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중구(中區) - 부산이 처음 1951년 구제 실시로 출장소가 설치될 때 부산의 중심부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중부출장소라 하였던 데서 비롯됩니다. 중앙동, 영주동, 동광동, 대청동, 광복동, 보수동, 부평동, 남포동, 대창동 등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이 가장 좁지만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지하상가, 수출입 화물선, 국내외 여객선이 드나들고 있다. 앞으로 구 시청청사 자리에 롯데월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1) 광복동(光復洞) - 광복이후 동명을 바꿀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그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2) 남포동(南浦洞) - 일제시대때는 남빈정(南濱町)으로 불리다가 광복 이후 1947년 우리식의 한자 '남포'로 바뀌었습니다. '남포'는 영도다리부터 보수천 하구를 지나 부산공동어시장에 이르는 남항의 해안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곳을 자갈치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자갈치'는 해안이 매립되기 전에 수려한 자갈해안이었기 때문에 '자갈'+'치(언덕빼기)'의 의미라고 합니다.
3) 대청동(大廳洞) - 동래부사나 부산첨사가 일본사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던 곳을 연향대청이라고 불렀는데 그 지명을 일제시대부터 대청정으로 부르다가 광복 이후에 대청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4) 동광동(東光洞) - 초량왜관 시대때 동관이 위치해 있던 곳이라 동관동이라 불리워지려다 발음상의 어려움과 광복동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동광동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5) 보수동(寶水洞) - 원래 법수천이라 부르던 것을 근대 개항이후 불교식 이름 법(法)대신 보(寶)로 고쳐 보수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6) 부평동(富平洞) - 부(富)는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같은 뜻에서 사용한 것이며, 평(平)은 '터'란 뜻으로 일제시대에는 부평정(町-일제식 동네이름이죠!)이라고 불렀으며 광복이후 부평동이라 부르게 됩니다.
7) 신창동(新昌洞) - 초량왜관시절 동관과 서관으로 조선정부는 나뉘었는데 동관은 광복동과 동광동이고, 서관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입니다. 처음엔 서정(西町)이라 부르다가 신창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8) 영주동(瀛州洞) - 옛 이름은 임소라 하였습니다. 영선고개에서 영주산을 바라보면 경관이 좋아서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빗대다가 영주란 마을 이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9) 중앙동(中央洞) - 광복이후 부산역을 가진 중앙부에 위치하여 있다는 뜻에서 1947년 동명개정 때 중앙동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0) 창선동(昌善洞) -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존속하다가 1884년 부산전신국을 개설하여 업무를 처음 시작한 곳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인 철수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돗떼기 시장, 깡통시장이라 불리웠던 국제시장이 생겨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곳입니다.
2. 서구(西區) - 구 부산시청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7년 서구로 발족합니다. 동대신동, 서대신동, 부용동, 부민동, 토성동, 아미동, 초장동, 충무동, 남부민동, 암남동 등이 있습니다.
1) 남부민동(南富民洞) - 부민동에 속해 있다가 남부민동으로 분리하여 나온 동네입니다.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터를 만들었는데 부민동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부민동이라고 바뀌었습니다.
2) 동대신동(東大新洞) - 일본인이 1914년 대거 밀려왔을 떄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고 불렀는데 '한'은 큰길(大)을, '새'는 새로운(新), 벌은 넓은 땅(洞)으로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부민동(富民洞) - 보수천하구를 부민포라고 불렀는데, 부산부곡의 사람들이 쓰던 포구라는 뜻에서 부민(富民)이란 명칭을 썼다는 어원도 있고, 천석군이 살고 있었기에 부민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4) 부용동(芙蓉洞) - 부용화(연꽃?)가 많이 피어 있어서 부용동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서대신동(西大新洞) - 대신정이란 일제시대 지명을 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하다가 일제식 명칭만 바꿔서 서대신동과 동대신동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6) 아미동(峨嵋洞) - 아미동 뒷산을 아미산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합니다.
7) 암남동(岩南洞) - 아미골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유래된 설이 있습니다.
8) 초장동(草場洞) - 인근 천마산이 초원이 좋아서 용마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따라 이곳 일대가 초원이라고 해서 초장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초원의 장(場)인 초장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9) 충무동(忠武洞) - 충무김밥과는 상관이 없고(^^;), 예전에 로터리가 생기기 전에 충무동 광장이 부산에서 가장 넓은 곳이어서 집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1947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고, 광복 이후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서 소화정이라 불리웠던 이름을 일본을 무찔렀던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딴 이름으로 바꾼 것입니다.
10) 토성동(土城洞) - 수금지화목토천해명... 그 토성이 아니고 흙으로 만든 토성이 있었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입니다. 반월성이라는 축조양식을 띤 토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부산여고, 토성초등학교 등의 건물이 세워지면서 흔적은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3. 동구(東區) - 구 부산시청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동구라 하였고, 초량동, 수정동, 좌천동, 범일동이 있습니다. 범일동은 1~6동까지 있는데 범일 3동은 없고, 좌천동은 좌천 1동과 4동만 있다. 초량동 역시 1~6동까지 있는데 초량 5동은 없습니다. 우편번호를 찾아보면 재미난 사실들이 가끔 있습니다. @^^@
1) 범일동(凡一洞) - 예전엔 이곳에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삼림이 울창했는데 그 곳에 계곡의 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범천(凡川 : 범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부산 지하철 역 이름 중에도 범내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곳 냇가에 범이 한번씩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천석교비(虎川石橋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참고로 자성대(子城臺)도 범일동에 속해 있습니다.
2) 수정동(水晶洞) - 원래 두모포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리적으로 황토가 적고 지면에 모래가 많아서 비가 와도 신발에 물이 묻지 않았으며, 이곳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 수정동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예전에 수정동에 성이 있었는데 그 일대를 파면 크고 작은 수정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수정산이라 불렀고, 그 산아래 마을 이름도 그래서 수정동이라 칭했다고도 합니다. 오늘부터 저도 수정을 캐러 수정동에 출근부 도장이라도...OTL
3) 좌천동(佐川洞) - 좌자천(佐自川)이라는 이름의 약칭이라고 합니다. 수정동 중앙을 거쳐 부산진 동쪽을 돌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좌자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물이 깊지 않고 잦은 물이라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좌성(佐城)이란 곳의 하구에 있는 마을이라 좌천동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4) 초량동(草梁洞) - 초원지대인 풀언덕을 샛디라는 의미에서 초량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량이란 이름을 쓰는 곳이 같은 고을에 둘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서 동래부사 정현덕은 신초량은 초량이라 불렀고, 구초량은 부민동이라고 하게 했다고 합니다. 부산의 지형이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이라 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이란 명칭이 생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4. 동래구(東萊區) - 동래 정씨 일족이 고려시대때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동래 온천도 유명하였고,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동래읍성도 개축되었습니다. 1957년 동래구로 편제되었다가 행정동이 증가함에 따라 1980년에는 금정구가 분리되어 나갔고, 1995년 연제구로 연산동과 거제동이 분구가 되어 나갔습니다. 낙민동, 명장동, 명륜동, 복천동, 수안동, 사직동, 안락동, 온천동, 칠산동 등이 있습니다.
1) 칠산동(漆山洞) - 삼국시대때 동래지역이 거칠산국이 있었습니다. 거칠산이란 뜻은 '거칠다'의 순우리말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황령산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동래읍성의 뒷산을 칠산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거기서 이름이 유래한 것 같습니다.
2) 온천동(溫泉洞) - 신라시대때부터 온천이 자연 용출한 것으로 봅니다. 본격적으로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온천 위락시설이 갖춰지게 되고 온천동으로 독립이 됩니다. 온천장의 산저리와 장전리의 일부를 합하여 온천리라고 명명했고 미남정과 산저정(차밭골)도 온천동에 포함됩니다.
3) 안락동(安樂洞) - 충렬사가 있고, 개인적으로 얼마전까지 살던 동네입니다.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등을 배우자라는 뜻에서 소줄당과 동, 서재가 지어지면서 서원으로 발전합니다. 안락서원을 정화하여 충렬사를 성역화하여 임진왜란 당시 75위의 충혼을 모신 유서 깊은 곳이 충렬사입니다. 1942년 서원의 명칭인 안락을 따서 안락정이 되었다가 안락동이 됩니다.
4) 사직동(社稷洞) - 17세기부터 동래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입니다. 사(社)는 토신의 의미이고 직(稷)은 곡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임금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던 곳입니다. 일제시대때 일체의 제사를 금하여 완전히 허물어졌다가 해방 이후 동래향교의 장의였던 박연주님의 발의로 사직동이란 명칭이 다시 사용됩니다. 아직도 풍년을 기원하던 풍습이 남아 있어 주산당과 산신당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제상을 차리고 평화와 행운을 기원합니다.
5) 복천동(福泉洞) - 동래읍성 안에 우물이 6개가 있었는데 이것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옛날에는 생각했고, 옥샘의 물 맛이 아주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기에 복천동이라고 붙여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복천동 고분군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6) 수안동(壽安洞) -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있던 곳이라 동래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안(首安, 水安)이란 뜻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땅밑을 파내려가면 물이 쉽게 나와서, 동래읍성 수문이 있어서 수문안의 동네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목숨 壽를 사용했을까요?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
7) 명륜동(明倫洞) - 신향교동이라 하다가 1906년 신향교동, 객달동, 범어동의 3개 마을을 합하여 교동이 되었다가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정이라 부르다가 해방 후 명륜동이라 불리워지게 됩니다. 동래향교, 동래초등학교, 명륜초등학교 등 학교와 동래세무서, 동래전신전화국, 동래우체국, 동래보건소 등과 지하철 역, 산업도로 등 동래구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8) 낙민동(樂民洞) - 조선시대 때 남문 동변동이라 불리웠는데 동래부 수령이 민심을 살피러 나가면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고 해서 낙민동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 좀 배우셔야되지 않을까요? 미나리꽝과 연밭이 1960년대만 해도 많았는데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주택가가 형성되어서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9) 명장동(鳴藏洞) - 명편(鳴鞭)이라는 소리 기구가 있었는데 동래부사가 지휘할 때 이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하는 명편을 이곳에 간수하게 했다고 해서 명장이라고 전해집니다. 옥봉산 산자락에 둘러 쌓여 있는 곳입니다.
5. 영도구(影島區) - 절영도(絶影島)란 이름을 꼭 알아야 합니다. 말이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인데 명마의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한말 개항기까지도 많은 주민이 살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남항동, 대교동, 대평동, 동삼동, 봉래동, 신선동, 영선동, 청학동 등이 있습니다.
1) 청학동(靑鶴洞) - 선사시대 패총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한말 당시 6호의 가구가 살았다고 하는데 숲이 청청하고 해운대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학이 남쪽으로 날아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청학동이란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학동이라 부르기 전에는 조내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바닷가가 낮고 개펄이 많이 썰물 때 물이 고여있는 곳이 많아서,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처음 이곳에서 재배하여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해서 조내기라고 했다는데 알아서 생각하시길...^^
2) 남항동(南港洞) - 옛 이름은 석말추(石末湫)였다고 합니다. 큰 돌이 앞바다에 있었는데 썰물 때는 돌끝이 보였다가 밀물 때는 안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 라는 의미의 영계(瀛溪)로 바뀌었다가 1934년 영도대교 개통시 바다를 매립한 뒤에 석견정(汐見町 - 썰물을 본다)으로 불리다가 광복이후 부산의 남항을 끼고 있다고 해서 남항동으로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해방 당시만 해도 대부분 옥수수밭이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영도의 중심 상가지대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3) 대교동(大橋洞) - 영도는 신석기시대때에는 사람들의 주거지였지만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적의 침범이 자주 있다보니 주민들이 섬을 버리게 된거죠. 1881년 절영도진이 세워지면서 주민의 수가 증가하고 북빈정(북쪽 바닷가의 마을?)이라 불려지다가 영도대교 개통이후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통(大橋通 - 일제식 이름이죠!) 이라 부르다가 광복이후 대교동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대평동(大平洞) - 원래 풍발포라 불렀습니다.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의 지세라는 뜻의 이름이었는데 일제시대 영도의 서북쪽을 매립하여 갑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매립이전에는 대평동을 정박지로 삼아 대풍포를 중심으로 많은 선박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절영도란 이름이 이 때부터 알려졌다고 합니다.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영도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남포동 사이를 운항했던 나루터가 있었던 곳입니다.
5) 동삼동(東三洞) - 상, 중, 하리의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세 마을이 영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삼동이란 이름이 얻어지게 됩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조개무지가 있어서 그 때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슴을 알 수 있습니다. 1931년 동산정이라고 일제시대 때 부르다가 1947년 광복이후 동삼동으로 부르게 됩니다.
6) 봉래동(蓬萊洞) - 임익준 절영도 첨사가 영도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고쳐 지을 때 이 곳에 신선이 산다고 해서 산 이름을 봉래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봉래산의 주맥이 닿는 곳이라고 하여 봉래동이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봉래동과 청학동 사이에는 아리랑 고개가 있었는데 산복도로 개설되기 전까지는 유일한 통로였던 고갯길이었습니다.
7) 신선동(新仙洞) - 영도의 수호신을 모셨던 산제당, 하씨당이라는 당집이 있어서 봄, 가을 두 번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요즘도 지내고 있습니다. 1885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지명을 정할 때 당의 주인이 여신선인 까닭에 새로운 신선이 산다는 뜻으로 신선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산수정이라고 일제시대때 불리우다가 1947년 신선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봉래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고 수목이 높은 지대라 선인이 살았다고 전하는 선경의 지대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 당장 신선동으로 이사를 가야겠습니다. -.-^
8) 영선동(瀛仙洞) - 옛 이름은 나릿가, 용미산 아래에서 영도로 향하는 배를 타면 닫는 나루가 여기라서 나릿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임익준(또 그 분이군요 -.-^)이 삼신산의 하나로 동해에 있는 전설상의 섬인 영주의 이름을 따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기슭이라는 뜻에서 영선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1925년에는 일본 쪽을 바라보기 좋다고 해서 어영정이라고 부르다가 영선동이란 이름을 광복이후 되찾게 됩니다.
6. 부산진구(釜山鎭區) - 부산진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야동, 개금동, 당감동, 범전동, 범천동, 부암동, 부전동, 양정동, 연지동, 전포동, 초읍동 등이 포함됩니다.
1) 당감동(堂甘洞) - 당리와 감물리라는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당감리라고 불렀는데, 당산나무란 고사목을 중심으로 북쪽은 당리(마을의 오래된 당집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함)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합니다. 백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에 위치한 곳입니다.
2) 개금동(開琴洞) - 와요리라고 조선시대때 부르다가 1904년 개금리라고 칭해졌습니다.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개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피난길에 오르고 있는데 이 곳 어디선가에서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 곳이 전란의 시름을 달래가면서 살 곳이라고 생각하고 정착을 하게 되어 거문고 때문에 눌러 앉았다는 의미의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3) 가야동(伽倻洞) -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정동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를 했기에 교통의 요충지였답니다. 가야리란 명칭은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4) 범전동(凡田洞) - 사직동의 금용산에서 발원하는 범천(凡川, 虎川)의 가장자리인 평지로서 논이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조개무지(패총)의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5) 범천동(凡川洞) - 자성대를 두고 흐르는 강을 동천이라고 합니다. 부산진성의 지성인 자성대 쪽에서 볼 때 성의 동편으로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호천(虎川)이라고도 표기했는데 범내골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을 지칭하는 동명입니다.
6) 부암동(釜岩洞) -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암(岩)자가 붙여진 것입니다.
7) 부전동(釜田洞) - 감물내의 동쪽 둥 전포, 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암고개에 바위가 있었는데 마치 가마곹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현(가마고개)이란 지명이 붙여졌습니다. 부현고개 아래의 범전리와 전포리가 인접하는 곳을 부전이라고 붙였습니다.
8) 양정동(楊亭洞) - 일대에 수양버들의 실같은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보고 버들가지 양정동이라 불리워지게 된 것 같습니다. 또는 양지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9) 연지동(蓮池洞) - 신지언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 곳에 연못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초읍동에 화지언이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오래된 옛 못이 있었기에 신지언이라고 부르다가 연지동과 초읍동을 성지동으로 통합했다가 1963년 성지동을 다시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10) 전포동(田浦洞) - 서면의 동천은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흐릅니다. 바다가 홍수때마다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토사를 실어 육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메워진 곳이 갯가가 되고 논밭이 되어 갔답니다. 갯가의 밭이란 의미로 전포리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조수가 들어올 때는 배가 많이 정박했다고 하니 '바다가 육지라면~~' 이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11) 초읍동(草邑洞) - '새뛰'라고 불려졌는데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란 의미이다. 왜구들의 침범으로 동평현이 피폐되자 새로운 천연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초읍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또한, 풍수지리 차원에서 읍의 치소(治所)를 물색하다가 먼저 초한 곳이란 뜻에서 초읍이라고 불려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유래가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는데 의외로 부산의 역사와 문화가 너무 방대해서 1편과 2편으로 나눠서 적고자 합니다. 2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