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하권은 유다 왕국의 멸망의 이유와 유배의 현장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짓(1열왕 24,9)’을 한 결과 바빌론 임금에게 포위 당하고, 결국에는 주님의 집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은 물론이고 가난한 이들 말고는 모든 백성이 바빌론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가고 맙니다.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마태 7,27)’ 그와 같이 ‘반석과 모래 위’라는 다른 바탕은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반석 위에서 살았던 때의 삶과는 정반대로 기고만장해져 모든 것에 있어 하느님 대신 자신이 드높아졌을 때의 삶은 처절하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외적으로는 예언도 하고 마귀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 바탕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때 언제든 어디서든 결과는 달라지고 맙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게 할 수는 있어도 하느님께 이르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중에도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고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진실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제의 복음과 같이 그 열매가 그 결과가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풍요와 안정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교회의 바탕에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마음과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불법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라는 반석을 치우고, 언제든지 크고 작은 시련과 위협에도 무너지고 마는 모래를 그 자리에 채우고 있습니다. 그 위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하고 좋은 것을 이루어도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위기와 침체를 겪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간직하기 보다는 지금 교회와 우리 자신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입술로 부르고 명찰로 걸어 놓을 ‘주님’이 아니라 마음과 삶을 다해 따를 ‘주님’을 모시는 일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