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96신]나쁜 피, 발본색원拔本塞源에 나서다
어제 모처럼 전화에 반가웠던 친구야.
내가 좋아하는 잡지 『전라도닷컴』7월호에 내가 너에게 쓴 편지가 ‘새살새살 찬샘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더라.
하하. 재밌는 일이지. 편집장에게 카톡으로 이런저런 생활글을 자주 보내는데, 그쪽에서 알아서 골라서 싣는다.
아무래도 나는 상관없지만. 주제가 마침 시의에 맞는‘내 평생 처음 지어보는 논농사’였거든.
모를 심어주는 깨복쟁이 친구의 사진도 크게 나오고.
요 며칠, 연속으로 논에 ‘피’를 뽑고 있다. 대부분 초기와 중기제초제를 뿌리면 피를 비롯한 잡풀들이 다 녹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논만 피가 못자리하듯 고랑을 덮어버려 속이 상해 죽는 줄 알았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연일 흐린지라, 피 뽑기 딱 좋은 날씨, 아예 발본색원拔本塞源에 나섰다.
그런데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고, 끝도 갓도 없는 중노동이었다.
처음엔 물장화와 고무장갑을 신고 끼고 했는데, 이것도 너무 불편하고 갑갑해 벗어던지고 맨발 맨손으로 하니
능률은 올랐지만, 허리를 펼 때마다 무한대의 작업량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오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피부터 주인이 초보농사꾼이라고 우습게 알았는지,
하필이면 왜 우리 논에만 ‘피 반 모 반’이 됐을까?
농약으로 해치우려도 심각한 비극이 아닌가.
흙 범벅으로 한참 피를 뽑고 있는데, 친구의 전화다.
어렵게 전화를 받았는데 “뭐 하고 있냐”하여 “피 뽑는 중”이라 했더니 “웬 헌혈?”이라고 하여 욕이 절로 나왔다.
“그 피가 그 피가 아니거든”하니까 “니가 피와 모를 구별할 줄 아냐”며 야지를 놓아 피익 웃었다.
모를 찌듯 피를 뽑아 논바닥에 깊숙이 파묻고 흙으로 덮어버리면 지까짓 것들이 죽고 썩어 거름이 되겠지.
옛날 부모들이 하듯 피를 뽑은다는 게 아예 김을 매버렸다.
벼는 주인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잘 자라 수확이나 엄청 많았으면 좋겠다.
4다랭이(1다랭이는 200평 3마지기, 1필지라고도 한다) 중 2다랭이를 나흘에 걸쳐 완료.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그래도 다행. 이 정도 뿌리를 뽑았으면 이제 피만 죽이는 농약은 안해도 될 듯하나,
나머지 2다랭이는 어떻게 한담?
땡볕 더위가 오기 전에 작살을 내야 할 터인데, 흑흑.
양질良質의 벼포기에 웬 나쁜 피라니?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피들을 일일이 뽑았을까?
그 끈질긴 생명력이라니? 피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최소한 3년은 걸린다는데.
초당옥수수 수확에 바쁜 옆논의 아주미가 한마디 거든다.
“어찌야 쓰까? 토시 끼고 혀! 팔목이나 장딴지 나중에 쓰라려. 그나저나 모들이 시원허것네” 그렇다.
내가 생각해봐도 모들이 정말 시원할 것같다. 잘한 일이다.
그동안 벼들은 주변에서 자기보다 웃자라며 영양분도 뺏아먹는 잡풀이나 피 때문에 말은 못하고 얼마나 성가셨을까?
주인공인 모들이 좋으라고 주인의 허리는 아작이 나고 있다.
피는 이 사회로 치면 나쁜 생각만 갖고 있는 좀벌레 인간들같다.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악惡의 뿌리들.
그러니 아예 그 뿌렝이(뿌리, 근본)부터 싹을 잘라야 한다.
조금만 지나면 완전히 활착을 해 뽑기가 몇 배 더 어렵다는 걸, 부안 촌놈출신인 너도 잘 알겠지.
너도 많이 해봤지?
‘피죽도 못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다’는 속담도 있지만, 보릿고개엔 진짜 피죽 한 그릇 먹지 못해 배를 곯았을까?
불쑥 예전 인문학특강(코로나 때문에 전면 중단됐다. 흑흑)때 생각이 떠올랐다.
“사직단社稷壇의 사社는 ‘땅귀신 사’자로 토지의 신’직稷은 ‘ 피 직’자로 곡식의 신’이며, 시월 상순에
임금이 초헌관이 되어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는데
서양으로 치면 ‘추수감사제Thanksgiving day’”라고 신나게 설명하던 ‘호시절好時節’말이다.
종묘宗廟와 함께 500년 동안 내려온 조선왕조의 근간根幹이던 사직단을
일제강점기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형편없이 축소시켜 사직공원社稷公園을 만들고,
겸재 정선이 그렸던 고색창연한 사직송社稷松도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엉뚱한 신사임당 동상을 세웠다던가.
아무튼 ‘그 피’가 나를 이렇게 괴롭일 줄이야,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일.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제대로 고생 한번 했는데,
논농사든 밭농사든, 그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묵묵히 하는 까닭은
‘도道 닦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집에서 끼니 챙겨주는 아내가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련만, 이것도 할 수 없는 일.
그래도 이런 힘든 농사일을 해보는 내가 이럴 때에는 마음에 든다.
이런 일 평생 한번도 해보지 못하는 친구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흐흐.
삽질은 해봐야 삽질이다. 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삽질’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나로선‘금수저’와 ‘양지陽地’가 절대 부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친구야, 신새벽 또 수다가 길어진다.
너는 자치기(골프)를 치고, 나는 논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어 피를 뽑지만,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일맥상통一脈相通한 부분, 말하자면 공통분모共通分母가 많지.
그러기에 몇 달 얼굴을 보지 못해도, 불쑥 전화에 미소를 짓기도 하는 것 아니겠냐.
잘 지내라. 줄인다.
7월 10일
임실에서 낙향거사가 쓴다
첫댓글 낙향거사님, 천하 대장사일세!
상상불허이구먼.
덕분에 모들이 시원하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