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 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이 좋은 세상>
오늘 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시는데, 약간 오해할 소지가 있기에 잘 새겨서 들어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의 세상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성장시키신 세상, 결국 언젠가 완성시키고 구원하시려는 아름다운 세상, 다시 말해서 긍정적인 의미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갖은 죄악과 인간들이 지닌 파괴적인 본능으로 인해 세상은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지닌 의미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대립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 인간 역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곳이 세상입니다. 갖은 폭력과 속임수, 극도의 이기심과 끝없는 타락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언제나 우리가 도피하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오물 투성이의 장소만은 절대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의 힘, 악의 힘, 세상의 폭력성이 절대로 만만치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 역시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마디로 가능성으로충만한 황금어장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등지고 떠나가야 할 혐오장소가 아니라 더 깊이 투신해야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목장소입니다.
세상의 폭력성과 사악함 그 한 가운데를 우리가 걸어가면서도 우리가 위안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폭력성과 사악함 그 위에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악 한가운데 사시면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또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악으로 물들어 가는 이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노력했던 여정이 그분의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을 떠나서 긍정적인 의미의 세상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로 기우는 모든 악과 결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천상적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어느 마을에서 제일 재산이 많은 부자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재산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무척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역시 지혜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에게 ‘지혜’를 배워오라고 보냈습니다. 아들은 훌륭한 스승님을 통해서 점점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기 전, 안타깝게도 부자인 아버지가 주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슬퍼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집사가 아버지의 유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유서의 내용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왜냐하면 그 내용은 이러했거든요.
“나의 모든 재산을 내 종에게 빠짐없이 물려주어라.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내가 남긴 유산 가운데 단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부자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경악했지요. 단 한 사람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부자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을 바라보면서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종의 위치에서 갑자기 그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고 돌아온 아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유언장을 따르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선택한 단 하나의 유산 때문인데요. 그 단 하나의 선택으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선택했으니, 아버지의 재산 역시도 모두 아들의 것이 된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 신앙에 맞춰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받은 지혜를 활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기에, 나에게 주어질 유산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특별히 뽑았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간직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올바른 판단과 함께 하느님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에드워드 아트킨슨)
순례의 인생
-손우배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사셨던 바로 그 세상을 찾아온 순례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처럼 숨을 쉬고, 그분처럼 걷고, 그분처럼 보고, 그분처럼
느끼며, 그분처럼 식사하고, 그분처럼 생활하며 바로 그분이 걸으셨던
인간의 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분이 사셨던 인생을 살아가며
“아,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시어 이렇게 사셨구나!” 하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인생의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겪으셨던 희로애락을 느끼며,
때론 내가 고통과 슬픔 중에 있을 때, 그분도 전에 나보다 앞서 바로 이곳에서
똑같이 경험하고 서 계셨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모욕과 멸시를 받고 있다면, 나는 그분이 계셨던 바로 그 세상을 순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성지에 와 있는 것입니다. 모욕과 멸시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셨던 세상이기에
나 역시 사랑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인생의 상황에 계셨든 그 상황을 찾아가
“아, 예수님이 여기 계셨구나!”를 생각하며 그분의 성지를 순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순례하는 순례자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기쁨
-김태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세상 안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위치에 있는지를 간략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저술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 속에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해를 받고 박해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황제에 대한 경배를 거절했다는 것 때문에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불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종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아가페와 평화 인사를 유흥을 즐기는 모임이라고 비난했고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끄집어 그리스도인들은 가족 관계를 파괴하는 자들이라며 증오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증오와 박해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상황을 올바로 보도록 일깨우면서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도록 격려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과 하느님을 모르지만 제자들은 뽑힌 이들로서 예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분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친구들이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제가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신앙이 없는 친척 한 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아끼셨지만 제 신앙생활과 수도원에 가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비판이 섞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비판 때문에 오히려 기뻤습니다. 내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것, 내가 그분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게 했습니다. 2000년 역사 동안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지금까지 존속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기쁨이고 그분만이 우리의 상급입니다.
미움을 넘어서
-전삼용신부-
며칠 전에 미사포를 써야하는 이유에 대해 글을 썼더니 반대하는 글도 실리고 또 그 말이 옳기는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해서 그런 글은 자제를 하면 어떻겠냐는 따듯한 충고도 받았습니다. 저에 대한 감정만 나쁘게 만든다는 이유입니다.
그런 충고는 고맙지만 저는 제가 확신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강론 때 부부간에도 아기를 출산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부부관계를 아이를 출산하려는 의도로만 해야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도 이것을 잘 압니다. 많은 분들이 반발할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제가 배운 진리이니 저는 이 말을 하는데 주저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적으로 부부관계의 목적은 부부간의 사랑의 ‘일치’와 ‘자녀출산’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첫 죄를 지으면서 육체 안엔 성욕이 들어왔습니다. 그 전엔 온전한 사랑이었지만 이젠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따라서 방금 세례 받아 아무런 죄가 없는 부부가 부부관계를 해도 그 안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죄가 조금이라도 들어가기 때문에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죄를 물려받아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 부부 관계 안에 어쩔 수 없이 죄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는 자녀에게 끊임없이 물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를 다윗은 시편에서 ‘어머니가 뱃속에 나를 죄 중에 배었나이다.’라고 읊은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되고 또 자신을 죄 짓게 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줄어듭니다. 마치 죄를 짓고 성욕을 느껴 자신들의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가 서로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루며 갈라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관계는 죄가 서로에게 들어오게 함으로써 부부의 금슬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욕은 이타적인 사랑을 이기적은 사랑으로 변질시키고 둘의 사랑을 감소시킵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만약 제가 결혼했으면 이 말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말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고 이런 말을 함으로써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을 알지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받아들이기 싫지요? 다행히 교회에서는 부부관계를 죄로 규정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갔을 때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하려고 무진장 노력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안 좋아지면 내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늘 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는데 그 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던 제가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하라고 하자, ‘고통과 멸시’를 청하였습니다. 고통과 멸시가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것이고 그것으로 예수님과 조금 더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주어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잘해주면 좋아했다가 못해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몹쓸 욕까지 해가며 그들의 미움을 증가시키셨습니다. 어차피 미워할 이들은 미워하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입에서 나오는 쌍날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아픔을 주기도합니다. 예언자가 박해를 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박해와 미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예언직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냥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아야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거든 우리보다 먼저 우리 스승님을 박해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히려 즐거워합시다. 그래야 더 그 분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묵상>>
오늘 차를 몰고 시내를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우측 차선에서 저희 차의 옆구리를 밀고 들어오는 차가 있었습니다. 저는 웬일인지 쳐다보았는데 그 운전사가 삿대질을 하며 심한 욕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앞에 고장 난 차가 있어서 자기는 비켜가려 했는데 왜 양보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태리 사람들이 다혈질인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무조건 욕부터 해대는 모습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내리고 “여보쇼, 나는 내 차선을 가고 있었고 당신은 내 차 옆구리를 박으려고 했소. 만약 당신이 차선을 바꾸려면 공간을 찾아서 들어와야지 양보를 안 했다고 욕부터 해대는데 누가 당신이 한 욕에 합당한 사람인지 제대로 함 생각해보셔.” 그 사람은 그래도 왜 양보를 안 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저도 제 안에 숨겨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못 봤는데 어떻게 양보를 하냐?” 소리를 지르며 차에서 내릴 기세를 취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습니다.
한 편으로는 그동안 남의 나라에서 아무 이유 없이 수많은 욕을 먹어왔던 것에 대해 보복을 한 것 같아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내면에 이런 일로 분노를 하는 모습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소리를 들으셨음에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다 좋게는 대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대접을 받을 때는 화를 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결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해서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잘 대해주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며 하는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그것이 아주 작더라도 그 돌아오는 사랑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 큰 덕을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은 그저 주는 것 같습니다. 그 보답을 받으면 참 좋은 일이지만 그 사랑에 보답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사랑을 거부할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 사랑을 받아 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지금도 다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이정민 신부-
예수님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미움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똑같은 것이 되리라는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에 대한 세상의 미움과 박해의 결정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 그분이 가신 길을 우리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
피할 수 없는 삶의 십자가 때문에 찾아와 면담을 청하는 교우에게
결국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 사목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안타까운데 듣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삶의 진리이고 신앙의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내려놓고
도망가라고 말해주는 것은 거짓 목자의 일입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 운명입니다
우리는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
-이흥우-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보물 같은 말씀의 뜻을 몰라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고 더불어 제자들까지 박해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무엇을 모를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는 접어두고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긴 오랫동안 같이 지낸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을 헷갈려 하니 세상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우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서 간직하는 것이 ‘보내신 분’을 아는 첩경일 것 같다. 그런데 똑같은 말이라도 내가 하는 말과 남이 듣고 이해하는 말은 다르다.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이 느끼는 태양과 북극에 사는 사람이 느끼는 태양은 다르다. 서로 본대로, 느낀 대로 다르게 이해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전달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동물은 동물의 소리를 내고, 사람은 사람의 언어를 사용한다. 같은 장미꽃을 두고도 희랍 말이 다르고 러시아 말이 다르다. 석가는 그 시대의 언어로 자비와 인간의 본질이 텅 비었음을 얘기하셨고, 예수님은 유다의 언어로 사랑과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얼마 전 우리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종교 간 대화를 위해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한 「대승불교, 그리스도를 말하다」란 번역서를 읽었다. 성공회 사제인 존 키난이 쓴 책이다. 우리 몸에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들어와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 듣는 것도 ‘말씀’에 쉽게 와 닿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승불교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성육화와 삼위일체’ 교리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외국 여행을 하면 의사소통이 안 되어 불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를 한다. 세계를 다니지 않고 세계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 봐야 조국을 잘 알게 된다지 않는가. 다른 나라 말을 모르는 나는 내 말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김두유 신부 -
어느 덧 부활 제5주간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기쁜 생활이 되시기 기도합니다.
여러분들께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본당에서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들어보면 신앙생활이 ‘쉽다.’ 또는 ‘행복하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제가 ‘확신에 찬 대답’이라고 미리 못 박아 놨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는 오늘 복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세상의 물정에 쉽게 물들어서 예수님과 자꾸 멀어지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나의 실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삽니다. 성당에 있을 때만, 주일에만 신앙인으로 자처하고, 나의 실생활에서는 신앙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나의 실생활’과 ‘나의 신앙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실생활을 사는 것도 ‘나’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나’이기에 실생활과 신앙 생활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내’가 온전한 삶의 자리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포함과 불포함의 관계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실생활과 신앙생활을 동일시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바리사이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함, 즉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지금 여기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역시 속해 있는 삶의 자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논리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예수님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 존재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면서 신앙인답게 처신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된 것이 아주 부끄럽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이 자기 사람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고 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돈에 사로잡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답게, 세상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외면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어둠이, 세상이,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보장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양승국신부-
<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한 신학자는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렇게 간결하게 정의 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순례객들.”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그 안에 늘 완벽한 평화, 충만한 기쁨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형제적 일치와 나눔, 섬김과 봉사가 계속되지만은 않습니다. 늘 황홀한 꽃길만 계속되지 않습니다.
때로 심각한 분열의 위기 앞에 서기도 합니다. 백척간두 낭떠러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합니다. 때로 세상의 박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토록 거칠고도 위험한 순례의 바다를 건너가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장 폴이란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나머지 생애동안 냉혹한 세계를 견뎌낼 수 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만 제대로 형성되어 있다면, 그 상황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쉼 없는 흔들림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배의 영원한 선장이시고, 우리를 구원의 땅까지 잘 인도해주시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이란
근심, 걱정, 고뇌, 유혹, 마음의 메마름과 흔들림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끼아라 루빅)
높고도 거친 물결에 맞서 싸워가며 길고도 고통스런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한 가지 마음은 낙천주의입니다.
한 대학 수영부 감독이 시즌을 마감하며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쉽게도 올 한 해 동안 우리 팀은 단 한 차례도 입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물에 빠져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비록 오늘 우리의 현실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다 할지라도, 순간순간 고통과 실패로 점철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항해에 함께 계시며, 언젠가 반드시 안전하게 우리를 또 다른 항구에 내려주실 것을 굳게 믿는 낙천주의가 필요합니다.
도공이 버려진 진흙으로도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듯이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도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유리화 작가가 깨진 유리조각으로도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제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달라,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뽑힌 이들과 뽑히지 않는 이들의 희비가 어떤 것인지도 잘 보았다. 뽑힌 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하느님 나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당부 말씀을 하신다. 오늘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로부터 뽑힌 대통령, 국회의원이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로부터 뽑힌 우리는 얼마나 더 기쁘고 행복해야만 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뽑힌 자 답지 않게 그렇게 기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현제적인 삶이 우리를 마냥 기뻐하게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리 쉽지 않다. 관계맺고 사는 문제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든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기 보다는 생각지도 않는 어려움과 고통, 병고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기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 내가 너희를 뽑았다고 해서 이 지상에서 모든 복을 다 누리게 되리라고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지상에서 너희는 더 미움과 박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은 이 지상의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을 상은 지상적인 것이 아닌데 여기에만 기대하고 있으니 마치 주님의 말씀이 거짓인양 큰 기쁨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뽑힌 이들은 이 지상의 수고와 수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니 오히려 천상행복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뽑히지 않은 이들과의 차이일 뿐이다.
오늘 주님께서 나를 뽑아주셨음에 기뻐즐거워하자. 그리고 내가 겪게되는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것이 당연한 수고임에 감사드리자. |
뽑힌 자의 행복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세상 가운데서 뽑았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좋아서 수도자가 된 사람과
주님께 뽑혀서 수도자가 된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을 결혼한 사람에게 적용하면
자기가 좋아서 결혼한 사람과
많은 사람 중에 선택을 받아 결혼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지가 됩니다.
어렸을 때 존경하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존경 안 한 선생님이 하나도 없었지만
존경하면서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심을 느끼기에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렵지만 존경하는 선생님 말입니다.
그 선생님은 자주 저에게 무엇을 시키셨습니다.
놀기 좋아하는 저이지만
“방과 후 찬선이 남아!” 하시면 너무도 좋아서
노는 것도 팽개치고 선생님을 도왔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왜 좋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지만
많은 아이들 중에 내가 뽑힌다는 행복감,
존경하는 그분이 나를 특별히 여긴다는 그 행복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분을 싫어하고
그분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저 일을 시켜먹기 위해서 저를 뽑았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요.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뽑아 수도자로 축성하신 것이 행복한 이유는
뽑힌 것이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제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뽑힌 이들
-김동하 신부-
얼굴을 고치고 화장을 하고 외모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세상에서 뽑히기 위하여 생각을 모으고 몸을 놀리며 안간힘을 씁니다.
세상에서 뽑혀야 일자리를 얻고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분께서는 우리 중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자녀로 뽑아주셨습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은총으로 불러주셨습니다(갈라 1,15 참조).
당신을 뿌리로 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뽑힌 이들이란 말씀으로 에워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길라잡이로 삼아서 마음과 몸을 바로 잡고 곱게 단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앞장세운 말씀에 길들여지도록 안팎으로 애를 써야 합니다.
말씀 앞에 두 손 모아 머무르고 말씀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앞장세운 말씀을 뒤따라야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니야!
-윤영수 수녀-
예전에 보았던 어느 텔레비전 광고가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 라고 하는데, 개성이 넘치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한 사람만 "아니오"라고 하며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집중시킨 후 광고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광고문을 통해 "예"와 "아니오"의 대비, 다수와 소수의 힘의 역할 변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면 세상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걸림돌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은 간혹 주님의 뜻 앞에서 갈등하는 우리에게 협박·타협·유혹 또는 동조하는 척 등등 여러 모습으로 변장하며 혼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럴 때 "아니야!"라고 외치며 주님을 따르려는 순수한 열정에 편들어 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살고자 하는 신자로서, 곧 주님의 벗으로 매일을 숨쉬고 사는 우리는 분명 "아니오"라고 해야 할 상황 앞에서 무수히 망설이고 갈등하며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야"라고 하면 내가 속한 무리에서 소외당하는 건 아닐까, 혹은 여러 가지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등.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더라도 주님의 사랑에 의지한다면 그 미움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랑의 표지임을 느끼고 자랑해야 할 몫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용기를 내어 세상의 증오 앞에 당당한 자세로 하루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자.
-이세형신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숨결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파괴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매우 고통스러울 때, 현실을 저주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갖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그래 포기해. 포기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
우리는 물질적으로 더욱 풍부해졌고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더욱 소외되고 외로워하며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지지 않고 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체불만족’의 저자인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일본 청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양팔과 양다리가 없다시피 해 거의 몸뚱이뿐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과 맞섰고 그 운명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조건을 불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또 지금 삶이 편하다고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운명에 맞선 그의 도전과 모험과 눈물겨운 성취 뒤에는 어머니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외모를 부끄럽게 여기기보다 ‘오직 하나뿐인 존재’라는 자존감을 아들에게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장애를 방패삼아 도망치는 아이로는 절대 키우지 말자.”어머니의 확고한 삶의 자세에서 오토다케는 스스로 놀림과 편견의 벽을 깰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됩니다.
또 한 사람 담임선생님, 그는 아주 매정하게 오토다케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운동도 청소도 남들과 똑같이 시켰고 교실 안에서는 전동 휠체어에서 내려 엉덩이로 기어 다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이 오늘의 오토다케를 있게 했습니다.
결국 오토다케는 어머니로부터 깊은 자존감과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강인함을 배웠다면, 선생님으로부터 이 험한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하게 헤치며 살아가도록 근성과 끈기를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자기 삶을 부둥켜안고 살아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우리는 예수님께서 뽑으셨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문제는 살아가는 사람은 ‘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려면 단순히 예수님께 복을 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승리를 쟁취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의 운명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지는 하루의 은총의 시간들을 헛되이 허비하지 말아야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아멘..........◆
독서 : 언제나 순명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신부-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헤어진 후(15,38) 실라와 함께 2차 전교 여행을 떠났다. 바울로는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데리고 전교 여행을 한다. 디모테오는 바울로가 1차 전교 여행을 할 때 개종시킨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열심하고(2디모 3,15), 바울로가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내 사랑하는 아들”(1고린 4,17)이라고 부를 정도로 충실하고 믿음 깊은 사람이었다. 또한 교우들 사이에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는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1,22; 6,3; 22,12; 1디모 3,7).
디모테오는 이때부터 바울로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 바울로 일행은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 공이회의 결정을 전해주며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에 율법의 준수문제가 해결되자 신도들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고,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다.
바울로 일행은 어떤 지역에서는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시므로 전하지 않기도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교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트로아스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마케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리하여 복음은 새로운 대륙인 유럽에까지 전파된다. 바울로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충실히 따라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으뜸가는 태도는 순명이다. 사울이 아말렉을 쳐부순 다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아말렉 왕을 비롯하여 살찌고 튼튼한 짐승을 사로잡아 왔을 때, 예언자 사무엘은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1사무 15,22)라고 말했다.
사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신이 일하려고 하고, 믿음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한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만이 순명할 수 있다. 믿음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이며, 믿음 깊은 사람만이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8)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한다. 순명은 믿는 이의 덕이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에게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히브 13,17)라고 권고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는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자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였다. 자신은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유럽 지방에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생각과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임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자. 인간은 주가 아니라 종이며, 하느님께서 주이시다. 종은 자신의 의지가 없는 자이며, 주의 뜻을 따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하느님의 참된 종으로서 살아가자.........◆
세상이 미워하는 그리스도인
-조욱현신부-
이번 주간에는 요한 복음 14장을 우리는 묵상하고 있다. 14장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라고 하셨고,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확고히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있고, 결실을 맺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릴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임을 알려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실천해야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살려고 할 때,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 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우리가 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았던(창세 1,25)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세상을 말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 제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세상의 뜻을 거슬러 나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의 제자와 세상에서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과 내 원의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항상 충돌을 하게 된다. 이 때에 세상에서 가려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 자신을 끊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기 자신의 원의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여 그것을 실행하면서, 아무도 주지 못하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누리는 것이다. 세상이 그에게 주는 박해는 그리 어렵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유행이나 사고를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항상 깨어있지 못하면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서 가려낸, 선택받은 자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세상과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이 싸움에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이기고 정복한다는 것은 바로 그 세상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을 정복하여 하느님의 구원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선택된 자녀들로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로서 세상에 참된 구원을 전하는 우리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세상의 빛"
-이수철신부-
만일 세상에
교회와 수도원, 미사가 없다면,
또 불교의 사찰이나 예배가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어두울까요?
주님은 우리를 너희는 ‘세상’이라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우리의 신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없는 빛, 세상이 없는 소금
그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신원입니다.
수도원의 봉쇄 구역이,
우리의 검정 수도복이,
우리의 수도생활 양식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비단 수도자나 성직자만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 역시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이들의 신원이여 정체성입니다.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이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평화를 느끼는 것도
바로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수도원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깨닫게 해 줍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으로 뽑아 낸 우리들이요
이게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빛이 꺼지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대로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이래서 늘
창조적 긴장이 있고 깨어 살라는 충고가 있습니다.
빛을 싫어하는 어둠의 세력이
늘 세상 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의 걸림돌 같은 존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세상과 같아지게 하고자하는 유혹과 박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수도원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도 이를 증명합니다.
수도원들이 부와 권력으로 세속화되어 세상이 되어버렸을 때
수도원들은 어김없이 망했고,
고독과 가난 중에 하느님을 찾아 세상에서 벗어났을 때
수도원들은 살아났습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긴장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에서 뽑아 낸 주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기위해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 미사와 기도가 빠져버리면
수도원은 곧장 세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세상 안에서 선교 여행 중에도
세상에 동화, 변질되지 않고
주님의 사도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늘 성령의 인도 따라 살았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뽑아
다시 세상의 빛으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오해의 시작과 끝
-노성호 신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올바로 이해하고 대응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해석하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참으로 쉬운 것은 아니구나
싶지만, 하나의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질 땐 참으로 난처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오해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오해를 풀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가만히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겠다 싶기도 하지만, 오해의 싹을
씻어내고 좋은 관계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참으로
알고,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채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오해하면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의 삶을 얽매는
걸림돌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구원의
역사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크신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양승국신부-
<녹록치 않은 세상 앞에서>
성모성월을 맞아 아이들과 9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9일기도 끝에는 흥미진진한 형제들의 ‘한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한 형제는 자신이 체험한 성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이런 요지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로 인해 어려웠던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오직 묵주기도를 통해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늘 지나다니던 길, 버스를 탈 때 마다 빠지지 않고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오른손은 묵주가 있는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목적지까지 30분 정도 걸렸는데, 3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죽기 살기로. 그렇게 한 3년이 지나니 묵주기도와 함께 꼬이고 꼬였던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했던 꿈도 이루어져 부족한 저이지만 지금 이렇게 수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요즘도 슬플 때나, 우울할 때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자동으로 제 오른 손이 바지 호주머니로 들어갑니다.”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누군가를 원망한다든지, 자포자기 한다든지, 자학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묵주를 손에 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는 오늘 복음 말씀, 조금은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세상’은 다분히 긍정적입니다. 복음화 시켜야 할 대상으로서의 세상입니다. 구원 받을 대상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노력으로 아름답게 가꾸어나가야 할 가치 있는 세상입니다.
회피하고 두려워할 세상이 아니라 살아볼만한 세상,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투신해야할 세상입니다. 결국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파괴와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세상, 하느님 나라로 변모되어야 할 소중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정신, 복음의 정신과 대립되는 세상, 악령의 지배에 종속된 집단으로서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집단, 예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집단으로서의 세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세력과 사사건건 대립되셨습니다. 악의 세력과 그들의 횡포 앞에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기품 있고 고고한 학과도 같이 ‘세상’과는 차별화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어쩔 수 없이 본성상 악의 세력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발점이 다르고, 최종적인 지향점이 다르고,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미움 받음으로 인해 당연히 따라오는 공식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역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열심히 추종하면 할수록,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세상을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공공연하게 ‘낙태시술’과의 절교를 선언한 몇몇 의사 선생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따라오는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장 병원 운영에 큰 어려움이 따라왔습니다. 같은 업계 종사자들로부터의 눈총도 따가웠습니다. 고객들로부터의 질타도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 어떤 생명이라 할지라도 인위적으로 침해하지 않겠다는 그 결연한 의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고, 목숨 걸고 지켜나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절대로 녹록치 않습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적당히 양보하면서 살기란 쉽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미움, 질타, 견제를 묵묵히 견뎌내야만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미움 앞에 조금도 연연치 않고 꾸준히 스승 예수님을 따라 정의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젠가 주어질 상급은 정녕 클 것입니다.
그대를 향한 세상의 박해가 크면 클수록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스승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이 그대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16,1-10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복 음 : 요한 15,18-21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온 세상에 전파한 위대한 사도 바오로와 계속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마르코라는 요한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심하게 일어나지요.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마르코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바르나바는 같이 데려 가자고 하였던 것이지요. 결국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버리고, 바오로 사도는 실라스를 택하여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16장부터가 2차 전도여행의 내용입니다. 리스트라에 도착한 바오로는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티모테오를 동료로 삼아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1차 전도여행을 터키의 남쪽지방을 대상으로 삼아 전도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2차 전도여행의 목적지를 북쪽지방의 주요 도시로 삼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여행의 시작부터 바르나바와 갈라섰듯이 계속해서 예수의 성령께서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방향을 틀어서 비티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또 실패했지요.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16,6-7)
그래서 그들은 터키 항구 트로아스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트로아스 해안에서 묵상에 잠겨 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신비로운 영상이 전해집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사도16,9)하고 간청했던 것이지요. 이 신비로운 영상을 접하고 난 뒤에 바오로 사도는 터키 북부의 전도지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나게 되었다고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사도16,10)
우리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두 가지를 함께 묵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등하고 결별하는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나 인정하는 참으로 위대한 사도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이렇게 큰 인물이 나온 적이 없을 정도이지요. 구약에 있어서 가장 큰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모세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신약에 있어서 가장 큰 인물을 꼽으라면 베드로 사도보다도 바오로 사도가 꼽힐 것입니다. 이렇게 큰 인물도 동료와 언쟁을 벌이고 결국 결별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도 다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사람은 모두 다 천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천사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부족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의 인간적인 면 때문에 실망하거나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 축성 받은 사람이고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더욱 노력하는 사람들이지요. 세속적인 것으로 다투는 것은 논할 가치조차 없지만 신자들끼리도 복음 때문에 다툴 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거나 신앙에 위기가 온다면 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요.
두 번째 또 생각할 것은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즈음에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의 길을 계속 막아 선 것입니다. 결국 마케도니아로 인도하시는데 도대체 왜 성령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길을 막으셨으며 마케도니아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입니다. 터키는 아시아에 속하고 그리스는 유럽에 속하지요. 즉 아시아에 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오로 사도를 예수님께서는 유럽으로 불러 들이셨던 것입니다. 선교지가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선교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셨습니다.
트로아스는 터키의 항구도시입니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 까지는 바닷길로 한 185km정도 떨어져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이 네아폴리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유럽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네아폴리스에 가면 지금도 ?바오로 가도(街道)?라고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렵에서 처음으로 세례 받은 여인인 리디아를 기념하는 ?리디아 성당?이 세워져 있지요.
왜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를 유럽, 특히 네아폴리스로 이끄셨는지는 그 지리적 환경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네아폴리스에는 로마로 가는 길인 에그나티아 대로가 있지요. ?모든 길을 로마로?라는 말도 있듯이 에그나티아는 로마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뜻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바오로 사도를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선교는 나의 의지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대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전도여행을 결심하고 트로아스 같은 곳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어느 날 신비스러운 영상이 뚝딱 떠올라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려주는 것일까요? 무엇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지향과 목표를 설정해 갈 것인지를 놓고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늘상 말씀을 통해 전해지지요. 또 사목자가 전해주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계속해서 바오로 사도의 일대기를 그린 성경을 풀이하며 복음을 선포해야할 사명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목자로서 여러분에게 제시해 준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 학교>, <사회복지 시설 돕기> 등은 모두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목자의 가르침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 쓰기>로 얼마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는지 써본 사람들은 다 깊게 체험을 한 바 있습니다. 또 <100권 신심서적 읽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요. <기도 학교>또한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쓰고 신심서적을 읽고, 기도를 하며 신심을 키운 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 복음을 실천할 때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이 하느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사목의 길을 걷는 사목자를 통해서 신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목자의 사목 방침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성모 마리아의 이 말씀을 일생 실천하였던 바오로 사도가 가는 곳마다 풍요로운 결실을 맺으셨음을 우리는 이천 년 교회 역사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선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성모 마리아처럼, 또 바오로 사도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게 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사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강영구신부-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압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사랑받으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열어야 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 사랑의 사람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필립2,7)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팔을 벌립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면 사랑 받습니다.
세리든 창녀든 죄인이든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편 가르기와 이해득실(利害得失)에 길든 세상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기편이면, 득이 된다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자기편이 아니면, 손해가 된다면 무조건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며 유유상종(類類相從)하는 곳에 편 가름과 싸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죽음과 어둠만 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당신을 미워하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고
미움을 사랑으로 갚으시기 바랍니다.(一明)
제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가시는 스승님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에서 스승과 제자들 간의 관계는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는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았다. 아들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방법의 최고절정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13절)에 있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계명을 지켜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즉 “언제나 남을 열매를 맺음으로써”(16절) 스승과의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이에 준(準)한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 때문에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친구’에 해당하는 ‘제자’들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계명’ 때문이다. 아버지의 계명은 아버지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것이며, 이 때문에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이다.(요한 3,16) 그래서 아들도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하여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요한 13,1)는 증거로 ‘친구’가 된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앞서간 복음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스승과 세상 안에서 조명되는 제자와 세상의 관계로 전개하고 있다. 스승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대접이 곧 그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은 주제는 더 이상 사제(師弟)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이와 대조되는 세상이 드러내는 미움과 증오이다. 말씀의 배경에는 아직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15,1-8)가 자리를 잡고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보듯이 불성실한 가지는 잘려나갈 수도 있으나, 가지가 열매를 맺는 한 그 가지는 나무와 모든 생사(生死)를 같이한다.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겪게 될 세상의 미움과 증오, 그리고 박해와 죽임이다. 나무가 겪게 되는 모든 것은 가지 또한 겪게 되는 이치와 같다.
복음서를 편집하던 시점에서 볼 때 제자들을 이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스승이 똑같은 미움을 받았으며, 제자들이 스승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18절)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있다면, 즉 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처럼 세상의 가지들과 어울려 지낸다면 세상의 환대와 사랑을 받을 것이지만,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스승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19절)
예수님께서는 1차 고별사의 서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고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절)는 말씀을 제자들더러 상기하라고 하신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종이 되어 종들과도 같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지만 종이 주인보다 결코 높을 수 없으며, 파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파견된 아들은 파견하신 아버지보다 결코 높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고 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 ‘파견자와 피파견자’의 관계가 유지되듯이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주인과 종’,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암시하신다. 세상이 주는 미움과 박해 가운데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친구와 친구’의 관계보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종은 결코 주인이 받는 것 이상은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박해 가운데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 관계는 ‘친구와 친구’ 관계로 승화되며, 이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된다. 말씀의 요지는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뽑힌 제자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격려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자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양면성을 가르친다.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자를 배척하여 하느님을 등져버린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과 세상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어 구원하시려는 대상이다. 세상은 즉 심판(審判)의 대상인 동시에 구원(救援)의 대상인 셈이다. 세상은 완고한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서 한없이 약하고 보호와 구원을 갈망한다. 우리의 세상, 평화를 주기보다는 온갖 두려움과 불안만 제공하는 곳, 이곳이 바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하는 현주소이다
세상에서 뽑다
-유광수 신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께 뽑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러나"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또한 큰 책임감을 느끼는 말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 특별히 어떤 사명감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내 뜻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시작된다. 분명히 우리들은 우리의 뜻이 있고 우리들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형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뜻과 나를 뽑으신 분의 뜻이 일치되기 전까지에는 계속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뜻이 나를 뽑은 그분의 뜻에 일치될 때만이 우리들은 그분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뽑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수요일과 목교일에 한국 수도자 장상 연합회가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있었다. 폐막 미사를 집전하신 이한택 주교님께서 수도자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고 강조하셨다. 세상에서 우리 신자들의 역할은 빛, 누룩, 소금의 역할인데 그 중에서 교구 신부님들은 빛의 역할이라면 수도자는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빛은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지만 누룩은 드러나지 않게 있으면서 부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는 남 앞에서 드러내는 역할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부풀리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자뿐만 아니라 축성봉헌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은 이유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도 안되고 세상 사람처럼 세상의 것으로 또는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살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타락하고 어지러운 것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라고 뽑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세상 곳곳에 얼마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있는가?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빛 또는 누룩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한번 세속에 사는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을 비추어 주고 관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다.]
(교의헌장 31항)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 주셨다는 것은 단지 어떤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무겁고 짓눌리고 주눅부터 들기 쉽다. 세상을 성화시키라는 사명도 주어졌지만 실상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 4, 4)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주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세상을 성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겁게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길에서 우리를 구해주셨다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의 사명에 충실한다면 기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받게 되는 박해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사람들, 세상의 성화를 위해 누룩의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첫댓글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