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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해야 정상인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옵션"인 그저 그런 은사인가? 아니면 골수 은사주의에서 말하듯이 이것 없으면 "성령 세례" 받은 증거가 아닌고로 반드시 해야 되는가? 그런 의문들은 지금 은사주의뿐만이 아니라 범교계적으로 방언하는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든 조금씩 있는 상황에서 자연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대부분 방언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를 인용하면서도 그들의 행위와 성경이 무척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미 방언에 맛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체험해 본 후에 비평하라고 충고하는 말도 있지만 기독교는 체험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았고 성경 66권 위에 세워진 것으로 성경이 허용하는 것은 해도 되지만 성경을 빙자하는 다른 영이 성경을 왜곡해서 시키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은 영적으로 백해무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부터 전부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뿌리부터 점검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기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고로 주요 쟁점이 포진해 있는 고린도전서 12-14장의 관련 구절들만 살펴보고, 과연 현대 은사주의 (오순절파) 방언이 성경대로 하는 것인가, 그것만 살펴보겠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방언을 했는데 성경대로 안했다면 왜 나는 성경대로 방언을 할수가 없는가 이유를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하는 방법은 하나인데 성경에 없는 방언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헛된 소리를 내지 않고도 성경대로 믿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은사들을 언급할 때 방언은 맨 마지막 은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적들을 행함은 사도의 이적을 말하고 예언은 초대교회 때의 예언을 말합니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은 지금도 있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방언은 또다시 초대교회 은사입니다. 통역이야 당연히 초대교회 은사입니다. 이렇게 고린도전서의 은사 항목에는 현재 유효하지 않은 것들과 현재도 유효한 것들이 함께 포진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물어볼 것입니다. 어떤 것은 지금 유효하고 어떤 은사는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2천년이라는 신약교회사를 통해 이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는데 교회사는 오늘날 카톨릭 교회사 위주로 되어 있어서 문제가 많습니다. 카톨릭은 사도들(특히 베드로)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사도의 표적(신유니 예언이니)까지도 교황과 성직계급이 계승했다고 믿는 체계입니다. 카톨릭 교회사를 배우게 되면 사도시대와 지금 교회시대가 다른 것을 제대로 모르고 다 똑같은 줄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도들의 은사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사실 사도들이 순교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사역 중에 은사가 정지되었습니다. 더이상 신유를 행하지 못하는 구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이 은사는 사도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들과 함께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사도들의 은사가 떠났다면 방언도 그것과 함께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반박이 나오지만 일단 계속 살펴봅니다.
28절은 보다 분명히 방언이라는 은사의 시대적 위치를 보여주는데, 사도들, 선지자들, 기적들, 병 고치는 은사들, 방언들, 여기서 언급된 것들은 초대교회 즉 사도행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이 있습니까? 사도를 흉내내는 카톨릭의 교황이나 신사도 말입니까? 그들은 사기꾼이자 거짓 사도이지 진짜 사도의 계승자가 아닙니다. 사도 계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권 계승이라는 말 자체가 카톨릭이 지어낸 신화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사도권을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성경 구절도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도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사도들이지 지금 가짜 사도들은 해당이 없습니다. 선지자들 역시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런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존재했고 지금은 선지자가 따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경을 공부하면 자기 미래(내가 천국갈지 지옥갈지)를 깨닫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깨닫는 그런 "예언의 은사"는 있어도 미래를 점치는 것은 해당이 없습니다. 몰몬교 조셉 스미스나 문선명 같은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이하 기적들과 병 고치는 은사들, 방언이 이하동문입니다.
교사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마찬가지로 지금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지금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없지만 사도 시대에 제정된 교회의 치리 제도나 직분 같은 것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문제를 혼동하지 않으려면 먼저 교회사를 공부해 보고(반카톨릭 교회사) 2천년 교회사 동안에 어떤 사람들이 대체 방언을 하려고 노력했는가 조금만 알아보면 알 일입니다. 20세기의 차지도 덥지도 아니해서 억지로라도 덥히려고 이상한 소리 내는 라오디케아 시대 사람들 말고 그 전에 방언을 위해 힘쓴 그리스도인들, 그런 크리스챤 그룹들이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물론 소수 있는 것은 사실인데, 퀘이커 교도나 어떤 신비주의자들 소수는 방언 비슷한걸 했던 것 같지만 이단 종파들에서 주로 행해졌습니다.
이 말씀은 "병 고치는 은사"라는 특별한 사도적 은사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지금은 은사주의 교회들 안에서 완전히 남발되고 있는데 그들은 사도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이 병고침 은사가 보편적으로 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사실입니까? 그들은 사도적 치유를 전혀 행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도들처럼 무제한적 무조건적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바로 사도라는 얘기가 됩니다. 바로 신사도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행하지도 않고 무조건적 치유를 하지도 못하고 그저 흉내나 낼 뿐입니다. 죽은 사람을 한번 살려 보라고 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도망갈 자들이란 것입니다. 베드로도 했고 바울도 했는데 신유 은사를 가졌다는 현대 가짜 사도들은 왜 죽은 자는 못 살리고 시시하게 류마티스 관절염, 위장병 따위나 고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실제로 고친 게 아니라 위약효과(플라시보)이거나 집단 최면이 대부분이라 후에 들통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에 뒤이어, 방언들이 언급됩니다. "방언들"입니다. 오순절파 개념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 평범한 "방언들"(언어들; 외국어들)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독해할 것입니다. 이것은 랄랄랄라 라는 소리이거나 쉬쉬쉬 하는(뱀소리) 그런 소리를 말한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언급한 방언들이 그런 소리의 종류들을 말하겠습니까? 랄랄라 방언이 있고 쉬쉬쉬가 있고 그런 뜻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험에 입각해서 성경을 고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석하고도 남습니다. "방언"이라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짐승이 내는 소리나 사물이 내는 소리가 아닌, 또 어린아이가 내는 옹알이가 아니라 지각있는 말을 "방언"(tongue)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주의자들은 빠져나갈 비상구를 만들어 두었는데 이후에 등장할 "알지 못하는 방언"을 소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보겠습니다.
방언이 그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언들과 지식이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때 이것은 현 시대에 끝난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언"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는 개신교인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 방언이 그쳤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A.D.90년대에 완성되었으나 방언이 그친 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린도교회 이후로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터진 후에 오래 가지 않고 당시에 그쳤던 것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꼭 A.D.9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그친 게 아닌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미 순교하고, 순교하기 전에 이미 사도적 은사들이 떠나가고, 그렇게 될 무렵에 이미 방언도 정지된 것으로 보는게 순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완성과 방언의 그침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8절에서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때 그치게 된다, 예언과 함께 쌍을 이루자면 그런 해석이 바른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에 방언은 역시 계속되는 것이었어, 쉽게 단정하면 안됩니다. "그치는 것"은 영구적으로 그칠 때가 오게 되지만 그치기 전이라도 "휴지기"(잠시 멎음: 잠시는 아니지만 1900년 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시대 초에 방언이 있었는데 사도행전 시대가 지나고 나니까 멈추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사를 통해서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왜 그쳤는지 그 이유는 천천히 알아보더라도 그쳤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니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쳤고, 더 이상 거기 관심을 두는 그리스도인도 없었고, 그러다가 19세기-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서 우리가 방언을 리바이벌(부흥)시켰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그것이 미국의 오순절 운동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건 객관적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때 잠시 등장했다가 그후에 사도들이 없어지니까 없어졌고, 비교적 최근인 20세기에 재등장했는데 그 재등장했다는 방언이 성경의 그것이 아니고 유사하게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문제의 핵심 구절이 나왔습니다. 이 구절로 인해서 "알지 못하는 방언"="랄랄랄라 같은 소리"라는 괴상한 공식이 성립되었습니다. 은사주의 왕국에서 이 공식은 방언에 있어 알파와 오메가로 통하기 때문에 "반박불가"에 가깝게 절대 교리입니다.
성경은 악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몇 단어나 어순을 바꾸거나 거짓으로 의미를 주장하면 무슨 교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꾸는 순간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에 정죄받는 것입니다.
이 방언이라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상황으로 말하자면 고린도교회에서 상당히 잘못 쓰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잘못 사용되는 것을 바로잡는 중입니다. 위 2절이 초대교회 당시 방언은사의 정석적 표준적 사용 용례가 아니라 좀 잘못 쓰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보겠지만 방언은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알지 못하는 방언"을 다른 성도에게 하고 있습니다. 즉 알지 못한다는 말은 말하는 그 자신이 모르고, 듣는 성도도 모르는 "방언"(언어)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에서 지어낸 말, 대인 방언, 대신 방언, 말도 그렇게 잘 지어내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용어 역시 성경에 없고, 위 구절을 편집해서 만든 말입니다. 이 고린도 성도가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말을 회중 앞이나 어떤 성도 앞에서 막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입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나도 모르고 듣는 이도 몰라, 그럼 누가 아는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방언(언어)이 아니라 소리(은사주의 가짜 방언)를 막 내지른다면, 랄랄랄라 어버버버 소리를 낸다면 이건 "나도 모르고", "듣는 이도 모르며", 심지어 "하나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아십니까? 소리는 어떤 언어학자도 풀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소리는 해석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 사람은 소리를 냈던 게 아니라 그 사람 나름 진짜 방언(외국어)을 했던 것인데 유감되게도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생소한 말(가령 중국말이라 칩시다)을 거기서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단 하나님은 아시겠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 사람은 생소한 외국어로 어떤 계시나 예언을 전파하고 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영으로 신비들을 말하는" 게 됩니다. 신비라는 것은 비밀과 다릅니다. 개역은 이것도 비밀이라고 해서 의미를 왜곡시켰는데, 비밀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신비는 해석자가 나타나기까지 모르는 것입니다. 비밀은 Nobody knows, 신비는 Somebody knows, 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중국말로 쏼라 쏼라 방언을 한다면 somebody, 중국말 하는 통역관이 와서 들어 보면 해석해 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통역사가 없는 이상에 그가 하는 말은 "신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뜻입니다.
정리하고 넘어가면 이 고린도 교회 성도는 방언을 약간 잘못 이해하고 통역을 배제하고 생소한 외국어를 함부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문제없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분명 어떤 타언어를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의도하고 은사주의식 "방언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외국어를 말하니까 자동 하나님만 들으시는 말을 한 셈이 된 것입니다.
나는 너희 모두가 방언들로 말하기를 바라지만 차라리 예언하기를 바라노라. 이는 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을 하여 교회가 세움을 입지 못한다면 예언하는 자가 더 낫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만일 내가 너희에게 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로나 지식으로나 예언으로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한다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고전 14:4-6)
알지 못하는 방언은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방언의 내용(컨텐츠)은 예언이나 교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별개의 은사가 아니라 방언과 때로 같이 작용한 초대교회 은사입니다.
5절, "너희 모두가 방언들로 말하기를 바라지만", 아주 긍정적 표현으로 보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을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좋아하기 이른 게, 차라리 예언하기를 바란다고 바로 사도 바울은 거품을 빼 버립니다. 이 예언도 물론 현대 가짜 예언과 상관없습니다. 사도시대의 진짜 예언들입니다. 방언은 통역이 필수적인데 방언은 외국어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로 예언하면 교회에 유익이 없지만 예언의 은사 자체는 초대 교회에서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통역도 할 수 없는 외국어를 가지고 예언을 한다고 해서 누가 유익을 보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해도 못 알아들으면 말짱 헛수고 아닌가 말입니다.
6절은 사도 바울이 역시 "방언의 은사"(타언어)가 있었다고 알려주는데, 그는 방언뿐 아니라 지식과 예언과 교리의 은사들도 갖고 있었습니다. 방언은 가장 낮은 은사였고 바울은 다른 것들 뒤에 그것을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아니더라도 실제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이미 내가 외국어들을 구사할 능력이 되는데 은사에 의존해서 꼭 그걸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외국어를 잘 한다고 자랑할 이유도 없고, 정 필요하면 방언 은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외국어를 많이 아는 입장에서 방언 은사는 그렇게 대단한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방언이 아주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하기사 지금도 외국어를 여럿 구사할 수 있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고 직장에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그때는 더 안 그랬겠습니까? 오순절파식 랄랄라 같은 의미없는 소리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돌았다는 말만 듣지 어디서 인정받을 게 없는데, 외국어는 그래도 가치가 실제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초대교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받은 은사인 것이지 계속 주어진 게 아니기에 그 성도들이 잠시 있는 것에 마음을 뺏겨서 치중할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리라.
만일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는 것이지만 나의 지각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으로 기도하겠고 지각으로도 기도하겠으며 내가 영으로 찬양하겠고 지각으로도 찬양하리라(고전 14:13-15).
이번에는 또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랄랄랄라 하는 소리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외국어는 그 외국어를 습득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당신이 한국말밖에 못 알아듣는 교인들 앞에서 영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한다고 하면 당신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알지 못하는 방언"은 통역이 필수적입니다.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14절),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 역시 방언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게 방언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보인다면 안경을 맞추길 권하는 바입니다. "만일" "기도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방언"은 생소한 외국말입니다. 생소한 외국어로 당신은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방언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초대 교회의 방언은사를 가진 어떤 성도가 자기가 모르는 생소한 외국어인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면"이라는 것입니다. 하라는 권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열매가 없고 헛수고입니다. 하나님은 알아들으시겠지만 나는 정작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내가 모르는 외국어로 기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외국어로 한 말을 알아들으시니까 그나마 "내 영은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유감되게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소리"(랄랄라)로 기도한다고 하면 "내 영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리만 낼 뿐입니다. 소리는 나도 못 알아듣고 하나님도 못 알아들으십니다. 그것은 라디오주파수를 잘못 맞출 때 나는 잡음 같이 소리일 뿐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4:18,19).
앞서 말한 대로 사도 바울은 외국어를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방언 은사까지 갖췄으니 플러스 알파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외국에 선교 여행을 가도, 스페인엘 가도 영국에 가도 다 말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외국어도 많이 알 뿐 아니라 방언 은사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단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방언 은사를 펼쳐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전투용 장검을 가지고 두부써는 칼로 쓰면 그 장검이 초라하고 불쌍해지는 것처럼, 바울의 방언 은사는 "대외용"이었지 교회에다 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외국어"보다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성도들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시형 은사 같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시간을 아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대로 전파하기를 원합니다. 오순절파 사람처럼 "내가 성경에 나오는 방언도 할 줄 알아" 기뻐하고 자랑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전 14:21,22).
중요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방언 은사의 뿌리가 구약 예언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줍니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표적과 관련된 것이 방언입니다. 시간상 여기서 자세한 해석은 하지 않고 지나가지만 이 구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스라엘)에게 외국어를 하는 자들을 통해 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표적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오순절날 사도들 열 두 명(120명이 다 방언한 게 아닙니다)이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임을 드러냈습니다. 방언이라는 게 단순히 외국어를 기적적으로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외국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말, 예언과 경고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세계에 흩어졌으니 그 외국어로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이방인들이 일반적으로 "불신자"라고 말하는 그 의미하고 다르게 특별히 그들은 메시야를 거절하고 거역한 "믿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는데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표적을 성취한 것이 오순절이었습니다. 물론 오순절 이후에도 방언은 간혹 되풀이되었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잘못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뜻도 모르면서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겠습니까? 간혹 들어왔을지 모르지만 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교회 밖에 있습니다. 방언하려면 그들한테 가서 하면 모범답안입니다. 물론 그 유대인들이 먼 타국에서 온 유대인들이어서 외국어로 복음을 전해야 하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외용으로 써야 할 은사를 교회 안에서 뜻도 없이 남발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습니까?
자, 여기서 또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집단 방언을 해도 된다는 허용이 아닙니다. 물론 은사주의식 소리도 아니지만, 생소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짓을 하면 된다? 안된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한다면. 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믿지 않는 헬라인들이 와서 고린도 교회 안을 보니 저마다 어떤 사람은 중국말로 쏼라 쏼라 하고 어떤 사람은 아리가또, 어떤 사람은 구텐탁 하고 있으면 미쳤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대체 왜 하느냐, 할 필요없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건 쓸데없는 짓 하는 것이고, 덤으로 "미쳤다고" 할 텐데 그런 건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집회의 집단 방언은 "외국어 아닌 소리"일 뿐더러 사도 바울 역시 이런 것을 본다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삼가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초대교회의 과도기적 교리입니다. "방언도 있고", 방언이 시(찬송시)와 교리(성경 강해)와 같이 있습니다. 방언이 금지되지는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한테 전파해야 방언이지만 교회 안의 믿지 않는 자에게도 확대 적용할 수도 있고, 필요해서 나올 경우가 있으니 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통역은 방언을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지 옵션이 아닙니다. 통역은 항상 필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고전 14:27,28).
알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아까 경고했었고 이제 통역을 명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해야 합니다. "동시 통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말해야지 한꺼번에 말하면 통역할 수가 없고 질서도 무너집니다. 이것은 방언이 외국어이기 때문입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마침 없는데 그럼 조용히 하라,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라. 상당히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통역이 특별히 은사로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통역은 말을 통역하는 것이지 소리를 통역하는 게 아닙니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통역의 은사가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일만 마디를 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 말짱 헛수고니까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 여자들을 조용히 하게 하라는 것은 자매들이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앞뒤 문맥상 "방언들로 말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의 은사는 "여인들에게" 금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교회 밖에서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방언하는 여인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봐도 그렇고 고린도전서에서도 여인들은 금하고 있습니다. 오순절교파 교회들은 "방언하는 여인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방언하는 남자들보다는 여인들이 수가 훨씬 많습니다. 오순절파 내에서 여인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고린도전서 14:34대로 명령하면 그 여인들은 다 그 교회를 떠나 버릴 것입니다. 즉 그들은 이 명령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9,40).
사도 바울은 여전히 초대교회의 상황을 감안해서 방언을 금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거두어가실 망정, 인간적 판단으로 먼저 금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필요성이 더 없다고 보시면 정지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교회 내에서는 "품위 있고 질서 있는" 모습은 좀체 찾아보기 힘든데 무질서를 조장할 뿐인 "뜻없는 소리"를 반복하는 것은 성경의 묻혀진 은사를 뒤져서 찾아냈다는 오해의 들뜬 마음일 뿐이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뜻있는 말만 하고 뜻없는 소리는 지향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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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런데 말씀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입혀 다르게 해석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