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가볼만한곳,탄금대와 중원고구려비(징비록 15회 공부자료)
KBS역사드라마 '징비록'이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어제 15회차 방영에서 신립장군의 충주 탄금대 전투장면이 등장했다.김여물장군과 나눈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못난 주장主將을 따라주어서 고맙다고....장군을 모시게 되어서 명예롭습니다...
신립장군의 탄금대전투는 학자들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고...당시 현지의정세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르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탄금대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매복 작전이 용이했던 조령을 버리고 평지인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여 완패했다는 사실은 조선으로선 잊고 싶은 기억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전투를 지휘한 장수 신립에 대한 평가 역시 그동안 좋지 못했던 것도 현실이다. 용맹은 있지만 지략이 부족한 장수였을까? 진실은 무엇일까?
여진족이 침입하였을때,니탕개 무리들은 1~2만의 대병을 일으켜 국경 지역을 휩쓸었다. 수세에 몰리던 조선군을 이끌고 이런 여진족을 물리친 장수가 바로 신립이다. 신립은 평소 500여명의 기마병을 정예화시켰는데 이 기마병을 늘 앞장세우며 니탕개군을 격파, 위용을 날렸다.그래서 유능한 장군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탄금대전투에 참여한 조선의 군사력은 얼마나 될까?선조수정실록 25년엔 신립이 거느린 군사가 8천여명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선조실록 29년 기사엔 "10만의 정병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조차 군사숫자가 극과극이다. 일본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저서엔 탄금대 전투에 나선 조선군의 숫자를 8만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가들은 당시 조선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립이 이끈 군사수가 대략 1만명 남짓이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신립이 충주 방어전 직전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도 보이는 고민이다. 신립은 방어선을 한강지역으로 올려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거부당했다. 일본 3개로를 모두 방어하고 조선 정예군인 북방군의 합류를 기다리며 군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신립이 이끌던 군사의 태반이 급하게 징집된 농민군으로 분석된다. 그가 거느리던 정예병은 몇 안되는 장교급이 전부로 보고 있다. 결국 신립은 기마 전술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전략전술을 소화할 수 없던 조선군사의 면면에 끝내 '배수의진'이라는 극단책을 쓴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때 충주 탄금대 전투의 결과 일본군 피해는 가토기요마사군의 15,000여명중 8천명의 사상자가 있었다.신립은 패전해도 한강의 방어력을 증강하기위한 시간을 벌기에는 족하다고 하였지만....한강방어선은 장졸들이 흩어지고...선조의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사가야 (한국명 김충선)은 명분없는 전쟁은 싫다며 투항하고...이덕형은 혼자서 가토군과 협상을 할려고 하였는데...
일본군 침입 당시 경상순찰사 김수는 대구에 경상도 병력을 모으고 이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대구에 당도했으며, 결국 대구에 모였던 경상도군 주력부대는 전투 한번 못해보고 자체 해산되었다. 정작 이일이 상주에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코앞에 있었고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경상도군은 없었다. 그래도 이일이 왔다는 소식에 다시 병력이 결집하여 6천여까지 군을 편성했지만 결국 패배. 교전 직전 이일이 하던 것은 습진, 즉 진짜기 훈련인데, 이는 이 부대가 기본적인 훈련도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신립 장군이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돼 이일의 뒤를 따라 남하 준비를 할때에도 마찬가지 문제는 발생한다. 우선 군관을 구하기 힘들었다. 신립이 지휘해야 하는 부대의 장부상 규모는 10만여에 달하는데, 이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군관이 필요하지만 그걸 구하기 힘들었던 것. 또한 자신이 지역 군과 합류하기 전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립은 경군을 자신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이일보다 뒷빽이 든든했던데다 당시 조선의 제일가는 장군이였던 신립의 요청이니만큼 결국 조정에서는 법도까지 어겨가면서, 선조가 직접 나서 경군을 차출한다. 체찰사로써 남하할 것을 준비하던 류성룡이 지휘하기 위해 편성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로 돌린 것.(류성룡은 이에 대해 징비록에 신립이 모으려 하니까 안모여서 내가 나서서 모았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신립이 확실히 이일보다 유능했다는 것을 알려주듯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과 조우한다. 이때 신립은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군대의 극히 일부분인 충청도군(연려실기술에 따르면 8천)과만 합류했던 상태였고, 북상하던 전라도군과는 미처 합류하지 못했었다. 거기다 훈련도가 형편없는 군대의 상태는 조령에서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했으며 조령으로만 적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3개의 진격로로 나뉘어서 한양으로 돌격하는 상황이라 빠르게 하나씩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높은 기병의 비율을 믿고(일단 경군들에게는 한성을 출발할때 전마가 1필씩 지급되었다.) 야전을 걸었으나 지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실책까지 겹처 결국 격파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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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25일 충주우륵축제기간에 향토사 학술회의가 있었는데....참관한 사진을 그동안 못올렸는데...마침 징비록의 탄금대 전투장면을 보고 올린다.
탄금대 유래
지금부터 1400여년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리워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한다.
조국순례 자연보도 안내--왼쪽 아래 있는 무주리 전적지는 잘못되었다.무극리 전적지이고 기념관이 있다. '감우재전투'라고도 한다. 6.25전쟁때 물밀듯이 쳐내려오는 북괴 인민군을 맞아 국군 6사단 7연대가 대승한 전투이다.
동락리전투에서 제7연대는 북한군 제48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군수참모를 포함한 132명을 포획하고 각종포 54문, 차량 75대 등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다. 이 전공으로 국군 제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으며, 이것은 개전 후 처음 있는 일로서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써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검색창에서 무극리전투 혹은 동락리전투,김재옥교사 검색해보시라.
탄금대사연 노래비
학술회의 참석하신분의 안해되는 분인데....탄금대를 저하고 같이 답사하고 있습니다.
권혁진 시인이 쓴 탄금대시
충주 충혼탑 안내문=광복이후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향사를 지낸다고한다.
8천고혼 위령탑-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을 비롯하여 탄금대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탑을 세웠다.
권태응 선생의 항일운동 안내판....그러면...120년전 충주성전투를 치른 ..유인석,이강년,박정수 등 수천명의 의병들과...주용규,이춘영 의사등 몇백명이 죽은 항일의병은 누가 기려야 하느냐?충주는 항일의병을 외면하고 있다.
탄금대 옆 달천이다.
탄금대기
12대....
우륵선생과 탄금대 안내비
탄금대안...대흥사..
충주 장미산성,중앙탑,중원고구려비...
4대강 국토종주 새재자전거길....4대강 사업...잘했어야 하는데...안타깝다...
저것은 뭐라고부르는지 잊어 버렸군요...ㅎ
가만...저것을 타고...의병전쟁 전적지 답사를 다녀야겠군요...ㅎ...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 답사도...저걸로...ㅎ
충주축제와 학술대회....
위는 중원고구려비 탁본 한 것
예성문화연구회에서 운영하는 우륵문화제 탁본체험-
축제에는 뭐니뭐니해도 먹을 것이 빠지면 안되죠?
중원 청명주(충주무형문화재 제2호)
주제:충북의 옛길
제 26회 충북향토문화 학술대회 장소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건물에서 개최됐습니다.
위자료는 뉴스엔미디어 자료를 참조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