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공군대전략 >
영화 <공군 대전략>은 원제 'Battle of Britain'에서 알 수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간의 공중전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전쟁 초기 영국군의 덩케르크 철수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전력 면에서 독일군에 열세에 있었던 당시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면서 본토 방어에 임하는 영국 공군의 감투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오른편 사진
영국 본토를 폭격하고 있는 독일 공군기와 전투기를 향하여 뛰어가고 있는 영국 조종사들
원래 제목은 <Battle of Britain>, 그러니까 <영국 전투> 혹은 풀어 써서 <영국 본토항공전>이 맞을 텐데 <공군대전략>이란 제목이 조금은 생뚱맞기도 하다. 007 시리즈를 네 편이나 만든, 파리에서 영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가이 해밀턴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영국 영화의 자부심으로 평가받았다. 영국 출신의 유명 스타들과 독일의 유명배우들이 총출동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스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줄루>, <입크립스 파일>로 명성을 날린 마이클 케인, 이밖에 로버트 쇼·크리스토퍼 플러머·트레버 하워드·스잔나 요크와 같은 영국의 기라성 같은 인기배우들과 <상과 하>에서 나온 쿨트 율겐스와 같은 독일의 저명한 배우들도 참여하여 명작을 만들었다.
* 오른편 사진 : 출격 준비 중인 독일 매서슈미트
영화는 1941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3개월간에 걸친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격과 여기에 대처하는 영국 공군의 결사적인 저항을 담고 있다. 영화는 별도의 주인공을 두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기보다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진행해 나가는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이러한 다중 캐릭터를 활용한 다큐멘터리적 제작방식은 6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방식이었다. <사상최대의 작전>·<머나먼 다리>·<도라! 도라! 도라!>·<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등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 촬영 팀은 영국에 보존되어 있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공군에서 보관하고 있던 독일 전투기 매서슈미트와 폭격기 하인켈, 그리고 슈투카 폭격기 등을 빌리거나 구매하기도 했다. 전투 장면 대부분을 실제 비행기에서 공포탄을 쏘면서 촬영하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중전을 묘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전투기종인 *스핏파이어와 매서슈미트를 공중에 쌩쌩 날리면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 스핏파이어와 매서슈미트( 사진 아래쪽은 스핏파이어, 위쪽은 매서슈미트)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독일의 매서슈미트는 당시 양국이 자랑하는 최고 수준의 전투기였다. 선회 능력에서는 스핏파이어가, 급강하 능력에서는 매서슈미트가 조금 앞서기는 했지만 화력과 기동력 등 전반적으로는 막상막하였다. 결국 승패는 전적으로 조종사들의 능력에 의해 갈렸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였던 아돌프 갈란트를 비롯한 독일, 영국 쌍방의 에이스들이 자문을 맡아 당시 영국과 독일 공군이 구사했던 전술을 치밀하게 재현했다. 특히 영국 전투기 사령부를 지휘하는 휴 다우딩이나 독일 공군을 지휘하는 헤르만 괴링의 캐릭터와 양군 공군 지휘부의 전술과 세세한 움직임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호평이 잇따랐다.
* 오른쪽 사진, 이륙 준비중인 스핏파이어
간략한 줄거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후인 1940년 6월, 마침내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한다. 히틀러는 영국이 독일의 유럽의 지배권을 받아들인다면 영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며 휴전을 제의한다. 그러나 처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본토 공방전'이 시작됐음을 국민에게 알린다. 다행히 영국은 독일군이 갖지 못한 레이더와 650대의 전투기를 갖추고 전쟁을 대비했다.
드디어 영국공군력 괴멸작전 개시일인 ‘독수리의 날’에 독일 공군은 영국 남부의 주요공군 기지에 무차별 타격을 가한다. 그러나 레이더의 도움과 다우딩 사령관의 치밀한 방어 전략이 의외로 성과를 내면서 독일의 파상적인 공격은 멈칫한다.
하지만 '다우딩의 병아리들'이라고 불리는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의 숫자가 달랑달랑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다. 독일군 폭격기 한 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린다. 처칠은 베를린 폭격 명령을 내리고 이에 뿔이 잔뜩 난 히틀러는 공격력을 런던으로 집중시킨다. 그 덕분에 한 숨을 돌린 영국 공군은 1940년 9월 15일, 전 전력을 동원하여 런던을 공격하는 독일 공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다. 히틀러는 마침내 영국본토 상륙계획을 무기한 연기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나자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 영국을 구한 다우딩 대장 >
영국 본토 항공전은 전투기 사령부의 지휘관인 다우딩이 아니었으면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는 까다롭고 고집스럽기가 말도 못했다. 일단 인상부터가 꼬장꼬장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자기가 믿는 것에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사전에는 적당이라는 말과 타협이란 말은 있을 수 없었다. (사진, 다우딩 대장)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애증을 실어서 붙여준 별명이 꼰대 영감이었다. 1930년대 영국 공군의 상층부를 지배했던 *폭격기 무적론(無敵論)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 그는 모두들 나 몰라라 하는 전투기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여 상관인 공군참모총장 뉴월 원수에게 전투기 사령부 조직을 강력히 건의, 초대 사령관에 취임하게 된다.
* 폭격기 무적론(無敵論)
폭격기 무적론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각국의 공군 전략의 대세를 이루던 이론이었다. 폭격기 만능주의라고도 부르며 결국 착각으로 결론이 난 이론이다. 요약하면 고공으로 날아가는 폭격기들은 찾지 못할뿐더러 설사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요격기들은 요격고도로 올라오지 못한다. 꾸역꾸역 올라오더라도 폭격기에 기관총을 다수 탑재하고 떼로 몰려다니면서 쏘아대면 요격기는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근거하여 전투기 무용론까지 등장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대활약한 전투기 허리케인과 명품 스핏파이어 개발을 지시한 것도 그였다. 오죽했으면 독일 공군의 에이스였던 갈란트는 공군원수 궤링의 면전에서 우리에게도 스핏파이어가 필요하다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또한 영국 전역에 레이더 기지를 촘촘하게 설치하면서 영국의 방공망을 완벽하게 만들어놓았다.(사진, 애기로 뛰어가고 있는 다우딩의 병아리들)
당시 사람들은 막 개발된 레이더의 가치에 대하여 반신반의했다. 심지어 적외선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하는 의견도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고집으로 유럽대륙 쪽을 향한 영국 해안가에 레이더들을 빼곡하게 세우고야 말았다.
그리고 중앙 통제실을 구축하여 효과적으로 전투상황을 통제했다. 당시 공중전의 경우 지상에서 브리핑을 받은 후에는 공중에서의 전투는 조종사들이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그걸 다우딩이 악착같이 상부에 대들어서 중앙 통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사진, 전투기로 뛰어가고 있는 다우딩의 병아리들, 최고의 기록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레이더 기지에서 적기를 파악한 다음 중앙 통제실에서 실시간으로 적기 현황을 파악한 다음, 통신으로 각 전투 비행단에게 작전을 지시해서 조종사들이 실전에 임한다는 효율적인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1940년 5월 독일군의 전격전에 휘말려 꽁지 빠지게 쫓기던 프랑스는 다급하게 처칠 수상에게 항공기 추가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우딩은 "이미 끝장이 나서 별 볼일 없는 프랑스에 전투기를 보낸다면 결국 우리의 하늘을 지킬 전투기가 바닥날 겁니다."라고 답변을 하면서 완강하게 영국 전투기들을 지켜냈다. 물론 처칠의 심사가 편할 리는 없었다.또한 의회에서 예산을 이유로 전투기 조종석에 방호판을 도입하지 않으려하자 "시카고의 갱단들조차도 자기네 차에 방탄유리를 설치하는 마당에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돈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방호판을 못 가진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하고 강하게 들이 받으면서 전투기에 방호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부하들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사진, 히틀러와 괴링)
윗사람들에게는 까다롭고 성가신 인물이었지만 부하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받았다. 결국 최고 성능의 전투기 도입, 레이다 기지 설치, 중앙 통제실 운영 등 그의 여러 선견지명은 제대로 들어맞아서 영국 공군은 수적, 질적 우위에 있던 독일 공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끝끝내 막아냈다. 결국 독일군의 숙원이었던 영국 침공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다우딩은 이렇게 영국 본토 항공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워낙 고집스럽고 고분고분하지 못한 성격으로 당시 영국 공군 상층부 사람들과 번번이 부딪치며 비위를 건드렸다. 결국 본토 항공전이 일단 한숨을 돌리자 한직으로 좌천당했고 별다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퇴역했다.(사진, 독일의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
* 헤르만 괴링
히틀러의 딸랑이이자 알랑쇠였던 괴링은 공군 원수이자 제국 원수라는 직함을 갖고 나치 2인자로 거들먹거렸다. 전쟁 중반기부터 허풍과 여러번 삽질(공군 작전 실패) 등으로 히틀러의 눈밖에 났다. 전쟁이 끝난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음독 자살을 헸다.
1942년 여름, 다우딩이 제대할 때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원수의 계급으로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볼멘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공군의 전통으로는 공군 참모총장을 지내지 못한 사람은 원수가 될 수가 없었다. 대신 처칠의 천거로 벤틀리 프라이어리 남작 작위를 받았고 왕이 직접 수여하는 빅토리아 대십자 훈장도 받았다.
그는 말년에 심령술에 흠뻑 빠져 지냈고 재혼한 부인과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1970년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사진, 불타는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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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블라디고님~~!!!
본인이 즐겁게 보았던 영화<공군대전략> 머리 속에 다시 스치고,
줄거리에 "다우딩"대장, "헤르만 괴링"에 관한 내용을 감격적으로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트 전폭기 팬텀기를 몰던 유장군이 프로펠러 비행기들이 나오는 이 영화를 어떻게 감상했을지가 우리들
문외한들은 도저히 상상이...ㅎㅎㅎ 2차 대전 당시 공중전도 당사자들인 파일로트들은 장난이 아니었다는 데
오늘날에는? 그 속도감이...건승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