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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려면
(시 57:1-11)
이미 봉독한 말씀 중에서 7∼8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
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
닐 때 쓴 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도전 때문에 민족의 운명이 위
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최후로 골리앗을 격퇴하는 사람은 사위로 삼겠다는 방까
지 내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아무도 골리앗의 도전자가 나서지 못했
습니다. 이때 마침 다윗이라는 소년이 아버지 이새의 부탁으로 일선에 위문품을 가지고 형
들을 위문왔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걸어오는데,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들
을 수 없는 거북한 말,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옆에 있던 군인에게 물었습니
다. "도대체 저 놈이 누군데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거요?" 옆에 있던 군
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누구라니? 저 사람이 바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인데 백전노장이
야. 저 사람을 당할 사람이 우리 군대에는 없어. 그래서 저 사람이 나타나 싸움을 걸면 우리
는 도무지 떨려서 맥을 못쓰고 항오에 숨기도 바뻐." "그래요? 내가 나가겠습니다"라고 다
윗이 말했습니다. 마침 옆에 와 있던 다윗의 형이 다윗을 보고 야단쳤습니다. "너는 위문왔
으면 너 할 일이나 하고 돌아갈 것이지, 건방지게시리 네가 뭔데 우리도 두려워 떠는 골리
앗과 대결하겠다는 거냐? 너는 교만해. 어서 돌아가거라." 이 말에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
형님, 제 말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례받지 않은 저 골리앗을 그냥 둘 수 있습니까?
저가 누구길래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
습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을 받고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의 숙적 골리앗을 대결하러 나섰습
니다. 골리앗이 싸움을 걸 때마다 검은 개 하나 나타나지 않고 죽은 듯이 숨어있던 이스라
엘 진영에 사람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골리앗은 신기하기도 해서 자세히 보니까 사람은 사
람인데 어른이 아니고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전쟁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무장은 하지
아니하고 양을 치던 때 입던 옷 그대로, 지팡이를 그대로 잡고 나타났습니다. 골리앗이 다윗
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습니다. "야, 이스라엘에는 오죽 사람이 없으면 아이를 내보내느냐?
너,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알고 막대기를 들고 나오느냐? 나를 개로 알았느냐? 하, 하, 하."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습니다. 사실 골리앗의 완전 무장과 다윗의 무장은 비교도 안되었습니
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히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너, 골리앗 분명히 들어
라. 전쟁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너에게 분명히 보여주마.
너는 칼과 창으로 나에게 나아오지만 나는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하
면서 미리 준비했던 물매를 골리앗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그 물매돌이 날아가 골리앗의 이
마에 명중해서 그 자리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장 골리
앗을 완전히 이겼습니다. 전쟁 경험이 있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무기가 좋아서 이긴 것도
아닙니다. 키가 골리앗보다 커서 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해서 온 이
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 이긴 것입니다. 소년 다윗은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백성들 사이에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말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백성들의 노래를 들은 사울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때부터 자기의 사위인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다윗을 죽이
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요, 인
간적으로 말하면 장인인 사울 왕에게 손대지 않기로 하고 피해 다녔습니다. 오늘 읽은 시도
표제에 있는 대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다니던 때 굴에 있으면서 쓴 시입니다. 말하자면
고난 속에서 부르짖은 애원입니다. 이 시편은 한 인간,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이것을 생명으
로 삼고 사는 사람이 불의의 세력에 눌려서 심각한 난경에 처했을 때 부르짖은 호소이기도
합니다. 난국에 처한 인간의 피신처는 오직 하나님의 품속이요, 그의 날개 밑입니다. 의롭게
살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진리와 정의의 투사에게는 그 마지막 피신처가 오직 하나님의 품속
인 것입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간절한 기도로써 자기의 힘
을 북돋우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자신이 대적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탄원하며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은 이 기도를 되풀이하
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무의미하고 헛된 반복이 아닙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
황에서 애타게 부르짖는 호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했음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진실
된 믿음과 자기 희생, 그리고 온전한 평안과 만족으로 그의 영혼이 사실상 하나님만 의지하
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심한 폭풍이 불고, 뇌성벽력이 요란하고, 파도가 산처
럼 몰아친다고 해도 만세 반석 되시는 주님의 품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평안
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절대 안전이 보장됩니다. 하나님을 자
기의 유일한 피난처로 삼아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때에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에게
서 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어떤 길로 가든지 피난처를 찾지 못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
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치려 하는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켰습니
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금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
에 누었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라고 했
습니다. 다윗은 그를 잡아먹으려는 자들 가운데 있는 것이 마치 사자굴 속에 있는 것처럼
위험스러웠습니다. 저희의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았습니다. 그뿐입
니까? 6절에 보니까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
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라고 했습니다. 원수들은
다윗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팠지만 결국은 자기들이 그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다윗
을 죽이려고 의도했던 재앙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자기들의 꾀에 포위되었습니
다.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던 사울 왕이 결국 엔게디 굴 속에서는 다윗의 손안에 들게
되었던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 7절 이하에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
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
윗은 이런 위험 속에서도 구원받을 것을 확신하고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
니다.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 확실히 세우면
캄캄한 밤중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마음이 튼튼히 서
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마음이 바로 튼튼히 서면 죽음이라도 결코 무서운 것
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속
에 던진다는 느부갓네살 왕의 공갈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므로 바울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찬미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리석 위에 쌓아 올린 로마는 넘어졌으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
에 세운 하나님의 교회는 넘어지는 일을 모르고 지금도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는 것을 우리
는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영웅이고 누가 축복 받은 사람
입니까? 하나님 안에 나의 삶의 위치를 튼튼히 세우고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언제 읽어도 멋있
는 말입니다. 패기가 넘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적인 묘사입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과
학자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인의 특권입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동녘이 밝아오는 새
벽, 그것도 불러 깨워서 속히 태양이 떠올라 어두운 누리를 밝히 비추게 하겠다는 패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새벽을 깨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새벽을 깨우려면 비전이 있어
야 합니다. 옛날 모든 신앙의 지도자들, 새벽을 깨운 사람들에게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청년
이사야에게도 비전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선지도 그 민족을 향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다윗에
게도 비전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예순 살에 아들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먼저 나온 아들이 에서요, 그 발꿈치를 붙들고 나온 아들이 야곱이었습니다. 그
런데 이 두 사람은 모든 면에 대조적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몸이 튼튼하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나이였습니다. 동생 야곱은 몸이 약하고 잔꾀만 남은 여자 같은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형 에서를 물리치고 이삭을 계대해서 신앙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우리의 예측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해답을 그들의 청년 시절에서 찾
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은 집에서 여자처럼 부엌일을 도우면서 팥죽을 쑤고 있었
습니다. 그때 사냥 갔던 에서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팥죽을 쑤는 것을 보고 "그 붉
은 것 나 한 그릇 줄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이것 주는 것은 문제될 것
없는데, 아예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는 것이 어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
에 에서는 "내가 당장 배가 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그래서 팥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았습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을 갈라놓은 인격적
인 차이점입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많은 약점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에서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그저 그날 그날을 먹고살면 되었습니다. 내일을 생각
하거나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고프면 장자의 명분도 헌신짝
던지듯이 하였습니다. 그것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아마 그에게는 힘이 있고, 사
냥의 기술이 있고, 용기가 있으니까 내일을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
곱은 꿈을 따라 살고,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맛있게 끓여 놓은 죽
을 몽땅 형에게 주고 하루 저녁 빈 배를 움켜쥐고 견디는 한이 있더라도 야곱에게는 내일을
약속하는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도 소중하였던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
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내일을 바라보며 비전을 따라 사는 사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을 달게 이겨 나가는 투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에 요셉이 그
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을 뻔하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고생
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생 속
에서도 낙심하거나, 반항하거나,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충성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상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 비전 때문에 모든 억울함도 다 극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3년 간의 어두운 시절이 지나 그의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새 천년은 비전을 가
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전이 있으면 그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시편을 쓴
다윗에게 비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당하는 어려
움 때문에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을 주신 대로 이루십니다. 모세
도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
로 하면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둘째로, 새벽을 깨우려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
정되었사오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나간 16세기를 보통 암
흑시대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많았지만 부패와 타락으로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어두운 시대였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새벽
을 불러 깨운 사람이 누굽니까? 확신과 신념의 사람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아닙니까?
루터는 어두운 시대에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생명을 내놓고 일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모략과 중상, 협박과 위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것이 바로 나에
게 맡겨진 지상의 사명이라'는 마음의 확신이 생겼을 때 루터는 과감하게 나설 수가 있었습
니다. 루터는 웜스 국회의사당의 기왓장을 바라보며 "마귀가 저 기왓장처럼 많아서 내게 달
려 붙는다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노라. 오! 하나님이시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확신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습니다. 머뭇거
리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면서 나아갑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
께서 길 가실 때에 소경들이 따라오며 소리지르기를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
소서"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었
습니다. 이 소경들은 서슴지 않고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확신 있는 고백
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눈을 만지시며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시니 곧 눈이 밝아
졌다고 했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따라서 확신이 있으면 주체성이 생깁니다. 남의 말을
무시해도 안되겠지만 너무 여론에만 의존하는 것도 확신 있는 사람의 생활 자세가 아닙니
다. 새벽을 깨우려면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 내가 해야 할 것이 무
엇인지 알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념 있는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압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아니합니다. 뱁새가 황새걸음 하지 아니합니다. 가령 우리 나
라에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일에 아직도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패물이라
는 것입니다. 서로가 좋아서 다 결혼하기로 했다가 이 패물 문제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거의 사실인데, 패물에 대하여 관심이 큰 것은 남자편이
아니라 여자편입니다. 통계를 보면 공부 못한 사람보다 공부했다는 사람이 더합니다. 동창들
끼리 모이면 약혼했다, 결혼했다 하는데 그래도 다이아몬드 반지 끼고 나가야 축에 들지, 그
렇지 못해서 "저 애는 지지리 못나게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못해 주는 남자와 약혼하고 결
혼했다"는 말 듣기 싫어서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젊은 부부는 4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신부
쪽이 너무 가세가 어려운 것을 아는 신랑 쪽에서 자부될 사람을 불러 놓고 미리 다 말했습
니다. "너희 집 사정을 우리가 다 알고 결혼하는 것이니까 아무 부담 없이 네 몸만 오면 된
다. 그리고 네게도 부담이 안되어야 하겠으니 네가 와서 필요한 것 하나씩 준비하기로 하고
우리도 일부러 준비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 될 사람이 신랑 될 사람에게 동
창회 나가면 다 만나는데 외제옷, 가방, 신발, 반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요구해서 신랑 될
사람이 자기 수입도 변변치 않으면서 일수변을 내서 이것저것 다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데 그것을 갚지 못하니까 빚이 늘고 또 늘어서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신랑 신부는 서로 갈라져 피신하고 말이 아닙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이런 부끄러
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가의 공무원이 되면 부정과 부패의 발생 요소가
될 것이 뻔합니다. 자기 남편 수입은 생각 않고 다른 집 해놓고 사는 것만 넘겨다보니까 순
진한 남편 바가지 긁어 부정을 자행케 하지 않겠습니까? 새벽을 깨우려면 확신이 있어야 합
니다. 다른 사람은 뭐래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도 나만은 이렇게 산다는 삶의 주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새벽을 깨우려면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필요합니
다. 그러나 비전만으로 끝나면 아무 쓸모 없는 공상으로 끝나버리기 쉽습니다. 확신이 있어
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이면 무서운 고집으로 전락해 버리기 쉽습니다. 새벽을 깨우려면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뿐더러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할 때 어두움
을 몰아내고 광명한 아침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이 있어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확신이 단시일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
다. 확신이 있어야 모험이 있고, 모험이 있어야 승리가 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려면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의 삶의 모습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
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앞에 있는 것' '푯대' 표현은 다르지만
말하자면 비전입니다. 이 비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부르신 부름의 상이 확실했습니
다.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좇아가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좇아가는 사람은 힘이 듭니다. 그렇
다고 쉴 수 없습니다. 구경거리가 많다고 두리번거릴 수 없습니다.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
린다고 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계속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천년의 새벽을 깨우려면 여러분이 가진 비전대로 좇아가야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전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내 고안이 비전이 아닙니
다. 내 계획이 비전이 아닙니다. 내 야망이 비전이 아닙니다. 비전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어떻게 생깁니까? 주님을 믿
는 믿음이 확신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입
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
신하노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비전과 신념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새 천년의 새
벽을 깨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날은 어두웠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데서만 살 수는 없습니
다. 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벽을 깨워야 합니다. 비전과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서 새 천년의
새벽을 깨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