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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듣는 자(딤전 4:16)
청중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이다.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면서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말하는 사람의 기쁨은 헤아릴 수가 없다. 고개를 끄떡이며 노트 위에 열심히 받아 적는 사람들을 보면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저절로 높아진다.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렇지, 그렇지 연발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준비하지 않은 것까지 토해낸다. 마침내 거기에는 폭발할 것 같이 뜨거운 열기가 끓어오른다. 그런 자리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생각을 알기에 웃으면 함께 웃고 울면 함께 운다.
청중과의 교감에 보람 느껴
이 때문에 말하는 사람에게는 듣는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다. 물론 말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디모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디모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져야 할 책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특히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특히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할지라도 그 모든 말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공허한 씨부렁거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디모데가 자기 자신 뿐 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면서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디모데는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해야 한다. 디모데는 말로 끝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디모데의 말은 반드시 듣는 사람들을 구원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최종 관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
그러면 이런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친절한 조언을 주었다. “네 자신과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일들을 고수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 구원할 것이다”(필자 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듣는 자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행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돈 남 말하는 격이 되고 만다. 솔직히 말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설교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청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런 설교는 청중의 귓가에서 쟁쟁거리는 소리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그 가르침에 설득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설득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설교는 허망한 소리 안 되어야
반응하지 않는 청중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산만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조는 사람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무덤을 파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청중이 반응하지 않는 까닭이 설교자에게서 바른 삶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설교자는 지옥에 있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과히 나쁜 일이 아니다. 물론 노인이 되면 신체에 다양한 퇴화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피부는 늘어지고 뼈는 약해진다. 딱딱한 음식을 소화하기가 힘들고 배설물을 몸에서 내보는 것도 거북스럽다. 시력은 떨어지고 듣는 것도 시원치 않다. 노인이 되면 행동에도 엄청난 변화가 온다. 말이 어눌하게 되고 걸음이 느려진다. 손놀림이 부정확하고 무거운 물건을 나르기가 어렵다. 위급한 상황을 만나도 신속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위기에 대처하는 동작이 둔탁해진다.
노화는 곧 퇴화 의미해
게다가 노인이 되면 정신에 급격한 하강곡선이 그려진다. 판단력은 흐려지고 감정이 사라진다. 수를 계산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일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을 시도할 의욕이 감소되고 무슨 일에든지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다. 노인에게는 긴 인생의 오솔길을 걸어온 오랜 과거가 있다. 노인의 과거는, 그것이 구름을 타는 듯한 기쁨의 시간이었든지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의 세월이었든지, 인생에 아로새겨진 추억이다. 그것은 과거이기에 회상해 볼 만한 것이며 누구에게든지 들려주어도 괜찮은 이야기 거리이다. 그래서 모든 과거는 노인의 영광스러운 훈장이며 기쁜 것이건 슬픈 것이건 추억은 노인에게 밝은 색, 짙은 색으로 수놓은 상장(賞狀)과 다를 바 없다. 늙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닌 것은 땀과 눈물로 가슴에 기록한 두툼한 일기장이 남아있는 까닭이며, 세월의 비밀을 이마에 잔주름, 깊은 주름으로 보물지도처럼 그려둔 까닭이다.
그런데, 늙는다는 것은 과히 나쁜 일이 아닐뿐더러 역설적으로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청춘을 그리워하며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한탄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발끈 화를 낼지도 모른다. 노년기를 미화하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늙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냐고 말이다.
세월의 주름, 보물지도 같아
하지만 이것은 노인이 된다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아비가 되고 사람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늙은 남자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늙은 여자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이다. 늙음은 그 자체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넉넉한 품위이다. 그래서 모든 노인에게는 인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품에 기대고 싶은, 이야기 나누고 싶은, 곁에 있어도 보고 싶은 품위가 있다. 늙음은 깊은 무엇이며 넓은 무엇이다. 그것은 부모의 깊음과 넓음이다. 노인의 깊음은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헤아림과 같고, 노인의 넓음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넓은 베풂과 같다. 그래서 늙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노인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 청년이란 얇은 것이며 청춘이란 좁은 것이다. 어린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았어도 노인의 지식에 비하면 종잇장처럼 얇고, 젊은이가 아무리 많은 경험을 맛보았어도 노인의 경험에 비하면 바늘귀처럼 좁다. 이 때문에 소년이 노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생각을 펼치는 것은 그 자체가 웃음거리이다. 청년이 노인 앞에서 말해야 한다면 오직 부끄러움을 입을 열어야 한다. 따라서 청년이 노인을 책망하는 것은 스스로 버러지 같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이 스스로를 어리석은 자로 증명하는 것은 참으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인 앞에서 자랑은 금물
늙는다는 것이 과히 나쁜 일이 아니며 심지어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늙은 남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늙은 여자를 어머니처럼 존중할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부모를 모시고 있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형언할 수 없이 엄청난 행복을 얻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바꾸어 말해서 어떤 노인에게서든지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늙음의 오묘한 비밀에서 보화를 캐낸 사람이다. 이쯤 말하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급히 화제를 바꾸면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대책 없는 노후 대책과 그 해법
최근 자녀들의 불효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노후 대책에 비상이 걸렸다. 신문, 라디오 방송, TV 방송 등에서 자주 노후 대책에 대해서 사람들이 토론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내놓는 대책을 들으면 첫째, 이제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녀들을 향해서 기대를 많이 갖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 대책을 내 놓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노인들이 끝까지 일을 해야 자녀들한테 손을 벌리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셋째, 현찰이나 부동산을 자녀들에게 다 주지 말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얼마만큼 손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몽땅 다 주고 나면 자녀들은 마음이 변하여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고로 죽기 조금 전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노후 대책들을 가지고 우리가 만년(晩年)을 만족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정도의 노후 대책으로 만년을 평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턱없이 부족한 대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노후를 준비해야 할 것인가?
첫째, 지금까지 우리들의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던 불찰과 죄를 하나님께 철저히 자복하는 일이 훌륭한 노후 대책이다. 부모를 학대한 사람으로서 만년이 좋은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뼈를 깎는 심정으로 죄를 자복해야 한다.
둘째, 평상시에 우리 자녀들을 교육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하면 훗날 부모를 귀하게 알고 공경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자녀 교육을 잘해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주님의 훈계로 교육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그 부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다.
셋째, 자신의 노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시 71:9). 다윗은 자기가 기도한대로 최후를 복(福)되게 마쳤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저(다윗)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했다(대상 29:28).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는 줄 믿고 기도에 힘을 써야할 것이다(막 9:29).
넷째, 최고의 노후 대책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은 참으로 이상한 말같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야말로 최고의 멋있는 노후 대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기면 우리 자신들이 귀한 존재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랍고도 확실한 노후 대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노후를 은혜롭게 살고 기쁘게 살면서 염려가 없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지금도 부탁하고 있다(요 14:1; 빌 4:4).
첫댓글 늙음은 깊은 무엇이며 넖은 무엇이다~
세월의 주름, 보물지도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