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십자가
성경 말씀: 창세기 2:4-17; 마가복음 15:33-41
요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십자가의 전반적 내용은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어 세상에서부터 사라진 것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세상에 하나님 함께의 이루어짐으로 서사합니다. 십자가로 하나님의 함께는 구체적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 뜻의 이루어짐으로 서사합니다. 즉 십자가는 하나님의 함께가 세상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입니다.
이루어짐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체제를 위협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죽이기 위한 형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틀이었으니, 복음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개입된 사람들의 의도를 소상히 서사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십자가를 종탑 꼭대기에 세워 교회임을 보입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십자가는 지금 십자가상 예수님의 죽음의 상징적 뜻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루어지려면, 역사적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지금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서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서는 십자가상 죽음을 포함한 예수님의 생애 이야기를 담고 있고, 지금도 교회의 뜻의 근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분의 공중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그분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도 복음 선포의 시각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세상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함께의 좋은 소식의 알림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로 파급됩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알려지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함께가 미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일환입니다. 즉 예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로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예수님의 고침과 같이 사람들로 하나님의 함께를 알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고침의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함께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살면서 말해지는 보통 하나님의 함께에 담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침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모두에 의해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함께는 통상적으로 가늠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세상에 삶으로 하나님의 함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유대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세상 삶으로 만 하나님의 함께에 담아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유대인들이 생각해 온 하나님의 함께에 담아지게 되지 않는 새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구약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함께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함께는 새롭게 서사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신약이 새롭게 서사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구약의 연속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함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옛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의 열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새 언약으로 보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에 결정되는 것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함께의 새 언약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언약으로나 역사적 시각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는 이들은 정리된 대로 탄생보다 십자가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서사된 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것을 신화적 시작으로 혼동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체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만큼 실제성을 지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는 시각은 역사적 시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세상에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닌 예수님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의 시각으로 보아지게 됩니다. 새 언약의 시각이 정착되면, 복음서에 예수님의 서사는 사실적이나 신화적으로 읽어지게 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사실에 머물거나 신화적 상상으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언약의 시각으로 보아지게 이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사람들의 음모, 배신, 오류, 그리고 판단의 결과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새 언약을 결합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가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말함으로 새 언약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죄 사함을 통해, 새 언약의 백성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한 어려운 관문으로 여겨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관문은 수련을 통한 향상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향상을 위함이 아닙니다. 끝과 새로움을 보입니다. 연속이 아닌 불연속입니다. 나아짐은 십자가로 말해지게 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해지지만, 옛 언약으로 이어지게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는 기본 시각의 형성으로 이끕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새 언약의 시각에서 말해짐으로 서사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야기가 새 언약에 드러납니다.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은 홀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처형되었음으로, 자신의 홀로 삶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서술하지 않고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서사합니다.
죄 사함의 십자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많은 이들을 위한 죄 사함을 위합니다. 죄 사함은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질 내용이 아닙니다. 죄나 죄 사함은 부수적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 함께의 새 언약으로 주어지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니, 죄 사함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사함을 위해서입니다.
죄 사함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알려지고 파급되게 됩니다. 사람은, 타락됨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은 삶이 죄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이 하나님의 함께의 시각에서 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에서 하나님과 함께함이 죄 사함입니다.
여기서 죄의 뜻은 새 언약으로 주어집니다. 옛 언약에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야기되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 함께의 좋은 소식이 예수님으로 선포됨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사해짐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옛 언약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사함을 위한 하나님 뜻의 이루어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옛 언약을 따라 예수님의 죄를 십자가상에 정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상 예수님으로 죄를 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처벌의 십자가가 아닌 새 언약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십자가를 건물에 세웁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처벌의 십자가가 아닌 새 언약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로 말해지면, 십자가는 형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름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을 따름이 새 언약의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 자신의 죄 사함으로 누려질 수 없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십자가로만 자신의 죄 사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로 길은 어렵지 않고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름은 죄 사함으로 하나님과 함께함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름은 새 언약의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을 따름은 십자가를 떠나 온전히 말해질 수 없습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아닌 새 언약의 십자가로 보아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새 언약의 삶의 고난입니다. 그것은 세상 삶이나 옛 언약의 삶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 세상 삶이나 옛 언약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배척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쁜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상으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로 말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뜻의 이루어짐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아버지 뜻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버지 뜻으로 믿는 믿음이게 하옵소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함으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는 삶으로 인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타락된 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로 인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