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사마르칸트
나는 걷는다. 2권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1권에서 터키와 이란의 국경 고지대에서 급성 이질에 걸려, 귀국하여 1년 몸을 되살리고 다시 도전한 글로 2000년 5월 14일에 시작한다. 파리에서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앙카라로, 앙카라에서 국경도시 에르주룸에 도착한다. 다시 버스로 발병 되었된 ‘뎌어바야지트’의 전방 20여 킬로 풀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기를 고수한다. 걷기 여행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국경 검문소에서 거만하고 불친절한 터키 세관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인이라 운 좋게 3시간 만에 창구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란의 국경으로 들어선다. 이란의 국경 통관소는 ‘호메이니’와 ‘아타튀르크’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란은 1956년에는 인구가 1,900만 명에서 전쟁 후 1996년은 7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어디서나 전쟁의 흔적은 있었다. 어느 마을이나 도시에 전쟁에서 목숨 바친 순교자의 커다란 초상화가 있고 묘지에는 많은 순교자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향해 하루 40킬로 정도의 길을 걷고 있다. 이곳의 호텔은 식당을 가리킨다. 숙식을 제공하는 곳은 ‘모사페르하네’ 즉 대상 숙소라는 뜻의 간판을 붙였다. 그러나 대상 숙소가 현대식인지 옛날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란의 ‘타지아’라는 애도의 달이었는데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걷는 여행자가 겪는 고통이 잘 곳인 것같다.
이곳은 정복을 입은 경찰보다 사복을 입은 경찰이 많이 다닌다. 젊은 남녀들은 서로 만날 수는 있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손을 잡는 단순한 접속이나 소박한 만남도 징계를 당하거나 체포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교환할 수 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사복 경찰 ‘코미테’를 두려워한다. 이 나라는 개에 목을 끈으로 묶어 끌고 가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양은 목에 끈을 매어 산책하는 건 금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경찰을 향한 작은 도전으로 양의 목에 끈을 달아 끌고 다닌단다.
애도의 기간에는 노인들이 하얀 수염에 검은 옷을 입고, 머리는 진한 색의 모자를 쓰고 울음을 터뜨리며 기도용 양탄자 위에 앉아 큰 소리로 곡을 확성기를 대고 한단다. 커다란 흰 손수건을 든 남자가 눈물 젖은 손수건을 들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후사인’이 죽은 날을 달을 애도하는 통곡의 달이다. 이란 사람들은 대부분 시아파 교도이고, 쿠르드 사람들은 순나(예언자의 언행을 적은 것으로 코란을 보완하는 중요한 자료)를 따르는 정통 이슬람교도다. 서양인의 눈에는 두 종파의 구분이 어렵다.
이곳은 여자가 일하는 직업은 거의 없기에 남편이 죽으면 과부는 수입원을 잃게 된단다. 그래서 여자들은 재빨리 남편을 구해야 한다. 시장 구역은 돈 많은 남자가 많은데, 대부분 양탄자 상인들이다. 남자들은 죄를 짓지 않고 다양한 성생활을 즐기려고 과부들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래서 중매쟁이가 성업하고 중매료는 일시적인 결혼의 대가의 10분의 1을 받는다. 이는 이슬람법에 합법한 것이란다.
길에는 우체통이 두 가지 색깔로 서 있다. 노란색의 우체통은 일반우체통이고 회색의 우체통은 경찰로 보내는 우편물이다. 이슬람 혁명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기 위한 제도란다. 터키 국경을 넘은 이래 외국인에 친절한 사람들이 어떻게 밀고를 제도화하는 정권을 허용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아해한다. 작년에 밀고로 터키 국경에서 질병과 ‘쿠르디스탄’에서 습격당한 기억이 저자를 힘없게 기계적으로 걷게 한다.
배낭을 지고 걷다 보면 등에 땀이 흘러 작은 손수레를 장만하려고 스스로 스케치한다. 메는 대신에 수레를 이용해 보자는 아이디어다. 그것은 테헤란을 지나면 더위와 싸우기 위한 유일한 운송 수단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할 생각을 한다. 사막을 지날 때 생각해 낙타를 빌리려 찾아본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카비르’ 사막을 적어도 낙타 세 마리와 낙타 몰이꾼, 가이드 한 사람은 필요했다. 그것을 구할 방법도 머리에서 구상 중이다.
이슬람의 장례식은 명확하고 꼼꼼하게 짜인 의식을 따른다. 먼저 시신을 씻기고 즉시 땅에 묻는다. 햇빛과 더위의 나라인 이슬람 국가여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 다음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일곱 번째 날, 일 년이 되는 날에 여러 의식을 반복해서 올린다. (우리나라 7일 장에, 소상인 1년 상과, 대상인 만 2년 탈상의 제례처럼) 빵을 굽는 화덕은 피라핏 형태의 흙 단지 같은 화덕에 빈대떡 모양의 납작한 반죽을 벽에 붙이면, 일 분이면 빵이 익는다. 먹다 남은 빵은 버리는 데 빵이 아주 얇아서 하루 사이에 말라버린단다.
테헤란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많아졌다. 특히 트럭이 많다. 보통 자동차 가격은 노동자의 100년 치 연봉이란다. 그는 길에서 도둑 경찰을 만난다. 테헤란 인구는 1,300만 명의 대도시다. 길에는 가시철망과 감시탑이 즐비했다. 그것은 병영이었다. 다리 밑을 지나는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오라고 한다. “I am the police, your passport. (경찰이다, 여권)이라 쓴 코팅을 내미는데 민간인 복장에 3일은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이고, 살진 대머리의 키가 작고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의자에 앉았다기보다는 잠을 잔 듯한 표정에 입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저자는 검문 검색을 빙자한 이 도둑의 권총을 보이는 위협을 하기에 카메라를 빼앗긴다.
화를 곱씹으며 더위도 목마름도 잊고 정리하여 파리의 아들에게 새 카메라를 DHL로 보내라는 결정을 한다. 이란에서는 판매되지도 구하지도 못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 전 터키에서도 농부 세 명이 이 카메라를 훔치려 했던 6월이었다. 관광부는 안티 관광부가 더 어울리는 나라들이 많다.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을 거칠게 다루는 악명이 높고 국경을 통과하려면 곰 같은 관리들이 리얄화를 낚아채 가고, 잔돈은 주지도 않는 곳이 많다.
16세 청소년들의 파티에 60명이 모이자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했다. 이튿날 부모들이 경찰서에 와 벌금을 내고, 딸들은 데려가고 남자아이들은 채찍질을 당했다. 태형 중 경미한 것은 ‘타바지리’이고, 가혹한 것은 ‘하드’라 한다. 마약을 하다 잡히는 하드 채찍 태형을 받는다. 집행인이 채찍질을 천천히 점점 등 아래로 내려가며 때린다. 장딴지가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간다. 맞은 자국은 일주일 동안 남는다. 하드 형은 180대를 맞는데, 맞고 오면 그 사람들은 한껏 뽐낸단다. 5년이 지나도 어깨에 채찍을 맞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진단다.
카메라가 도착했다. 수입세로 카메라값인 300달러를 내란다. 저자는 수입한 것이 없고 출국할 때 가지고 갈 것이다. 말을 해도 증거가 없으니 돈을 내든지 물건을 여기다 두라! 요구한다. 세관원에게 당신의 상관을 만나겠다 하니 상관은 70달러를 내란다. 저자는 단 1달러도 당신한테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물건을 파리로 보내겠다고 하니 3천 리알을 내란다. 이 돈은 3프랑이다. 저자는 받아들이고 서류에 서명하려고 보니, 이 서류는 다른 소포의 서류였단다. 소포를 받는데, 한 세기가 걸린 느낌이라고 저자는 소감을 필역 한다. 불과 20여 년 전의 이라크의 관세사무소 풍경이다.
사막을 낙타로 횡단하는 구상을 포기했다. 낙타는 사막을 걸어갈 놈을 구하기 힘들고 그냥 육식의 고기용은 구할 수 있는가 보다. 그리고 목적지에 겨울이 오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사막을 빨리 통과하는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에 사막은 자동차를 이용하기로 한 모양이다.
2022.06.06.
나는 걷는다. 02편
머나먼 사마르 칸트
베르나로 올리비에
효형출판 간행
첫댓글
이란 구경
잘 했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이군요.
고행도 즐거움이 같이하면 여행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