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신4:1>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119:9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12,17>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4>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1,12>
성경은 전 지면을 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흠없이 바로 선 우리의 행위(성품)이 바로 구원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을 버리고
의와 거룩과 선한행실의 표준이 되는 율법에 일치한 우리의 생애
즉 율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그 율법이 우리의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된 생애
이것을 성경은 바로 구원이라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의 참된 구원론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배제한 인지적 작용으로만 이루어진 믿음구원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서서 말씀드렸듯이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한 시각과 입장을
현대 신학이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데서 문제가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8>
사도바울이 지목한 율법의 행위란...
그리스도 없이...자신의 육적 할례의 표와 형식적인 율법지킴을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의 기초를 자신의 행위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체 끝까지 자신들의 위선과 죄를 할례나 절기라는 형식의 가면 속에 감추고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새로운 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교만과 위선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께 진실로 굴복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참된 의(생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를 받을 때에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케 됨으로
바울은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의로움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의 순종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바울도 구약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의로움 =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에 일치하는 우리의 품성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구원"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마음의 할례와 그로 인한 율법에의 진실된 굴복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율법에 순종해야하는 인간의 의무를 배제하고
그저 믿는다는 지식적인 동의로만 이루어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마음의 할례와 그로 인한 율법에의 진실된 굴복 상태"
이 상태를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구원이
율법에의 순종의 의무(행위)를 배제한 것이 아님을
사도바울의 서신서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19~21>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5:5>
사도 바울의 이러한 시각을 오늘날 신학적 틀에서 재해석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당연히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까지
행위구원으로 치부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큰 실수라 볼 수 있겠습니다.
마음의 변화로 인한 율법에의 순종없이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은 취소될 일이 없다고 가르치는
오늘날 기독교의 신학의 믿음구원은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