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그룹-
미쓰비시 (Mitsubishi, 三菱)
석삼(三) 마름릉(菱)/ 세개의 마름모로 만들어졌다는 뜻인듯...
미쯔비시(三菱)는 우리나라 여배우 송혜교 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 했다는데...
송혜교 는 전범기업에 모델을 할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요청을 거부
했다고 한다.
물론 모델료는 엄청 나겠지만 송혜교 옳은 선택을 한 것아서 박수를
보내면서 우리도 이들 전범기업의 상품을 구매하지 말아야 할것같다.
전범기업 미찌비시(三菱)
2차대전 당시, 적극적 으로 군대에 군수물픔을 제공 하였으며 식민지
국민을 강제 징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고 전쟁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그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미쯔비시는 어떤 기업 ?
많은 전범기업(戰犯企業)들이 있지만 미쯔비시는 거의 전범기업 중에
적극적 리더라고 볼수있을 정도로 많은 만행(蠻行)을 저질렀고 그것을
기반으로 많은 성장을 한 기업 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동원
해서 군수물품에 제료가되는 석탄,철광석등을 캐는일을 강제로 시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 중국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참혹(慘酷)하게
죽어 나갔다.
미쯔비시에 강제동원장소(强制動員場所)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역이
군함도(軍艦島)이곳은 미쯔비시에 소유이며 예전에 무한도전 맴버들이
가서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한다.
슬픈 일이지만 군함도는 현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일본에 관광지가 되었다.
이유(理由)가 아시아에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기반시설 이라는것
때문이다.
그 이면에 있던 죄악들은 다 잊혀져도 된다는 것인가?
아직 살아있거나 돌아가신 분들에게 사죄(謝罪)도 하지않고 이 섬에서
관광으로 돈을 번다니 경제동물 쪽바리 다운 발상이다
미쯔비시 관리하 에 있었던 군함도 에 갇힌 사람들은 탈출은 꿈도 꿀수
없었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어 나가야 했다.
매일같이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죽어 가는 장면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것이 얼마나 가슴아팠을 까?.
미쯔비시는 한국인(韓國人)만 강제동원(强制動員) 한게 아니라 중국인
미국인 들도 있었다고 한다.
미쯔비시가 미국에서는 미군포로 들을 강제노역 시킨 과거에 대해서는
공계적 으로 사과(謝過)를 했다.
이유는 강제노역과 전쟁포로 는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시장도 크고
힘도 쎈 나라이니 강자에게 살살거리는 왜인들의 성격이 드러나 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사람들이 입은 피해가 훨씬 큰데 한마디도 없는 것은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수 없다.
미쯔비시를 포함한 많은 전범기업들이 빠른 시일 내에 한국 중국에게
엎드려 사죄를 해야 할것이다.
이와사키야타로가 1870년 경영하던 정부운영의 海運會社 를 계승해
설립한 것이 미쓰비시 원형 이라고 한다.
1차 세계대전중 기존의 회사에 철강, 보험, 정유, 비행기 생산, 화학등
여러 계열회사가 추가되어 1920년대 말에는 일본에서 2번째로 큰 재벌로
성장 하게 된다.
일본이 패망(敗亡)하자 점령당국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군정이 끝날 즈음
다시 결합되어 되살아났다.
가족소유 의 지주회사가 아니라 여러 회사 사장 들이 정책을 조정하며
회사 간에 어느 정도 재정적 의존관계 가 있는 형태 였다.
미쓰비시 전기 는 발전기· 변압기· 승강기와 같은 중장비 에서 냉장고·
텔레비전, 반도체·컴퓨터 등의 다양한 전자기기를 제조판매 하며,
미쓰비시중공업은 공작기계·항공기·농기계·철도차량을 생산하고 조선사업·
공장건설에도 관여하다 1970년 미쓰비시 자동차회사 로 독립한다.
가족소유의 거대한 미쓰비시재벌 에서 비롯되었는데 미쓰비시 재벌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해체 되었지만...
미쓰비시 시계(三稜時計)로 시작한 최초(最初)의 회사는 무역· 해운회사인
미쓰비시상회[三菱商會]로, 1873년 이와사키 야타로 1870년부터 자신이
경영을 맡아오던 정부운영의 해운회사를 계승해 설립한 그런 회사 이다.
일본정부는 상공업촉진의 일환으로 그에게 수년 동안 상당한 재정지원을
해주었으며 그 결과 이 회사는 일본최대의 해운회사로 성장 하게 된다.
그 뒤 이와사키는 경영다각화를 꾀해 광업에 손을 댔으며 금융업·창고업·
조선업·부동산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은행업에도 착수했다.
1893년 이 사업들은 가족소유의 지주회사(持株會社)인 미쓰비시합자회사
로 통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전후에 기존의 회사에 철강,보험,정유,비행기생산,
화학등 여러 계열회사가 추가되었고 1920년대 말 에는 일본에서 2번째로
큰 재벌로 성장했다.
1930~40년대에는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군수품을 생산했는데 가장 유명한
생산품은 제로(Zero) 전투기이다.
군수품을 취급하면서 대규모로 성장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약 200개의 회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일본이 패하자 미쓰비시 재벌은 점령당국의 재벌해체 정책에 따라 해체
되었다.
미쓰비시합자회사가 해체된뒤 계열회사들의 주식은 일반에게 공매된다.
1952년 군정(軍政)이 끝날무렵, 분리된 미쓰비시계 회사들은 다시 결합
하기 시작했다.
새로 성립된 기업결합인 미쓰비시 그룹은 이전의 재벌과 많이 달랐다.
가족소유의 중앙의 지주회사가 없어진 대신에 여러회사 의 사장들이
비공식으로 정책을 조정하며 회사간에 재정적 의존관계가 어느 정도
존재하게 되었다.
미쓰비시 그룹은 수십 개의 회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룹의 주요회사
들은 모두 도쿄[東京]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 회사로 해외에 사무소와
자회사를 갖고 있다.
일부 회사는 외국회사와 합작투자에 참여하기도 한다. 미쓰비시은행은
일본 최대의 상업은행 중 하나이다.
처음 미쓰비시 재벌의 재정을 맡았고, 19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1948~53년 지요다은행(千代田銀行)이라 불린 적도 있다.
상업금융·무역금융·외환업무를 취급한다.
미쓰비시화성공업은 1934년 일본 타르 공업으로 설립되었으며 1950년에
현재의 회사명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타르 제품, 코크스, 비료, 염료 등을 생산해왔으며 1960년대 에는
석유화학제품도 생산하게 되었고 그뒤 제약 및 의료장비 등으로
제품을 다양화시켜 왔다.
미쓰비시상사는 일본 최대의 무역회사 중 하나로서 해운과 무역에
종사하는 회사에서 성장했다.
점령당국에 의해 소규모의 여러 회사로 분리되었다가 1950년대 중반에
다시 결합했으며 1971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로 다른 회사의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이 회사는 수많은 상품과 생산
품에대한 주문을 처리하고 선박운송 등의 업무를 맡는다.
또 기업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전세계에 원격 통신망을 갖추고 있다.
미쓰비시전기는 1921년에 설립되었으며 1963년에 현재의 회사명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주로 발전기·변압기·철도장비·승강기 등 중장비를 생산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장고·텔레비전 등의 소비재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반도체·컴퓨터 등의 다양한 전자기기를 제조하기 시작했으며
안전장치 냉각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최대의 중장비 생산업체중 하나이다.
1934년 현재의 회사명(會社名)으로 바뀌었으며 미쓰비시 재벌(財閥)의
주요계열회사의 하나가 되었다.
점령당국에 의해 3개 회사로 나뉘었다가 1964년에 다시 결합했다.
공작기계·항공기·농기계·철도차량 등을 생산하며, 조선사업·공장건설에도
관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