나무, 철쭉, 수국 등 소교목과 관목이 자리 잡았고, 비비추, 풍지초, 고사리, 우산나물, 삼지구엽초 등 초본류가 숲 바닥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숲 정원이 새로운 개념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리 인식 속에서 정원은 문명의 범주에 들어가있었기 때문에 숲과 정원의 합성어는 다소 어색하게 들린다. 게다가 숲을 누리는 우리의 감수성은 아직 일차원적이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걸으며 운치를 즐기거나,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나무 숲에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단일 수종에 한정된 숲이 아닌, 식생의 다양함과 조화로움이 가득한 숲의 매력에 눈이 뜨이면 숲 정원 산책은 벚꽃길이나 장미 정원에서 경험하지 못한 감동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된다. 큰 나무부터 작은 나무까지 층위 구조가 잘 구현되어있을 뿐 아니라, 하부 식생이 다양한 초본류로 채워진 숲 정원은 봄날의 라일락 화원이나 장미 장원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감동을 선사한다.
다양한 식물들이 자리를 잡아 가면서 한 지역의 식생이 안정화되는 과정을 천이(遷移)라고 하는데, 이 기나긴 여정의 끝은 대개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이다. 이 숲은 전형적인 층위 구조를 보이다. 층위 구조란 성숙한 숲에서 나타나는 수목의 크기에 따른 계층 구조인데, 가장 높은 곳에는 느릅나무, 참나무류, 백합나무 등 20-30미터에 이르는 교목들이 숲의 윤곽을 형성하고, 그 아래 그늘진 곳에는 생강나무, 단풍나무, 산딸나무 등 3-7미터 높이의 소교목 또는 아교목이 자리를 잡는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는 진달래 등 2미터 이내의 관목들이 무성하고, 맨 아래는 각종 지피식물들이 담요처럼 흙을 덮는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의 세월을 통해 최적의 생태적 안정성에 다다른 숲을 극상림(極相林)이라 부르는데, 이런 숲속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햇빛과 공간을 나눠 쓰기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으로 어울리며 자라고 있다. 또한 고도의 생태 다양성을 보이며, 공기를 정화하고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 기능적 측면도 뛰어나다. 숲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생태적 조화와 균형까지도 복원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숲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초록 덩어리 같지만, 안에서 살펴보면 수많은 식물이 햇빛과 공간을 공유하기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자라고 있다. 층위 구조가 잘 드러난 뉴욕식물원의 숲.
경계의 정원
내가 숲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속에 내재된 심미적, 생태적, 기능적 가치뿐 아니라, 화단과 동의어였던 정원의 의미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정원은 문명의 일부로 간주되어왔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원한 정원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잘 개간된 부지와 관개수로, 그리고 다른 대륙에서 도입된 이국적인 식물들이 부각되었다. 제국들의 왕실에 속한 정원들은 그 규모와 형식이 곧 권력의 크기를 상징할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다. 근대의 정원 축제에서는 수만 제곱미터의 광활한 부지를 화려한 패턴으로 수놓은 화단들이 주목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파트가 고급화되면서 조경의 중요성이 드러났고, 아파트마다 석가산(石假山)이 세워지고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을 동경하면서도 소유를 통해 그것을 향유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정원 문화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이렇듯 우리가 문명을 일으켜온 방식 속에서 정원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목마름 때문이었을까. 19세기 전후 영국에서 발원한 자연주의 정원의 명맥이 현재까지 흘러오다가 근래 들어 숲 정원을 포함한 자연주의 정원이 다시 주목받는다. 정원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문명 속에 어떻게 자연을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들도 큰 도전이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정원의 개념에 대한 인식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정원의 의미를 문명 일부로 한정시켜놓고, 자연과 문명 사이에 굵은 선을 그어놓은 상태로는 진정한 의미의 자연주의 정원을 구현하기도, 감상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삼지구엽초와 우산나물, 곰취와 머위를 정원에 들여놓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식물들이 ‘나물’ 또는 ‘약초’라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정원을 자연과 문명의 경계라고 정의해왔다. 자연주의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숲 정원 연구에 참여하면서 정원의 의미에 깊이를 더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문명에 종속되어있던 정원이 문명의 가장자리로, 문명과 자연의 경계로 뻗어나가는 모습이 즐거웠고, 자연과 문명의 충돌로 긴장과 갈등이 고조된 그 경계에서 정원이 치유와 화해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잡는 모습이 기뻤다. 무엇보다 정원의 언어로 경계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경계는 일차원적인 선(線)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사실 경계는 하나의 공간이자, 시간과 의미로 가득한 다차원적인 세계다. 마치 결혼과 같다. 두 인격체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과정에는 이질적인 두 세계의 충돌이 수반된다. 서로 다른 성장 환경, 가치관, 기호와 성향, 기질, 때로는 양가 부모들의 간섭과 통제가 개입되면서 긴장과 갈등은 증폭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두 세계의 충돌로 긴장과 갈등이 가득한 가정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새로운 세대가 형성된다. 이처럼 경계는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곳이다. 남북이 반세기 넘게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는 한반도에서 생태적 다양성이 고도화된 곳 중 하나로 알려졌다.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에는 담수와 염수 생태가 혼재되어 독특한 수중 생태계를 이루고,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은 어족 자원이 풍부하다. 이렇듯 자연에서 형성된 경계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오히려 생명력이 충만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멕시코와의 국경에 미국이 세운 장벽에서 보듯, 사람이 만든 일차원의 경계선에서는 분열과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경계의 교회
자신을 경계인이라 소개하는 사람들을 종종 접한다. 이도 저도 아닌 삶에 대한 회한도 담겨있고,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소외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어느 체제에도 종속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의미로 자신을 경계인이라 표현했든지 간에, 나는 그런 사람들이 반갑게 느껴지고,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하다. 경계에 선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꽤 깊은 수준의 성찰이다. 경계를 살아갈 준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오래전 강의에서 승효상 건축가는 팔레스타인 출신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인용해서 지성인은 자신을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추방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권력과 지성인》에서 소개한 지성인의 역사적, 철학적 의미에 관한 깊은 고찰들을 한마디로 압축한 표현이다. 사이드는 “진정한 지성인들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한다”고 설명한다.1) 나아가, 프랑스 철학자 줄리앙 방다를 인용해 진정한 지성인들은 자신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현실적 목적 추구에 있지 않은 자들로서, 예술, 학문, 또는 형이상학적 사색의 실천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으로서, 요컨대 비물질적인 이익을 소유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라고 말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자들이라 말한다.2)
그러므로 경계를 산다는 것은 갈등과 긴장의 현장으로 파고드는 것을,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뜻한다.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늘 경계에서 살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성과 속의 경계, 유대와 이방의 경계, 예루살렘 성 안팎의 경계에서 예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죽고, 살아났다. 경계를 살면서 겪은 고난과 고초 속에서 오히려 그는 생명의 능력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었다. 반대로, 예수를 대적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높은 담을 쌓고, 가장 안쪽의 가장 안전한 곳에서 안정을 누리고자 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였던 울산의 태화강은 한때 죽음의 강이었다. 오랜 복구 노력 끝에 은어가 돌아오는 등 토종 생태계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현대의 도시 정원은 문명이 만든 상처를 치유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자연과 문명의 긴장과 갈등을 조정하는 완충 지대이다. 울산 태화강은 순천만에 이어 제2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었다.
어떤 교회는 예수의 길을, 어떤 교회는 반대의 길을 간다. 교회의 실패는 거의 전부가 외부의 도전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경계에 살기를 거절하고, 가장 높은 곳, 가장 중심적인 곳, 가장 안전한 곳에 머물기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은 왜 그렇게 안전한 곳을 선택했을까.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성을 쌓기 시작한 데서 도시의 기원을 찾는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기억해본다. 교회는 정말로 가인의 정신을 따랐던 걸까. 세상으로 나갈 자신이 없어서, 보복의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가진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듯 건물을 올리고 제도를 강화했던 걸까. 반대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교회들, 가난해지길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들, 중심보다 주변에 머무르길 결정한 교회들의 이야기는 성도의 삶이 경계에 선 삶임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예수께서 그들이 선 경계에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우리들의 많은 교회가 경계에 사는 법을 다시금 훈련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도전은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마주한 것이기도 하다. 50년 역사의 이민 교회로서, 이 교회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 공동체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부르심 앞에 서있다. 이민 1세대들에게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넘기 힘든 장벽이다. 이웃은 고사하고, 우리말보다 영어가 익숙한 자녀 세대들과의 소통과 교감도 큰 도전이다. 이 견고한 장벽을 허물고, 선(線)으로서의 경계를 넘어, 다양성이 충만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으로서의 경계에 서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고심하는 중이다.
얼마 전 우리 교회 선교부 산하에 새로 출범한 선교조사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초청된 강사는 교회와 이웃한 뉴욕주의 유서 깊은 도시 트로이(Troy)에서 한국 음식점 ‘선희네 부엌’과 유기농 농장을 경영하며 6년째 난민 지원 사역을 해오고 있는 안지나 대표였다. 그녀는 세 가지 사명 선언을 제시했다.3) 첫째, 건강한 음식 문화의 보존과 보급, 둘째, 지역 공동체의 연대, 끝으로 이민자와 난민 정착 지원이다. 교회에서 이분을 초청한 이유는 바로 난민 사역에 좀 더 관여하기 위해서다. 이곳은 뉴욕 등 대도시에 비해 치안과 교육 여건이 좋고 주거 비용도 비교적 저렴해서, 해마다 유입되는 난민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안 대표는 오랫동안 난민들을 위해 영어 수업을 개설하고, 주거, 의료, 직업 개발 등을 도왔는데, 그들이 정착하는 데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비자와 영주권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법률 서비스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서비스 자체를 받기 위해서 1-2년을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결국 안 대표는 이를 위해 뉴욕 주립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있다. ‘선희네 부엌’과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모색의 과정은 우리 교회가 ‘한인교회’ 정체성을 넘어 ‘지역교회’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자, 경계를 사는 훈련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교회 동쪽 방향에는 이웃의 주택가 사이에 작은 숲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엮어 요새도 만들고, 나무 사이 오솔길로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도 하던 숲이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놀던 모습 그대로 숲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었다. 팬데믹 기간, 아이들도 찾지 않는 숲은 더없이 적막했고, 낙엽과 정원 폐기물이 쌓여가면서 황폐해졌다. 허리케인 와중에 큰 나무 몇 그루가 넘어가면서 이웃집 울타리가 파손되었다. 울타리를 복구하고 서둘러 업체를 불러 위험해 보이는 나무 일곱 그루를 잘랐다. 대개 이렇게 교란이 일어난 숲은 외래 식물들에 의해 빠르게 잠식된다. 토종 식생이 파괴되고, 몇 종류의 침입종 식물들이 숲 하부 식생을 장악한다. 이 숲을 돌아볼 때마다 성경 속에 묘사된 버려져 황폐한 땅의 모습이 실물로 드러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숲이 이웃에게 민폐로, 동네의 흉물로, 그리고 성경 속 ‘황폐한 땅’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것이 마음 아팠다. 식생을 조사하고 활용 방안을 구상하기 위해 이 숲을 거니는 동안 마음속에 부흥(Revival), 회복(Restoration), 견고함(Resilience), 화해(Reconciliation)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름다운 숲 정원이 그려졌다. 이곳에 토종 식생이 잘 구현된 자생 식물 정원이 만들어진다면, 이웃의 어린아이들이 통나무를 굴리며 노는 정원이 만들어진다면, 가끔 이웃을 초청해 음악회를 여는 숲속 무대가 만들어진다면, 황폐해진 지구를 향해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위로하는 영성의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숲은 교회와 이웃의 경계로서, 생명력이 넘치는 다차원의 공간으로서, 또 경계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숲을 복원할 계획을 프로젝트 알(Project R)이라고 이름 붙였다. 먼 길이지만, 오늘도 이 숲을 한 발 한 발 걸으며 꿈을 심고 기도를 심는다.
■ 주
1) 에드워드 사이드, 《권력과 지성인》, 21, 117쪽.
2) 앞의 책, 36쪽.
3) ‘선희네 부엌’ 홈페이지(www.sunhees.com/the-mission)에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