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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99
12월9일[대림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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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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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ksNvuBlRgE
[인천교구 안지헌 보니파시오 신부님 집전 (마니산 (준)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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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리시는 그림은 큰 그림입니다!>
예사야 예언자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은혜롭고 가슴 설레는 가르침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온통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절망과 낙담 속에 빠져있는 오늘 우리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보리라.”(이사 30, 19-20)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참혹하고 힘겨워 울고 지내는 우리에게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하시니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목숨 걸고 기도 바쳤지만,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해 상심해하고 있는 우리에게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고 하시니, 좀 더 기다리며, 더 간절히 기도해봐야겠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긴 한 것인가?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토록 혹독한 시련을 내게 허락하시는가?’며 울부짖는 우리에게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보리라.”고 하시니, 또 다시 희망을 가져봐야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관건은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계와 인간의 시계의 다름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결핍은 인내심 부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시는 그림은 큰 그림입니다. 먼저 밑그림을 그리시고, 그리고 나서 천천히 본 그림을 그리십니다.
우리 인간의 시계 바늘은 째깍째깍 바삐 돌아가지만, 하느님의 시계 바늘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돌아갑니다. 간절히 목숨 걸고 아버지께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노력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우리가 드리는 청원이 정녕 바람직한 청원인가 진지하게 헤아려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얻게 되는 큰 은총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이 수락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오고 가는 하느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만남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오늘도 혹독한 고통과 깊은 상처에 신음하시는 분들, 이사야 예언자께서 건네시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고 힘과 용기를 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을 햇빛처럼 되고, 햇빛을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든 듯하리라.”(이사 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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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BX7mac6K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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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지 않게 주는 것 안에 기쁜 소식이 어떻게 섞이겠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병자도 고쳐주고 더러운 영들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십니다. 복음은 물질적인 축복 안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밥은 안 주고 인간의 도리만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집을 뛰쳐나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듯, 복음도 물질과 영의 결합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빵 하나 전해주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있지만, 배고픈 이들에게 공부만 시키는 것은 고문에 가깝습니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담기듯 우리가 내어주는 것 안에 복음이 담깁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준다고 다 복음(기쁜 소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내어주는 것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주는 것이 나의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내어줄 때는 기쁘기보다는 아깝거나 짜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을 나의 것에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어주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고 그 안에 담기는 기쁜 소식도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내어줄 때 항상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거저 받은 것을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전에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에서 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짜증만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체벌하고 야단쳤습니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선생님을 포기할까 생각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있다고 착각하면 내가 하는 고생만큼 상대에게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보상이 따르지 않기에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준다고 생각하면 받는 사람도 짜증 나고 주는 사람도 짜증 납니다. 짜증 나는 일을 오래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영성 강의를 들으시는 분이 다시는 그 강의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강의하시는 분이 짜증을 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몇 번이고 연습해서 오는데 듣는 사람이 졸고 있으니 짜증을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나의 것’, ‘내가 고생해서 얻은 것’을 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엔 복음이 섞일 수 없습니다. 짜증과 기쁨이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어줄 때는 그래서 나의 것이 아닌 받은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깝지 않고 짜증도 나지 않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복음을 전하면서 짜증을 많이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답답해하셨고 집중이 흐트러지는 신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1시간 강의하려면 10시간 준비해야 하는데 듣는 사람들 자세가 안 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그분은 옷을 벗고 사제직을 포기하셨습니다.
기쁘게 주지 않은 것 안에 기쁜 소식이 섞일 수 없습니다. 기쁘게 주지 않으면 나도 상대도 기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사랑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쁘게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은 역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가진 능력, 수입, 시간 등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이런 신앙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 사람이 내어줄 때는 기쁜 마음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복음전파의 효과도 배가됩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한 정신으로 실천하면 기쁘게 내어주고 그러면 나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십일조를 통해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주고 싶은 마음조차 받은 것이라면 주는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놓아 홀로 자라게 한 원숭이는 남에게 무언가 줄 줄 모르게 성장합니다. 자기만 압니다.
내어줄 줄 모르니 다른 원숭이 무리에도 섞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자녀를 탄생하게 만들어도 자녀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녀가 무서워서 어미에게 달려들면 어미는 발로 차버립니다.
격리 원숭이와 대비되는 것이 ‘치료자 원숭이’, 혹은 ‘구원자 원숭이’라고 불립니다. 태어난 지 약 4개월 정도 되었고 어미로부터 사랑만 받아서 온 세상이 사랑인 줄 아는 원숭이입니다. 이 원숭이는 격리 원숭이를 쫓아다니며 기쁘게 털을 골라줍니다. 결국, 격리 원숭이도 자꾸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치료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줍니다. 그리고 무리에 적응할 수 있는 원숭이로 바뀝니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면 다 모기나 기생충처럼 남의 생명을 먹어서 자신을 생존시키려는 욕구만을 가집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오는 행복의 맛을 알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관계의 기쁨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어주고 싶은 마음과 내어주고 싶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어주는 행복과 그것을 통해 얻는 관계의 행복도 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안다면 내어주면서 짜증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담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기쁘게 주려면 그 주려는 마음까지도 거저 받은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십일조를 생활화합시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서만 기쁜 관계가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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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할 때입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사의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성냥팔이 소녀’처럼 약간은 측은한 모습으로 ‘신문팔이 소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저 자신도 측은한 생각이 들고, 어깨가 움츠려드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하나는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대사처럼 밝은 모습으로 홍보하는 것입니다. 저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처럼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많은 보물이 묻혀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미주지역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겸손’이라는 기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인내’라는 기름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신문사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난번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공지사항 시간에 본당신부님께서 가톨릭평화신문 홍보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학술지를 보는데 어느 날 학술지가 폐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은 논문과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는 학술지가 폐간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학술지 대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폐간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학술지라고 해도 독자들이 정기적으로 구독하지 않으면 폐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주지역에 교회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릭신문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평화신문입니다. 안타깝게도 2년 전에 가톨릭신문은 본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주 지역에는 가톨릭평화신문 하나만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어야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구독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미사 후에도 교우들에게 신문구독을 권하였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신문홍보를 위해서 앞장서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와서 5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겨울은 팬데믹과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봄’은 어김없이 왔습니다. 어떤 겨울은 무릎까지 눈이 쌓였지만 ‘봄’은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떤 겨울에는 지붕에 누수가 있었고, 어떤 겨울에는 눈 폭풍이 불었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섯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매년 겨울이 지나면 선물처럼 봄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마치 겨울을 보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 한데 모은 듯하리라.” 얼마나 멋진 희망의 메시지입니까?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박노해 시인의 시 “별은 너에게로”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대림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빛의 속도로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뜨거운 가슴으로 희망을 품고 빛나는 별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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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잡힌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을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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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이 말씀은 길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마태 5—7장 참조)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리라.” 이 말씀에서도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마태 8—9장 참조)
예수님 눈에는 당신께로 몰려드는 군중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나운 이리의 위협을 피하여 다니며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된 양들처럼 보이셨나 봅니다. 그래서 몸소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다음의 시편 구절처럼 양들을 한데 모아 바른길로 인도하는 참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신다.’(시편 23[22],1-3 참조)
참된 스승이시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고쳐 주시는 일에 전념하셨다면, 그분에게서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듬으며,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일꾼들을 양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소의 꿈을 키우는 이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많은 젊은이가 응답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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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마태오 9장 35절-10장 1절.6절-8절)
하루를 지내면서 평화롭고 기쁜 적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고통스럽고 슬프고 혼란스러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루라도 우리는 늘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고사하고라도 우리를 묶어두고 또 괴롭히는 일들을 무엇일까요?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의식주 문제이겠지요. 사는 곳이 소음이나 악취로 차 있는 곳이면 아무리 지내는 곳의 시설이나 여건이 좋다해도 불편과 함께 고통을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또 몇 끼를 굶어 배고픔의 고통도 있겠지만 반대로 음식은 좋은데, 위나 장의 통증 때문에 못 먹는 경우도 사실은 큰 고통 중에 하나이지요. 헐벗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 나가거나 사람을 만날 때 옷가지가 변변치 못하다면 거기에 따르는 불편이나 고통도 있을 것입니다.
포로수용소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군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이 얇거나 헤어져 있어서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서 군화도 다 떨어져서 행군할 때에 피맺히거나 동상에 걸린 발을 볼 때, 의복에서부터 사람은 당장 의식주의 중요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어디 이뿐이겠어요?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해서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전쟁의 위협, 기아 등의 소식에 고통스러운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이 괴롭힘을 겪는 것을 물리적인 피해, 정신적 피해로 나누는데, 그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늘상 쓰는 말로 괴롭힘을 겪는 것으로 꼽기도 합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대인관계에서 오는 고통도 그 비중이 큰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크고 작은 고통 속에서 실망과 더 나아가서는 희망이 없는 절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삶에 지친 이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다가올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야 예언서 30장 19절)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슬픔에 싸였던 예루살렘, 시온의 백성에게 응답과 함께 희망을 베풀어 주심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느님으로 사람들을 치유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음을 두루 다니시며 회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시지요. 목자 없는 양들을 찾아다니며 치유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에는 벅차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 9장 3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쫒아 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예루살렘, 시온 산으로 되돌아 갈 희망의 메시지를 예언자를 통하여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처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약속한 희망의 날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는 지난 묵은 죄에 머물지 말고 새롭게 희망이 날이 예루살렘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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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저는 늘 이렇게 단순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나 한 낱말을 찾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기도 문구처럼 하루 한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찾은 말씀을 외우고, 하루 종일 되뇌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으로 저에게 크게 와닿은 말씀이 오늘 복음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오 10장 8절)였습니다.
이 말씀을 외우고 되뇌면서 후배들과 함께 산책하게 되었는데, 한 후배가 자기는 이번에 졸업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여행비가 없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행 경비를 물으니 13만 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로부터 받은 용돈이 13만 원 있었고, 마침 그때 되새기던 말씀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였기에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조용히 13만 원을 그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였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후배들이 졸업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경비를 내주었던 그 후배는 돌아와 인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배를 속으로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화가 날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었더니 한 달쯤 지나자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말을 하려면 ‘엄마’라는 말을 만 번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제나 대부모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귀에 만 번은 들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만 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이 열려 비로소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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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9,38)
작금의 세계 경제는 미·중 간의 무역 갈등, 코로나 펜데믹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등 여러 이유로 불황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으며, ‘엎친 데 덮친다’는 말처럼 우리나라는 한일韓日 간의 경제 마찰, 더 나아가서 이젠 중국의 전략 자원 통제(=갈륨, 게르마늄, 희토류 등)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위기에 강한 우리 민족이기에 슬기롭게 위기를 무난히 극복해 나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과의 경제 마찰 그리고 중국의 전략 자원 통제 등은 오히려 산업계 전반에 큰 자극과 도전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상생과 협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만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건실한 기술력 확보와 경제성장의 확실한 투자인 셈입니다. 이는 단기 처방이 아닌 건전한 경제성장을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과 협력관계를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지속되어야 할 산업 정책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의 새로운 적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래아에서 행하신 활동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바빠도 너무 바쁘시게’ 다니셨고, 가르치시고 선포하셨으며,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당신께서 가셔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지역도 많으셨고, 자신의 돌봄과 치유의 손길을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새삼스레 예수님께서는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보면서 깨닫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면한 현실은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들의 딱한 모습을 보시면서 마음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8)라고 당신 원의와 계획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젠 혼자 이 일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처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하려고 마음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시작한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러기에 하늘나라의 일꾼은 지금도 필요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저희 수도회는 매일 아침, 이런 원의를 담아 ‘성소자를 위한 기도문’을 바치고 있으며, 이는 단지 저희 공동체만이 아니라 모든 남녀수도회 그리고 교구에서도 동일하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필요하시며, 이는 우리가 그분의 연장과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9,3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수확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이미 주님의 논밭에 모든 곡식이나 과일은 영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찾고 원하시는 일꾼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다 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들어 들일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밥상을 차려 놓으셨는데’, 우리는 그 밥상에 수저와 젓가락만 얹어놓으면 되는 판국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사도 바오로는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중심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3,6~7) 결국 수확을 거들어 들일 일꾼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완성하신 일을 갈무리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그러기에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에게 필요한 자질이나 태도입니다. 하늘나라의 일꾼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과 헌신의 투신(10,7),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9,36;11,28), 그리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10,8)라는 당부처럼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통과 질병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고, 살려 주려는 노력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단지 말로써 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활동입니다. 사랑의 증거이며 표현입니다. 이런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성숙한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몸으로 함께 하면서 온몸과 정신과 마음으로 배우고 닦으면서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르3,14~15) 결국 일꾼으로 파견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교이며, 이 친교는 파견되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일꾼으로서 소임을 수행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늘 주님 곁에서 실제로 보고 느끼고 맛본 것을 실제 선교의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합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화답송 후렴/이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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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늘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줄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가정도 화목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이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내 일을 앞세우고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라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으로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영적 자산을 축적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연장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자로써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가 필요로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그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성직자, 선교사, 수도자들이 많이 양성되고 배출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분께서 무상으로 주신 은총이고, 나는 그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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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다면서 늘 비웃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등산에 갔다가 미끄러져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떨어지던 중에 간신히 나뭇가지 하루를 움켜쥐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사람 살려!”라고 외쳤습니다. 너무 외진 곳이라 그럴까요?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신이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이었지만, 없다고 했던 그 신이 실제로 있어서 자기를 살려줬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살려 주세요. 만약 살려만 주신다면, 당신을 굳게 믿겠습니다.”라고 간곡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려면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이 소리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하느님의 음성이라고 믿고서 손을 놓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즉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미쳤어요? 이 나뭇가지를 어떻게 놓아요?”
현재 이 무신론자에게 나뭇가지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손에 힘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을 쫓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 또 붙잡아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논리는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붙잡아야 하는 하느님을 붙잡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부르심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하십니다.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많이 만납니다. 열심히 미사도 참석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집안일을 등한시합니다. 밖에서는 열심하고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듣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 그 자체입니다. 보이기 위한 신앙은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뜻에 반대되는 가짜 신앙일 뿐입니다.
이런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해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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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님처럼 모두에게>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내 님처럼 모두에게>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오 10,8)
맨몸 아닌 모든 것
두루 챙기시어
맘껏 살릴 수 있게
내 님께서
님 닮게 빚으시어
나를 세상에 보내시니
하여 나는 늘
님의 삶 나의 삶처럼
나의 삶 님의 삶처럼
님 주신 나의 믿음
나만의 믿음 아니니
모든 이에게
님께서 주신 나의 희망
나만의 희망 아니니
모든 이에게
님께서 주신 나의 사랑
나만의 사랑 아니니
모든 이에게
님께서 주신 나의 기쁨
나만의 기쁨 아니니
모든 이에게
님께서 주신 나의 삶
나만의 삶 아니니
모든 이에게
내 님께서
님 닮게 빚으시어
나를 세상에 보내시니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나 있어 님 계시듯
또 하나의 님 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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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철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치유의 여정>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예수님-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9년 전 2016년 스승의 날에 수도원을 찾았던 지금은 56세, 60대에 접어든 옛 초등학교 제자 소화데레사가 작은 액자 안에 “스승의 은혜”라는 연필로 쓴 가사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조용히 영원한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만세육창 후 불러봤습니다. 지금도 거의 10여년 동안 매해 스승의 날 전후로 옛 제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참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이요 자주 주님을 생각하며 자주 불러보는 노래입니다. ‘어머니 은혜’대신 ‘성모님 은혜’로 불렀던 노래처럼 말입니다. 선생은 많은데 스승은 없고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는 말은 하두 많이 들어 이젠 진부하게 생각되는데 사실이 그러합니다.
도대체 보고 배울 어른이, 스승이 없다는 한탄들입니다. 모두가 보고 배웁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은 필수입니다. 인생은 유한한데 정말 보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진실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겸손도 기도도 순종도 침묵도 경청도 참 보고 배울 것들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배움에 있어 모든 이들은 초보자요 평생 배움의 열정을 지닌 평생학인으로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곧장 뒤따르는 영혼의 병, 정신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니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참 스승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필수의 정답(正答)입니다. 사실 회개와 겸손으로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영원한 스승인 예수님을 반영하는 삶의 스승들입니다. 바로 스승중의 참스승, 영원한 스승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스승이 없다 탄식은 금물입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께 배워야 하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자 제자인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야 평생 진리추구, 지혜추구의 영혼 건강의 수행자로, 구도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배움의 여정이나 배움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은 필수입니다. 자비하신 연민의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평생 스승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해 주시리라.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들으리라,”
바로 이런 스승이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또 오늘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일상의 삶을 통해 만나는 예수님이요, 평생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자 친구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스승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영적우정은 얼마나 중요하겠는지요! 그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회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참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은 주님은 우리의 평생 스승이요 우리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제자요 평생학인에다가, 주님은 우리의 평생 치유자 의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의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소개되는 치유자 주님이십니다. 바로 대림시기 치유의 은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
대림시기 밝아오는 주님 치유의 빛은, 마침내 주님 성탄날에는 절정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인 동시에 치유자 의사인 것입니다. 평생 치유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치유보다는 힐링이라는 영어가 더 많이 회자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힐링의 주님, 치유의 주님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나 수도원은 주님 힐링의 집, 힐링의 센터이며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힐링에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 천주교회는 이미 그 예전부터 최고의 진짜 주님의 힐링센타로 자리 잡아 온 것입니다. 배움과 치유가 동시에 이뤄지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가르침의 스승이자 병을 고쳐주시는 연민의 사랑이 가득한 치유자 의사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가 단적으로 착한목자 예수님은 스승이자 치유자로 그 신원이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바로 이런 스승이자 치유자의 역할은 그 제자들을 통해 그대로 전수됩니다. 당대의 제자들만 아니라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치유요 평생 주님과 만남의 여정, 치유의 여정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진리에 굶주린 세상, 영육으로 병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을 닮아 주님의 제자이자 치유자 역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 있는 하늘나라의 현존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삶의 중심을, 삶의 길을, 삶의 희망을, 삶의 빛을 잃어 영적으로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영적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화답송도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길 없네.”
과연 마귀들이 악령들이 괴물들이 들끓는 작금의 세상입니다. 현대판 무수한 소비주의, 쾌락주의, 금전만능주의, 물질주의, 세속주의, 각자도생 - 승자독식의 이기주의, 가치관 상실, 탐욕, 중독, 광신의 이념들을 통해 끊임없이 준동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온갖 악의 세력들을 쫓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살 때 천하무적, 백전백승, 영적승리의 삶이겠습니다. 이런 주님을 모시는 이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스승, 저희의 치유자이십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길, 저희의 빛,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하나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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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잃은 양인가, 길 잃은 양인가?>
대림절의 독서와 복음의 구조는 이사야 독서의 예언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는 복음의 구조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하게 되리라는 예언의 연속입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너희의 눈이 스승을 뵙게 되리라.”
“뒤에서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주님께서 병자와 가난한 자의 기를 살려주시고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기가 꺾인 양들의 목자입니다. 목자인 주님께서 오시기 전엔 목자가 없어서 양들의 기가 꺾여 있었는데 이들에게 주님은 참 목자이십니다.
참 목자는 우선 기가 꺾인 양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가엾은 마음이 드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크고 진실할수록 가엾지 않은데도 괜히 가엾게 봅니다.
그러니 아플 때는 얼마나 더 가엾게 여기고 돌봐주고 치료해주겠습니까? 아니, 병이 나기도 전에 그리고 몸의 병처럼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병과 기색을 살펴 기가 꺾여 있는지까지 살펴 몸과 마음의 병을 미리 예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목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기를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기를 꺾을 것이고, 그러니 가엾은 마음은커녕 잔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을수록 그의 고통보다는 잘못을 보기 마련이고, 그러니 그런 그가 가엾기보다 밉거나 꼴 보기 싫을 것이며, 꼴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꺼지라고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목자에게는 흩어진 양들이 잃은 양이 아니라 길 잃은 양입니다. 공동체가 품지 못해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양이 못돼처먹어서 무리에서 이탈하고 그래서 길을 잃어버린 양이며 그래서 전혀 가엾지 않고 오히려 괘씸하여 찾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이렇게 해서 잃은 양을 찾으려고 참 목자이신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것이 육화/성탄이고 찾아다니신 것이 복음 선포 여행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만 찾아 돌아다니시지 않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를 모으시고 파견도 하시는데 우리도 여기서 제외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문하게 됩니다. 너는 그런 능력도 없고 열성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이 모집과 파견에서 제외하시면 좋을까요?
반대로 주님은 우리를 복음 선포자로 부르시고 파견하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것 싫고 귀찮다고 거부하지는 않는가요?
우리에게 그들은 잃은 양인가, 길 잃은 양인가?
이런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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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6)
<예수님의 일!>
오늘 복음(마태9,35-10,1.6-8)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과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과 예수님의 바쁨이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9,35)
게다가 군중에게로 향해 있는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가엾은 마음인 측은지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바쁘셨습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제대로 식사를 하실 수도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으실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38)
그리고 당신의 이 일과 바쁨을 열두 사도들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로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6-8)
그리고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사도들인 사제들과 신자들에게도 같은 예수님의 일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직무대리자로서 예수님의 일 때문에 바쁘게 지내고 있는가?'
"이스라엘 집안에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까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 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들이 나의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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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_cOPhucd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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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 36)
누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마음먹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의
대림시기입니다.
연민으로
아픈 이들을
안아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연민이란
사람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소통이며
배려입니다.
깨어나야 할
연민의
마음입니다.
연민이 사라지면
기다림과
기도도
사라집니다.
연민은
주님을 향하는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연민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연민으로
시작되는
구원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연민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되는
연민입니다.
가련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서
목자도 양들도
걸어가야 할
길을 알게됩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이끌어주실
목자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목자의 마음이
희로애락을 나누는
하느님 나라의
마음입니다.
오직 마음을
나누는 사람만이
대림의 길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을
고쳐 주시고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거저 받은
마음을
거져 주고
나누는
마음의
대림시기입니다.
마음을 놓치면
대림도 놓칩니다.
먼저 마음으로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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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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