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언
성경 말씀: 에스겔 47:1-12; 요한복음 20:11-18
요약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으로부터 접근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가능한 현상으로 접근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있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지 않습니다. 즉 사람이 부활의 형태로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으로부터 보는 시각을 차단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시각을 하나님 함께의 시각으로 이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님 함께를 보게 됩니다.
부활의 시각
사람들은 세상에 사니, 무엇이든 세상에 두어지는 내용으로 보거나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그들은 부활도 세상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사신 분이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세상에 일어났는지 설명하려 합니다.
모든 것을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무엇이든 세상에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려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존재론은 세상의 근거에서 이해하는 기본 체계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근거함으로, 하나님도 존재로 다룹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실현하는 것은 문화이니, 문화의 기본은 존재론입니다. 즉 문화는 세상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화는 세상에 세워지는 것의 연장으로 상상되기 때문에, 또한 문화의 소산입니다. 물론 종교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상상하거나 명상하는 것은 문화적 소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함께로 서사된 책입니다. 즉 언약으로 서사된 책입니다. 성경의 기본은 하나님의 함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도 하나님의 함께로 말해집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세상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언약의 기반은 하나님의 함께입니다. 세상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하나님 함께의 기반에서 서사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함께의 기반에서 서사된 언약의 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시각이 아닌 언약의 시각에서 보아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가능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소생했다면, 가능성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 사람이 소생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우선 세상에서 그것을 서사할 적절한 언어가 없습니다. 소생의 현상은 말해지더라도, 부활의 현상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언어에 의해 서사될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두어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언약에서 뜻있게 서사됩니다. 언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말해집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예수님]을 살리신지라(행 13:30).”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일어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 같이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새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한됩니다. 새 언약의 삶도 죽음까지 지속합니다. 죽음이 삶의 끝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함께로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밖에 말해질 수 없습니다. 창조된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창조된 세상은 죽음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으로만 서사됩니다. 따라서 언약을 떠나 예수님의 부활을 서사할 언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언약으로 서사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언약으로만 서사되면, 예수님의 전반적 삶도 언약으로만 서사됩니다. 따라서 복음, 곧 예수님의 이야기는 복음은 새 언약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삶이나 새 언약의 삶은 죽음의 끝까지 계속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도 죽음에 종속되게 됩니다. 그러면 죽음에 의한 조건은 옛 언약에 보이듯 언약의 삶에 반영됩니다.
옛 언약은 죽음에 직면됩니다. 즉 죽음의 조건에 직면됩니다. 따라서 옛 언약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날 수 없습니다. 즉 옛 언약의 내용은 죽음의 조건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옛 언약은 제한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극복하는 내용이 새 언약에 반영됩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삶은 죽음에 종속된 조건적 삶이 아닌 죽음을 극복하는 삶입니다. 새 언약의 삶은 죽음의 조건에 직면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조건을 극복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니, 세상에 어떤 조건도 극복합니다. 세상의 모든 조건은 죽음의 위협에 의해 야기됩니다.
새 언약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으로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극복함으로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구체적 보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 기술만 있습니다. 이 증언 기술로만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현상으로 명시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부활의 속성이 말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의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활의 속성은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담아지게 되지 않는 속성은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말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언약 삶은 죽음을 극복하는 삶으로 서사됩니다. 세상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를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언약의 삶은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막아질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의해서도 막아지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의 부활로 길은 죽음에 의해 막아질 수 없는 새 언약의 삶을 보입니다. 새 언약의 삶은 세상에 조건적이 아닌 하나님 함께의 드러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세상에 직면된 조건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태어난 후 그들이 직면된 조건성을 따라 삽니다. 태어난 수명은 조건으로 따라 흘러갑니다. 그들이 조건에 순응하든 조건을 개조하던 다름이 없습니다. 태어난 수명은 죽음에까지 조건적으로 연장됩니다.
부활의 믿음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은 육체적 생명으로 말해지지 않고 영적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그렇게 요한복음에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보아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은 태어난 수명과 같이 서술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은 죽음에 속박된 태어난 수명 같이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상태로 말해질 수 없지만, 그것을 보는 시각은 형성되게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시각에서 예수님에 대해 써졌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서사된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극복합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을 보는 시각에서 써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복음서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셨느냐는 질문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을 세상에 산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부활될 수 있는지 질문함과 같습니다. 복음서는 가능성으로 서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직접 예수님을 하나님의 함께로 보아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외에 예수님의 부활에 쓰이게 되는 다른 말은 없습니다. 어떤 다른 말도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으니, 예수님이 부활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함께를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새 언약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전기처럼 읽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함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읽어질 수 없습니다. 부활은 사람의 전기에 담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제기된 하나님의 함께는 예수님의 부활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담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함께는 분명히 읽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 함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옛 언약에 담아질 수 없습니다. 옛 언약으로 하나님의 함께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조건적인 삶을 산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에 축복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말했습니다. 세상 상황에 처해 산 그들은 그들의 나은 삶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나 출애굽의 하나님 구출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으셨던 그분 함께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함께 없이 세상에 보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침은 기적으로 말해질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아예 보아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이 빠져지면 종교적으로 읽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넣어지면, 종교적으로 읽어질 수 없습니다. 새 언약으로만 읽어집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함께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부활의 예수님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말을 하게 하옵소서.
세상에 갇힌 예수님으로 설명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따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름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부활로 보다 부활의 예수님을 말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아버지의 예수님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독생자로 말하게 하옵소서.
비록 저희 발걸음이 세상에 머물지만,
아버지의 영에 의해 부활의 소망으로 인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