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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막8:1-26절) 계속적인 기적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해낼 때, 처음부터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일을 해낸 사람과 다른 사람의 힘으로 일을 해낸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의 힘으로 일을 해낸 사람은 그럴만한 힘과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즉 얼마든지 내 힘으로 그 일을 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의 힘은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해결한 사람은 그런 일이 또 닥치면, 굉장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지난번 일을 해결한 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이 사람이 힘과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 힘이 자기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해결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우리의 실력을 훨씬 뛰어 넘는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축복 중에서도 미래를 불안해 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잘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실력은 나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더 나의 힘과 실력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빌려 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해지게 됩니다. 만의하나라도 앞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실망해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 중에서도 어느 정도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지금 하나님이 복을 부어 주고 계신 것은 내가 잘나거나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으려 애써도 우리 신앙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언제 비참해질지 모르는 신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한번만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몇 번씩이나 기적을 행하시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Ⅰ.굶주린 무리들을 먹이심
예수님이 들판에서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기 위해 몰려들곤 했습니다. 어느 때는 사람들이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배가 너무너무 고프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굶어 가면서도 며칠씩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며칠씩이나 굶어가면서 예수님의 생명의말씀을 듣고 있었을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의말씀의 맛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에서 살다가 쫄딱 망해서 지금 먹을 것이 없는 지경까지 오기는 했지만, 드디어 여기에서 하나님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술이나 퍼마시든지,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벌써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인생막장*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주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돌고 돌다가 결국 살 길이 없을 때, 오게 되는 곳이 탄광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공동체)는 탄광보다 더욱 인생 막장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돌고 돌다가 그래도 살 길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탄광과 교회(공동체)는 차이가 있습니다. 탄광에서는 검은 석탄가루를 많이 마시고, 땅속에서 석탄을 캐내서 돈을 받지만, 교회(공동체)에서는 배는 고프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을까? 돈이 없어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만드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또렷한 정신에 많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속사람은 채워졌는데, 배가 고파서 힘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8:1-3절)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라는 말을 보면,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구경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조금씩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돈이 없거나. 며칠씩 있을 줄 모르고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으면서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말씀의 맛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꾸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조금씩 말씀에 빨려 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음식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 남아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본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에 붙잡히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장 굶어서 배가 고프고. 심지어 집에 가는 도중에 분명히 쓰러져 죽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놓치기 싫어서 굶어 가면서도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기 시작하는 이것입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을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돈 맛을 알고, 권력의 맛을 알고, 인기의 맛은 알지만, 정작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살다 보면 *미맹(味盲)*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미맹은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맛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재미가 없는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은 그 음식의 맛이 너무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평생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해 미맹(味盲)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주일이나 수요일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눈을 반짝이는지, 입맛을 다시면서 설교를 듣는지, 왜 그렇게 행복하게 까르르 웃는지, 어느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늘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느끼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하고, 엄청 맛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말씀을 편식하거나 빼놓지 않고, 모두 다 듣고 즐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정상적으로 신앙생활 하다가 말씀의 맛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해서 세상의 돈맛, 술맛, 친구들 맛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씀의 맛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달고, 은혜스럽습니다. 문제는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수중에 돈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면,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자꾸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먹습니다. 이것이 곧 제 2의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4:4절)...사람이 떡(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면, 절대로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서 당장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최소한도의 양식만 주십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인생은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는 것입니다. 2절을 보게 되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에게 끌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 는 것은 단순한 관심 이상의 의미입니다. 즉 *불쌍히 여긴다.*는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에 대해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 관심만으로 끝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단순한 관심의 범위를 벗어나서 마음이 그들을 향해 쏠리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끌리시고, 굶어가면서 어려움을 당해가면서 세상일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가장 사랑하시는 것입니다.(사랑의 반대는 무관심)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장 많이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최고로 사랑하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체험이나, 봉사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장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높여 주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다윗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덜 타락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의 맛보다, 쾌락의 맛보다, 생명의 말씀의 맛을 더욱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지혜의 왕 솔로몬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보다는 *권력의 맛. 인기의 맛, 이방 여인이 주는 사랑의 맛을 더욱 좋아했기 때문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제사장들이 아주 타락한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삼상2:30절)...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약속 하셨습니다.(경멸이란? 깔보고 우습게 여기신다는 말)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맛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의 맛을 보면, 그런 맛들은 전부 시시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굶어 가면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8:2절)...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없으며, 그중에 어떤 사람은 굶주리고 있고, 어떤 사람은 가다가 쓰러질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광야에서 이 사람들에게 줄 떡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또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8:4-5절)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제자들은 벌써 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많은데, 먹을 것이 없으면, 분위기가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어도 별 수 없네...*하고 화내면서 갈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들이 굶주린 채, 흩어진다는 것은 아마 앞으로도 예수님을 불신할 가능성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전에도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과 그 전의 일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걱정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능력이지, 제자들의 능력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기적을 행하셨을 때, 제자들이 한 것이라고는 떼어주는 떡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사정이 또다시 일어나니까 제자들은 *어디서 떡을 구해야 하나?하면서 걱정부터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5절)...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즉 *우리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일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또 사람들을 땅에 무리지어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떡 일곱 개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들 드릴 수 있을까?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떡 이전에 *지금 코로나 재앙 때, 죽지 않고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 죽어 있거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떡 일곱 개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떡을 가지고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는 얼마나 더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작은 떡 일 곱 개라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만 먹이신 것이 아니라,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몇 번씩이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힘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너무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세처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이번에는 떡 일곱 개를 먼저 기도하고 먹이신 것입니다. 즉 떡과 물고기를 같이 축사하신 것이 아니라, 떡만 먹이고, 그 다음 생선 두어 마리가 있으니까 또 기도하고 나누어 주시니까 기적이 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자꾸만 행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떡을 먹은 사람과 남은 부스러기를 조사하니까 *사천 명이 먹고 부스러기로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너무 수학적으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즉 지난번에는 예수님이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기 때문에 떡 일곱 개로는 칠천 명을 먹여야 하고, 부스러기도 더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억지로 공식에 넣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이미 기적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는 것이고, 굉장히 좋지 못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공식에 집어넣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똑같은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무궁무진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비슷한 기적을 한번 뿐만이 아니라, 몇 번씩이라도 해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Ⅱ.바리새인의 누룩
예수님은 기적을 행한 후에는 언제나 그곳을 빨리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에만 도취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들에게 한 끼의 식사를 주셨지, 직장까지 구해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굶주린 사람들이 한 끼의 식사를 얻어먹은 것도 대단하지만, 아무리 기적의 떡이라 해도 한 끼의 식사만으로는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아니냐? 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기적의 떡을 먹었으면, 그 다음에는 직장 문제까지 해결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굶주릴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덤으로 먹을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약속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가능성을 체험하게 하신 표적입니다.
그래서 단 한 끼의 떡이지만 *아,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을 때 이런 식으로 살게 되겠구나라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계속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선한 일을 하신 후에 바리새인들의 엄청난 공격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8:10-11절)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여기의 달마누다가 어떤 곳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인 막달라에 가까운 곳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공격했습니다. 즉 *당신이 엄청난 기적을 행해 들판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사천 명씩이나 먹였는데 그것으로는 우리가 당신을 믿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로 믿으려면. 더 큰 기적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서 모세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이시구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또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은 너무나도 적은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이백만명이 먹을 수 있는 만나를 40년 동안 내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요구하기를 *모세와 같은 기적을 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엘리야 같은 기적을 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겨우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것으로 당신을 모세나 엘리야 같은 대접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자세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자세한 답변이 이방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깊이 탄식하면서 표적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8:12절)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기적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믿으면, 그 능력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기적(奇蹟)*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表迹)*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남의 생명의 말씀을 믿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의 믿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양적으로 비교하려고 했고, 말씀과 별도로 기적만을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체 기적을 보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나 기도 응답을 자꾸만 양적인 것으로 비교하려고 하거나. *생명의 말씀과 상관없이 기적만 추구하는 신앙을 가져서는 실패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아주 중요한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 그 표적으로 기도응답이 나타나고, 때로는 기적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하니까 또 배를 타고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는데, 서두르는 바람에 떡을 챙기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8:13-14절)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여러 사람이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먹을 것을 챙겨야 합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험악한 얼굴로 따지니까 너무 다급한 나머지 먹을 것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서둘러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호수 위를 가다가 보니까 떡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떡이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도 제자들은 배가 고픈 때였던 것 같고. 금방 눈치로 떡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먹는 것에 마음이 지배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어떤 멍청한 놈이 떡을 챙기지 못했을까? 그리고 *우리가 호수를 건너고 다른 떡을 구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이 고픈 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며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먹는 걱정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은 이것을 금방 먹는 문제로 적용해 버렸습니다.
8:15-16절)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지금 제자들은 오르지 먹는 것만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떡의 재료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누룩*은 떡을 만드는 재료의 일종입니다.
물론 떡을 만드는 데는 밀가루나 보리가루가 중요하지만, 이것을 맛있게 부풀려 먹으려면, 반드시 누룩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심하게 공격당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에게 떡을 사거나 빌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한 불찰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누룩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룩을 말씀하신 것은 그 가르침의 정신 또는 핵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재료는 성경이나 율법을 가지고 가르침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리를 하는데 너무 이상한 누룩을 써서 맛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이나 헤롯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 하기는 하는데, 그 중심 사상이 겉으로 나타난 형식이고, 성과였습니다.
더욱이 헤롯당은 현실적 이해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누룩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고, 이 누룩이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누룩은 기적의 누룩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그 자체를 붙들고 믿으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떡이 없는 것으로 걱정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둔하냐?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책망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리떡 다섯 개로 몇 명이 먹었느냐?고 물어보셨고.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어려움이 생기면, 늘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능력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예수님의 누룩만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즉 *죽자 살자 하나님 생명의 말씀만 붙잡으면, 오천 명 또는 사천 명 얼마든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핵심만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Ⅲ.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예수님은 엄청난 기적과 논쟁 중에서도 꼭 개인적으로 병든 사람이나 장애를 입은 사람을 만나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 만나신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안수하고 치료했는데도 이 사람이 한 번에 낫지 않고, 두 번째 안수하셨을 때 다 낫게 된 것입니다.
8:22-23절)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심한 장애인들을 보기만 하면,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기적이 너무나도 놀랍고, 재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경거리로 병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맹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고쳐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쓰지 않고, 개인적으로 만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일대일 인격적으로 이 사람만을 상대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이 단 두 사람만 있게 되자, 예수님이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직접 침을 뱉으시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사람의 눈에다가 침을 뱉었을까? 아마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사람의 눈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맹인을 결코 경멸하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십니다.
단지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지금까지 받은 고통과 비참함에 대해 비통한 느낌을 침으로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즉 *지금까지 너는 고통을 받았고 비참하게 살아왔는데. 나도 그것을 공감한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눈의 기능이 죽어서 너무나 건조한 그 사람의 눈에 물기를 공급하신 의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눈물샘도 말라 눈에 물기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침으로 일단 눈을 촉촉하게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안수하시고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8:23절)...무엇이 보이느냐?
이때 그 사람은
8:24절)...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기는 보는데, 명확하게 보지를 못했습니다. 즉 *희미하게 윤곽만 보았지, 자세하고 구체적인 것은 아직 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안수하셨는데도 *불완전하게 치료될 수 있었을까?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침까지 뱉으셨는데도 불완전하게 치료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 사람이 덜 명확하게 보게 된 것은 아니고,우리의 영적 상태가 이런 상태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보여야 하는데 나무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이 곧 이런 현상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을 불명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무를 보는 데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더욱더 말씀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단번에 치료되고, 낫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매달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나무만 보일 정도만 치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의 치료가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후에 악화되지 않은 것만 해도 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한 번 더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한 번 더 기도해서 낫지 않으면, 또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치료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병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자꾸만 하나님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우리가 더욱 겸손하게 되고, 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된다면. 이것이 더 큰 복입니다.
즉 *우리는 병을 하나님께 매달리는 통로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의 누룩이나 헤롯의 누룩처럼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나 성과보다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 나타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아-멘
*그리하지 아니할 지라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절)*
찬송가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교육 심리학적 방법(교재)
※주입식이 아닌. 유대인 교육방법으로 사고(思考)를 끌어내어 고백함으로 소속을 자립케하는 권면적 상담식. 소통이 아니면 불가능(연구원 설립때까지 1:1 양육 카톡화상).
▣셀(leader)☞ 제 1단계 *필수과목* 자격증을 취득해야 공동체가 안전하고, 직분도 반드시 *필수과목*을 필하고 *세례를 받아야*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전 천주교인 포함).
딤후3:13-14절)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충성된 일꾼☞ 제 2단계 *선택과목* 전도학교, 청지기대학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고. 주님 천국 심판때. 칭찬받고. 상급받는 그룹교육(교재).
딤후2:2절)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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