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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우장춘 박사 사진.>>>
우리 초등학교 책에도 나온 세계적 육종학자..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하였으며... 노벨상 후보로도 명성을 날렸던.. 우장춘 박사..
그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바쪽 조선인이었지만..
한국을 무척 사랑했다지요...
그러나 그의 가계엔.. 말못할 어둔 그림자가 있었으니.. 우박사는 무척 괴로웠을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운명적인 괴로움..
나무 관세음보살...
<<<우장춘 박사 아버지 우범선.. 조선인 ..일본인 어머니.. 가운데 우장춘..>>>>
우장춘 박사의 선친..은 이런사람...
병서를 익혔고, 1876년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
1881년(고종 18) 별기군의
참령관이 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으며.
대원군이 실각하자 대원군파로 몰려 평안북도로 귀양을 갔다가 평안감사 민병석에 의해
1894년 8월 장위영 영관으로 발탁돼 군국기무처 의원에 임명되었고.
일본이 주도하여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7일 명성황후는 친일성향의 훈련대에 위협을 느끼고 해산과 무장해제를 명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답니다요...
<<<조선의 퍼스트 레디 민비..>>>
을미사변.. 일본낭인에 의한 조선 국모 시해사건...
그러나 민비 시해사건은 계획적이었고.. 무식한 낭인아니고 신문사고위직..
일본의 지식인 먹물이 많이 들어간,, 야마구찌현사람들..
이야마구찌는 일본에서도 "'백제계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곳이니
백제의 원한..백강전투의 패배가 아른것인가..
이사람이 바로 우장춘 박사의 선친이지요...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그는 당시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에게
포섭돼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당일 훈련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약속대로
전날 해산한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동원하였다는군요.
그는 왕후의 시신 뒤처리도 맡아 처리했으며.
왕비의 시신을 태우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그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가 땅에 묻어버렸는데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는군요
최근에 발견된 을미사변후 일본 관리가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 의하면..
일본인 자객들이 칼로 약간 상처를 입힌후.. 옷을 벗기고... 국부검사를 하고.
시해하였다는 기록..살아있을때..강간을 하였다는기록...
소설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도 이와
흡사한 대목이 있는데....
세계역사상 이렇게 잔인한 장면은 없었다지요..
<<<고종황제....비운의..독이 든 식혜 드시고 그도 암살당했으니
돌아가시고도 눈을 못 감으셨다는군요.>>>
우범선을 죽인 조선인 고영근은 이런사람이었습니다
황국협회가 수구파의 폭력단체로 전락한 것을 깨닫고, 이를 탈퇴하여
당시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이고 있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답니다요...
보부상의 내부사정을 잘 알았으므로,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파괴를 준비하는
황국협회의 보부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
개신유학적인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동도서기파에서 발전한
국내사상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으며, 독립협회의 부회장 또는 회장대리급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는군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갔다는설이 유력하며..
우법선 시해후 일본 경찰에 자수.. 교도소 생활하다..
고종황제의 도움으로 풀려나,,..조선에 와서 말년에 능참봉을 하다
편안히 영면 하였답니다요...
조선의 열사 한분을 우리가 잘모르고 있었으니 죄송할따름입니다요..."".
<<<,고종황제와순종황제..>>>
<<<<알렌박사..>>>
<<<<우리친우 일고43 김호중 부친.. 김용운 박사 한대 석좌교수.. 수학자
일본에서 태어나셨답니다요...>>>.
<<아래의 글은 김용운 박사님 강의 내용>>>
<<<<김용운 박사의 말씀...서중일고 43 김호중..< 내과의사>.의 부친.. 일고에서도 봉직.>>>
아시다시피 백강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이 당·신라 연합군에 패배한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은 백제의 분국, 즉 속국과 비슷했습니다. 일본어로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말 ‘큰 나라’에서 온 것입니다. 백제가 일본의 본국이었다는 뜻이죠
. 당나라와 신라에 패퇴한 뒤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수가 3만20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죠
. 이들은 나중에 일본 정치권의 지도층을 형성하는데 그들의 가슴에는
항상 신라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 저는 이걸 ‘원형’이라 부릅니다. 이런 집단 무의식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고,
이게 한·일 관계를 매번 꼬이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로 비슷하고 가까워서 더욱 미워하는, 일종의 ‘근친 증오’라고 볼 수 있죠.”
. 하지만 제 눈엔 명확히 보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역사적 증거들이 남아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일본 야마구치현이라고 아시죠? 여기가 바로 백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근데 희한한 건 이곳이 바로 한국 침략의 사상적 토대가 된 정한론의 발상지라는 점입니다.
정한론의 원조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해 조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을미사변을 일으킨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 등이
하나같이 야마구치현 출신입니다. 아, 깜빡했네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향 역시 야마구치현입니다.”
양국의 갈등 구조를 이루는 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좀 전에 말한 양국의 집단 무의식이
그 하나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끼어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이 또 다른 한 축입니다
. 이런 기본 구조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 중국이 부상하면서
우리나라가 다시 외교적으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1000년 묵은 집단 무의식은 쉽게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정학적 특수성은 아예 바꿀 수도 없는 요인입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현 단계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는 미래로 넘기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게 합리적입니다.” <,이상 김용운 박사님 말씀>>. <<,김용운 박사 저서..>>>
운명은 이다지도 잔인하단말인가...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형제간의 싸움이지요.....
이스라엘과 아랍..팔레스타인..I S와의 싸움도 결국 형제간의 싸움..
골육상쟁이란 이를 두고 하는말이니
세계를 시끄럽게하는것은 모두 이 모양이니...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아는사람이 더 무섭다는 우리 속담도 있으니....
나무 아미타불,,관세음 보살...
<<<,김용운 박사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