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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물 피해가 많습니다. 세상에, 장마 지나고 이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2차 장마라고 명명되어 있더군요. 통상 장마라면 6월 말에서 7월 중순으로 알고 있는데 8월 장마는 정말 낯섭니다. 아무튼 호되게 당했습니다. 누가 찍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강남역 근처인 모양입니다.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리는데 땅에 발이 닿자 물이 가슴까지 올라옵니다.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마 버스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물 차오르는 버스에 그냥 남아있을 수는 없겠지요. 세계 10대 도시 안에 든다는 대 서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상상이 안 됩니다. 아무튼 이 때 아닌 장마에 희생도 많습니다. 아픕니다.
다음 주에 다시 비 예보가 있습니다. 이거 여름 맞아? 싶습니다. 8월이 팔팔하리라 기대했는데 복구 작업하느라 팔을 거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남부지방에는 아직도 물이 부족하답니다. 이번에는 물이 부족하다는 남부지방에나 뿌려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꺼번에 많이는 말고 적당하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지만 바람입니다. ‘기후 재앙’ 지금 세상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그다지 신경들을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얼마나 더 버틸지 걱정됩니다. 매년 당하는 물난리, 근본적인 대책은 없는지 답답합니다. 모두 고지대로 옮기는 것이 답일까요? 아니면 빨리 달나라 이주를 서둘러야 할까요?
힘들게 말복이 옵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여름도 가게 됩니다. 버텨야지요. 건강하게, 힘냅시다. *)*
2022년 8월 13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비상선언>
그 어떤 상황도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의 반응에 대하여 분노를 표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우방국이라더니 이럴 수가 있는가?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도 우리 또한 똑같이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조차 우리 국민이 당하는 일임에도 몰려나와 착륙을 반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위험을 안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적은 수의 사람이 희생을 당해야 합니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가슴을 찢으면서라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들 안에서조차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상선언’을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항공기 화재, 기계 고장, 구조 파손과 같은 재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상사태임을 선언하는 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니 인류애를 전제로 국가를 초월하여 비행 중 가장 가까운 공항에 비상 착륙할 수 있는 경우라는 것을 어느 나라도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운항 중인 비행기의 승객과 승무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 무서운 바이러스가 들어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로 인해 이마 탑승객 중 갑작스런 발작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제한된 공간인 비행기 안에 있는 승객들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미 반 이상이 감염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직 백신도 없는 알 수 없는 전염병입니다. 그 비행기를 받아줄 공항이 있겠습니까?
공항 관제탑 책임자가 결정할 사항도 아닙니다. 국가 전체적인 문제로 확대도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책임과 권한이 막중하다 한들 어느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최고 지도자인 나라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결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 비상대책회의를 열어서 가능한 많은 책임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입니다. 정 급하면 측근의 중요 책임자들이라도 불러서 급히 의견을 모아 결정하겠지요. 아마 모두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국민 생명의 안전과 보호가 우선입니다. 그 외 어떤 국가적 이익이 따른다 해도 이 우선순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니까요.
테러가 발생하여 공포에 휩싸여도 가장 위협을 느끼는 곳은 하늘입니다. 혹시 땅에서 발생하면 여차즉시 도망할 공간이 있습니다. 바다에서라도 일단 곧바로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얼마간의 시간 물에 떠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그럴 만한 공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그냥 끝납니다. 비행기 사고가 그래서 가장 두렵습니다. 기내에 바이러스가 돌고 있다, 모두가 감염될 것이고 도망갈 곳도 없으니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빠른 감염, 바른 진행, 몸은 즉시 반응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덮입니다. 앞뒤 좌석을 분리해서 나눈다 한들 그 안의 공기가 어디 다른 데로 갈 곳도 없습니다. 그냥 돌아서 모두에게 삼켜질 것입니다. 조금 시간의 격차만 있을 따름입니다.
장거리 항공여행, 각자 나름의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런 사연에 아무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취하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봐도 결국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함께 마지막을 당해야 한다고 판단이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냅니다. 조금 전까지 아우성치며 발버둥 쳤어도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 침착해집니다. 차분히 말해줍니다. ‘사랑해’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워’ 등등. 결국 생명을 포기하면 무서울 것이 없게 됩니다. 이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우리는 그렇게도 아우성치며 아귀다툼까지 망설이지 않는 겁니다.
개인이 당한 억울함을 왜 불특정 다수에게 폭발하는 걸까요? 하기는 그렇게 만든 사회적 구조와 조직 등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어느 조직 안에서 발생하는 억울한 사연은 해결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개인이 조직과 대결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국가 조직이고 사회적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단체나 조직들, 작게는 크고 작은 기업이나 사업체도 해당됩니다. 아무튼 개인이 한 조직과 맞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법적 대응을 한다 해도 물량공세에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만한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발산하는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사회 전반에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함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상상을 초월한 테러입니다. 죽기로 작정하였으니 뭔들 못하겠습니까? 예쁘장한 얼굴이 무척이나 서늘합니다. 항공기 테러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이미 여러 편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테러, 게다가 함께 죽자는데 공포가 집합됩니다. 더구나 어느 나라도 받아주지 않지요. 결국 모두가 포기합니다. 그 사이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줍니다. 영화 ‘비상선언’(Emergency Declaration)을 보았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2022. 08. 13) 김종우 목사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맘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가슴을 뜯어내서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알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하는 행동을 보아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도 사실은 마음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행동을 기다리기 전에라도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0 :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말할 때 우리 안에서 주장하시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하신 동기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혹 두려워한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말할 수 있도록 주장해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다른 존재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주장하면 다행인데 반대로 사단의 악령이 주장한다면 전혀 다른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이 성령의 주장인가 아니면 사단의 주장인가 하는 것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는 말을 듣고서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는 말을 통하여 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영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선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누구를 경계시키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앞에 호칭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부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겠지요.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계하라고요? 영을 다 믿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속한 영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단에 속한 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보이지도 않는 영을 어떻게 시험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 말씀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는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거짓말을 전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다, 하고 전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참인 것처럼, 진리인 것처럼 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하라는 것이고 시험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그 거짓 선지자가 어디서 자기 말을 전하겠습니까? 교회 밖에서 불신자들에게 전한다면 우리 성도들이 걱정하거나 염려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들 안에, 즉 교회 안에 성도들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속한 사람은 사단의 악령이 그 속에 있으니 사단의 말을 하겠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5 : 19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의 말을 할 것입니다. 즉 사단이 주장하는 자입니다. 거기에 속한 자들은 다 그 말을 따라갈 것입니다. 요1서 4 : 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전하느냐 그리고 누구의 말을 따라가느냐 그것에 따라서 두 길로 갈라집니다. 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아멘!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된다는 것이지요. 고후 11 : 13 - 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단의 일군들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내가 마귀의 일군이다 하고 다가오면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적해서 싸우거나 자신 없다면 피하지요. 문제는 이 자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마귀의 사람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도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분명한 것은 이리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온다고 말씀하지요? 그 목표물이 누구입니까? 이리가 노략질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잡으려고? 바로 양을 잡으려고. 양이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단이 어디서 활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어디서 활동합니까? 이방 신전에서요? 성황당에서요? 아니면 절에서 활동합니까? 한 마디로 그런 곳에서는 애써 활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둑이 자기 집 물건을 훔치는 거 봤습니까? 그건 정신 나간 도둑이지요. 자기 집 물건은 도적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자기 것인데 거기 신경 쓸 일이 아니지요. 남의 것을 뺏어 오려니 속이고 가장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미혹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 안에서는 사단이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사단이 드라큐라입니까? 코메디입니다. 사단이 노리는 곳은 바로 교회이고 사단이 목표물로 노리는 표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백성이 섬기는 두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신자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소망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마땅히 하나님만 계셔야 하는데 또 하나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소위 ‘자칭 하나님’입니다.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입니다. 성전에서 즉 교회에서 그가 들고 있는 책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이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할 것입니다. 사실은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처럼 들리는 ‘자기 말’이겠지요. 그런데 듣는 신자들이 그것을 분별하겠습니까?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오는 말씀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우려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있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잘 살펴보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기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판별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이미 다 판별이 나와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참 메시야, 구원자로 이스라엘의 참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거짓 목자로 단정 짓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히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 그리고 율법사들 모두 성경에는 일가견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핍박하였고 종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고 율법을 지키려 목숨까지 걸었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비록 다른 경우에 말씀하신 것이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제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제사장들,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이 성경 아닌 다른 책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쳤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으로 가르쳤습니다. 더구나 일반 백성은 성경을 오늘처럼 개인 소장할 수 있던 때가 아닙니다. 지극히 일부 지도자들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전에 가거나 그 사람들을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전해주는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다른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여태 들었던 말씀과 달랐다는 말입니다.무엇이 달랐을까요? 왜 달랐을까요?
우선 왜 달랐는지부터 알면 자연히 무엇이 달랐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여기 말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로서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한답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이것이 곧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해줄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라이 땅을 지나시다 수가라는 성에서 잠시 들르십니다. 그곳 우물가에서 쉬고 계시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유대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갑니다. 아주 묘한 대화지요. 이 내용이 요 4장에 나옵니다. 자세한 것은 성경에서 확인하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 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과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는 물이 다릅니다. 요 4 :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긷는 물은 먹어도 금방 또 목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답니다.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여자가 말하는 물은 이 땅에 속한 물입니다. 땅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이 땅의 물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물이며 우리 영혼의 샘물이 되는,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늘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말하지만 유대인들은 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하늘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일이 그 때만 있고 지금은 없습니까? 우리가 여태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늘 이야기입니까, 땅 이야기입니까?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거부하고 밀어냈습니까? 한 마디로 자기네 말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미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지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잘못되었다고 아주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했습니다. 다시 오셔서 또 말씀을 전해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전하고 듣는 말씀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어쩌면 너무 피상적인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식으로만 신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우리 예수님이 구태여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마 7 :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찾는 이도 적다는데, 요즘 천국 가기를 소망하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요? 다시 말하지만 지금 당장 천국 가자고 하면 따를 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이제 정직하게 말한다면 고민이 생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단이 어디서 맹활약을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낚시꾼이 잡아놓은 고기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아니면 잡아야할 고기에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단은 불신 세상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공생애 직전 예수님을 시험하였지요. 세 번을 시험하였는데 마지막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4 : 8 -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한번만 고개 숙이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요? 천하만국이 이미 사단의 손아귀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에서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반기를 든 백성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그러니 어디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뺏어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명의 천사로 가장도 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전에 들어와 거룩한 자인 양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후 2 : 9절에서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단도 능력, 표적 그리고 거짓 기적까지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하기가 더욱 쉽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앞에 나타난 능력이나 기적 같은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볼 때 객관식 문제는 보통 4 가지 엇비슷한 답을 주고 그 가운데 정답 하나를 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두 가지는 이미 정답하고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가지고 끙끙거립니다. 분명 하나는 정답이고 남은 하나는 정답 같지만 정답이 아닌 오답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고민하지요. 우리가 진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우리가 어려워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진리를 바르게 깨달으면 쉬워질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 후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해졌습니다. 요 6 : 14 - 15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야 이 사람만 있으면 우리 모두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 임금을 삼자, 그리고 쫓아오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따라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6 - 2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부르자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어떻게 얻겠는가?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래 전 참기름에 가짜가 많이 생겨서 참기름을 광고하는데 별난 것들이 많았습니다. ‘참기름’이 무엇입니까? ‘참’ 즉 진짜 기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이제는 ‘진짜’ 참기름이 나오고 아니면 ‘순’ 참기름이 나오고 그 후에는 ‘진짜 순’ 참기름까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5 : 5 “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 아멘! 그런데 여기 말씀 보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라고 말씀합니다. 왜 구태여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거짓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거짓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마귀도 모두 영입니다.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런데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결정하기 때문이지요.
앞에 요 3장에서 보았듯이 두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가 있고 땅에서 난 이가 있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하나님의 보내신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너희’는 저 이방 나라 백성들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44절에서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이 누구에게서 났다고요? 마귀에게서. 아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합니까? 이유는 그들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짓을 말하고 저들도 마귀에게 속한 자들도 그 거짓을 듣고 믿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믿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계 22 : 15절을 보면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거짓말이 단순히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하는 그런 거짓말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거짓말하지 않습니까? 예,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빚쟁이에게 쫓기는 아빠가 어린 아들에게 ‘아빠 집에 안 계시다고 해.’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짓말, 안 합니까? 미안하지만 교회를 다녀도 신앙생활을 해도 크고 작은 거짓말은 일상 속에 흔히 있습니다. 소위 하얀 거짓말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의 거짓말도 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거짓말입니다. 모두 심판의 대상이라면 세상에 천국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짓말이 무엇인가 보겠습니다. 잠 30 : 5 - 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누가 거짓말하는 자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더하는 자입니다. 앞에서 요 8 : 44절에 마귀가 무엇을 말한다고 합니까?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그렇습니다. 자기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해서 자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계 22 : 18 - 19절에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 말씀에 멋대로 가감해서 자기 것을 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겠다, 하십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 안에 마귀의 영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닙니다. 당시 장차 오는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의 목자였던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도 몰랐습니다. 구약 성경에 숨겨놓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백성들 또한 모르는 것이 당연했겠지요.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자를 잘못 만나면 함께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다시 오셨다는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육체를 입고 오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보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 땅의 언어를 하늘의 언어로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이야기를 해주는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선택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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