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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하면 따가운 햇볕을 생각합니다. 따가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뜨겁지요. 그래야 할 8월의 첫 주를 장마를 지나왔음에도 가장 장마 같은 사흘을 지냈습니다. 빗속을 지나왔는데 그러면 좀 시원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더위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 상상이 되지요. 아주 기분 나쁘게 더웠습니다. 에어컨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밤까지 그 덕을 보기에는 좀 두려웠습니다. 하루 내내 끼고 살 수는 없다 싶었지요. 전기료? 그것도 무섭고, 혹 과열로 인한 실외기 불?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전에는 일단 끕니다. 햐 - 정말 다른 세상이지요. 그래도 일단 잠이 들고 나면 되니까. ㅋㅋ
그렇게 한 주를 지냈습니다. 이제 한 주만 지나면 말복, 아무래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조용하던 산에는 이제 매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옵니다. 여름 맛이 나면서 과일이 익어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런데 장에 가면 정말 놀랍니다. 이제 겨우 익어가는 파란 조그만 풋사과 하나에 천원, 가만있자, 맞아! 점심 한 끼 외식하려면 이제 만 원 정도는 기본입니다. 햐 - 이거 화폐개혁이라도 해야 하나 싶습니다. 물건 값은 오르지요, 장사는 안 된다 하지요, 아니 어쩌자는 건지, 원 세상에!! 그래서 종종 길가에 마련된 임시 청과물상으로 갑니다. 비교적 쌉니다. 이게 우리 거냐 아니냐, 그런 거 따질 때입니까? ㅋㅋ 빈속을 채워야 하는 게 먼저이니까.
휴가요? 휴가가 따로 있나요? 이 나이에. ㅎㅎ 아무튼 즐겁게 건강하게 또 한 주간을 잘 버티기를 바랍니다.
2022년 8월 6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사무엘하 7 : 9)
<한산 - 용의 출현>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이제 세계인들 가운데서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잘 아는 분의 이야기인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비난만 잔뜩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편에서 온 국민의 성원을 받아 굴지의 관객 동원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기야 그래서 이번 2편이 더 부담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또 다른 기대를 모을 수도 있습니다. 기대와 부담이 어우러져 색다른 연출로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낼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진 명장의 이야기인 만큼 신납니다. 더구나 아주 어려운 처지의 나라를 구하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멋진 승리의 이야기지요.
전쟁의 영웅이면서도 다른 무장들과는 좀 다르게 글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록들로 인하여 더욱 사실적으로 당시의 전투 상황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정세 함께 하는 장수들과 장병들의 상태와 더불어 본인의 심중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전개된 병법과 작전 등을 상세히 알게 됩니다. 그것을 현대의 기술과 빼어난 연출 나아가 연기자들의 혼신의 노력이 합하여 걸작으로 나옵니다. 당시 상황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그 전투 속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박진감이 넘칩니다.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해전을 보여주는데 실제 바다에서 촬영한 것은 없답니다. 세상에!!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3대 대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번 ‘한산 대첩’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진작 본 ‘명량 대첩’이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 ‘노량 대첩’이 남아 있습니다. 한산 대첩에서 명량 대첩 사이에는 5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량 대첩에서 노량 대첩 사이에는 1년의 기간이 있을 뿐입니다. 하기야 왜군이 쫓기는 마당에서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이기도 합니다. 한산에서의 완패로 인하여 왜군은 꽤나 조심스러워졌을 것이고 시간을 두고 새롭게 준비를 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사이 나라의 정세도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모함을 받아 이순신 장군이 옥고도 치릅니다. 그 사이 우리가 패배하여 가지고 있던 함선들을 거의 다 잃었지요. 잘 아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말이 바로 명량 대첩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치른 전투 하나하나를 그리기에도 벅차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가운데 3대 대첩을 빼내서 영화를 만들기로 한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두 가지를 만들어 냈으니 하나만 만들어 내면 됩니다. 아마도 그 각각의 전투에서 장군이 어떠한 상황을 안고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전술을 전개하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인 줄 압니다. 명량에서는 단 12척의 함선으로 대규모 왜적을 상대하여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전략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단 군세가 너무 차이가 컸으니 말입니다. 도무지 상대가 안 되잖아요. 단 12척으로 백 척이 넘는 적을 상대하다니!
아무튼 한산은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겨룹니다. 상대는 육지전에서 영웅시 되었던 ‘와키자카’입니다. 물론 그의 과거를 보면 해전에서도 꽤 유능한 장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수령이 육지에서 잘 싸우고 있는 그를 수장으로 발탁하였을 것입니다. 육지에서의 전과가 그를 다소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거북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그 약점을 파악, 이겨낼 방도까지 준비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그러리라 예측하고 대비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과 더불어 상대가 어떻게 할 것까지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왜군의 아주 큰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이기도 하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약점이 되었습니다. 전체 군을 통솔하는 대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따로 있기에 그들 각자가 자신의 공적을 쌓으려 서로 경쟁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키자카는 자신을 도우려 왔던 장수의 함선을 모조리 빼앗고 쫓아냅니다. 자신들 안에서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막다른 지경에서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리한 여부를 가늠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리하다 싶으면 아군일지라도 구하려고 구태여 목숨 걸고 나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쟁자보다 공을 먼저 많이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왕에게 잘 보여 출세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의(義)보다 개인의 명예와 권세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 유명한 ‘학익진’이 어떻게 성공하여 완승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순신 장군과 적장 와키자카 두 사람의 인격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다르지요. 영화 ‘명량’에서 보인 묵직함보다는 여기서는 이순신 장군의 철저한 준비, 모두를 의식하는 관용,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확신을 가진 전략이 빛을 발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마음이라도 일단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해줍니다. 영화 ‘한산 - 용의 출현’(Hansan: Rising Dragon)을 보았습니다.
<영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착하다 악하다 하는 기준을 무엇으로 합니까?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듣는다, 순종을 잘 한다 그러면 착하다고 말합니다. 시험 치를 때는 커닝을 하고 남의 물건 자기 것처럼 슬쩍 잘하고 그러면 악하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가정에서 따뜻한 가장으로 생활하고 직장에서 사람들과 화목하며 일 원만하게 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적질하거나 싸움질하거나 어디를 가나 말썽을 일으키면 악하다고 말합니다. 기준이 무엇입니까? 도덕과 윤리입니다. 그러면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만 19세입니까? 그 이상이면 어른이고 그 이하이면 아이입니까? 아이라는 것조차 애매해서 다시 어린이와 청소년을 구분하지요.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는 누가 성인이고 누가 아이입니까? 교회 오래 다니면 어른이고 갓 들어온 사람은 어린아이입니까? 히 5 : 12 - 14절 말씀을 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여기 말씀에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가 나옵니다. 그 기준은 만 19세가 아닙니다. 기준이 무엇이지요? 젖을 먹느냐 단단한 식물을 먹느냐 그 차이에서 옵니다.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여기서 젖은 무엇이고 단단한 식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장성한 자인데 그는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한다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젖이 어머니 젖이나 아기들 먹는 우유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그만큼 먹기 쉽다는 말이고 성경으로 말하면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단단한 식물은 먹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가 선악을 분변한다고 합니다. 사실 아이들도 도적질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압니다. 남을 해하고 상처를 주는 일 따위가 악한 일이라는 정도는 웬만해서는 다 압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악을 분변한다는 말씀도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선악기준은 아닙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장성한 자는 그 말씀을 경험한 자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선악을 분변한다는 말입니다. 종합해보면 여기서 말씀하는 선악이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나 도덕기준의 선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사실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않아도 그리고 설령 몰라도 구분할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하나님 말씀하시는 선악의 분별은 세상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요.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낯선 땅으로 들어가니 두렵습니다. 더구나 자기 아내 사라는 인물이 괜찮거든요. 힘이 지배하던 시절이니까 여차하면 남자를 살해하고 남의 아내를 뺏는 정도야 우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꾀를 냅니다. 아내에게 뭐라 합니까? 창 12 :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결국 어떻게 됩니까? 애굽 왕에게 아내를 뺏깁니다. 우리 고사에 보면 여자가 절개를 지키려 죽음도 불사하는데 여기 아브라함을 보면서 뭐라 평가하겠습니까?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아내를 판 비겁한 녀석, 치사한 놈 그러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팔아서 목숨 건지고 돈도 벌고 그게 선한 일입니까? 아무리 좋게 봐도 선한 일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친구라 불러주고 특별하게 대해줍니다. 결국 목숨도 지켜주고 아내도 되찾게 해주고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들 윤리도덕의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들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지 자칫 헷갈립니다. 물론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아멘!
흔히 교회 다니면 나쁜 것 배우겠느냐 하면서 아이들 교회 보내는 부모도 있습니다. 또 그런 생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배웁니다. 그런데 교회가 대부분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 말씀 성경도 분명 윤리 도덕적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또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구태여 하나님이 성경까지 따로 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에서 무엇을 얻는다고요? 영생을.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윤리 도덕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윤리 도덕서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안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성경을 잘 터득해서 하나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지요.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아야 그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고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지요. 왕상 3 :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바로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세상의 부귀영화까지 다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 가운데 우리 눈에 다시 띄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솔로몬이 재판을 언급하였으니 영적인 것보다는 실제적 사건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지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선의 역사가 있고 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에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선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것이고 악의 역사는 사단의 편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육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영의 세계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또한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자 누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누구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소개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기 아버지도 소개하지 못한다면 자식의 도리가 아니지요. 또한 아버지를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따라서는 자칫 아버지를 욕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우선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상상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출 3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기를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존자’라 하셨습니다. 요 4 : 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6 :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즉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야 영이시니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가 하면 창 1 : 1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요 1 : 1절을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이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나아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왜 말씀을 듣고 배우려 하고 말씀을 소중하게 여깁니까?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는 육의 세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영들이 있습니다. 시 103 : 20 -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멘! 우리가 회사를 세우면 직원들을 채용해서 함께 회사를 운영하듯이 하나님은 천국을 만드시고 천군천사를 지으셔서 함께 운영하십니다. 여기 말씀에 그 천사들이 하는 일이 소개됩니다. 하나님을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하나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히 1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를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여기서 천사를 ‘부리는 영’이라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영이시고 천사들은 피조물 영들입니다.
하늘에 영들 곧 천사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계 5 :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그 수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 7 :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놓였더라” 역시 ‘천천만만’이라 표현합니다. 하기야 상상을 해봐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곧 80억이 된답니다. 하늘 곧 영계에 천사들이 이 지구촌의 우리 사람의 수보다 많을까요, 적을까요? 또 여기 보면 그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수종하고 그 앞에서 시위하는 것입니다. 히 1 : 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 하였듯이 하나님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당신의 하시는 일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렇게 여러 성경에 두루 말씀하고 계시니 우리는 그 모든 말씀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의 세계에 천천만만 천사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많은 천사들이 우왕좌왕 무질서하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듯이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 영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도 질서가 잡혀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위계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 하늘 영계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에서 보다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영계 하늘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뜻하지 않은 존재가 출현하게 됩니다. 이제 어떻게 사단의 세계가 생겼는가 보겠습니다. 우선 계 20 : 2절 말씀을 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사단을 여러 가지 용어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엉덩이 궁둥이 방댕이 히프 말하는데 이것이 다 다른 뜻입니까? 아닙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옛 뱀’이라고 말씀하는데 분명 창 3 : 1절에서 나오는 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파충류 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 많이 먹는 사람을 가리켜 ‘돼지’라고 비유합니다. 성경에서 ‘사단’의 뜻은 ‘대적자’ 또는 ‘멸망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용’이나 ‘뱀’으로 부릅니다.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존재로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는 ‘이단자’ 또는 ‘분리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 하는 일 즉 사역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단이나 마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런 일을 하는 경우 어떤 대상이든 가리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 16 : 21 - 23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하여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단은 아니지요. 사단의 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도 마 23 :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사단의 짓거리를 하기에 뱀들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제 사 14 : 12 - 15절을 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말하는 ‘계명성’이 바로 사단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비길 만큼, 하나님과 싸워 이겨서 높아지려 했습니다. 높아지려는 욕심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 영계 곧 하나님 계신 곳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땅으로 쫓겨나 하나님의 지으신 육의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만 보고만 계실 수 없습니다. 그 땅도 당신이 창조하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창조하여 세상을 통치하도록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사람을 택하여 세우십니다.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 1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뜻이 있습니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보겠습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생기를 넣으셨지요. 이 생기에 대해서 이미 배웠습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콧바람’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됩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과는 다른 조직을 세워 맡기십니다.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즉 에덴을 창설하여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하며 언약을 세우십니다.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9절에 보면 그 동산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렇지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일단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전혀 다른 두 나무가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배워서 알고 있지만 여기 나무가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같은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 특히 말씀을 전하는 목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열매라는 것도 열매가 아니라 그 목자에게서 나오는 말 또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그 실과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을 먹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선악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를 먹으면, 다시 말해서 마귀의 말을 먹으면 생명이 아니라 사망 곧 죽음으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의와 경계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들이 같은 장소에 있고 특히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에 있기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5 :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 자신이 나무입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입니다. 곧 생명나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요.(요 6장)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14 :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왜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해합니까? 보이는 예수님의 육신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입니다.
이제 좀 정리합니다. 영의 세계가 둘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과 마귀 편입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도 이 두 편의 세력이 지배권을 다투게 됩니다. 그 싸움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통하여 전개됩니다. 만물의 영장이 된 사람이 당연히 세상을 다스려야 하겠지요.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자를 창조하여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명하셨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요약하면 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여 다스리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 땅에서의 전투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마귀가 지배하고 있으니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사람이 상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온 세상이 이미 마귀의 수중에 있기에 일단 하나님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생육 번성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충만하여 싸워 이김으로 정복하여 다스리자는 것입니다.
그 예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창 12 : 7, 13 : 14 - 15, 17 : 8 등) 그러나 당시 아브라함의 가족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들을 먼저 생육 번성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번성시킵니다. 그리고 출애굽하여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정복을 시행합니다. 오늘날은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 비슷하게 전개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구약시대를 끝냅니다. 예수님으로 새롭게 하나님 백성이 창조됩니다. 이제 혈통으로 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당되는데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행하고 있는가요? 여태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선악나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그런 신앙으로 어떻게 마귀와 대적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예언하셨습니다. 마 8 : 11 - 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날 나라의 본 자손 곧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오늘 주제를 생각하며 끝내려 합니다.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영은 앞에서 보았듯이 보이는 육신에 들어와서 역사합니다. 즉 사람에게 특히 목자라는 지도자에게 들어와서 미혹합니다. 아담을 미혹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났던 뱀이고 바로 선악나무였습니다. 그의 말을 먹으면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실패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도 실패하고 망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영은 보이지 않아도 그 하는 말은 들립니다. 바로 그 말을 분별하면 됩니다. 생명나무 실과인지, 선악나무의 실과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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