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이방인을 보고
영화가 슬슬 나온다고 할 때쯤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어릴 적에 괜히 멋있어 보였던 낱말이기도 했고
그라운드라는 건 우리말은 아니나 어쩐지 ‘여기는 우리구역’이라는
낯설지 않아 뵈는 느낌이기도 해서
이 영화라는 구역에서 멋있는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았습니다.
영화관람 후에 새삼스레 알았던 것은
재일동포 야구단 모두를 찾아 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이후에
고교야구인기가 완전히 식기 전 마지막 TV중계였던
그 해의 기념비적인 경기를 보았던 제게 이 영화를 계기로
그해의 야구단 여러분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재일동포 고교야구단(심판의 방해와 다른 팀의 견제가 가장 심했음)이
전통적으로 인기도 실력도 있던 우승후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지요.
그해의 경기는 상당히 치우친 심판진들의 미심쩍은 심판 앞에
경기를 관람 중이던 아버지와 오라버니 저는 그때마다 분기탱천 하였고
공정치 못한 심판에 울화가 치미신 아버지께서
별안간 후반부에 접어든 야구중계를 TV를 꺼버리시면서 못 보게 하신 다음
돌아누워 버리시는 바람에 이후 오라버니와 저는 몰래 라디오를 틀어서
그 생중계를 이어 들었다가
재일동포 고교팀이 부상과 견제구와 편파판정(해설자도 지적하는 상황)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결국에는 실점을 만회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문 것이 아쉬웠던 경기.
바로 그 경기를 치른 사람들의 그 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주신 것에
이 영화를 만들어주신 김명준 감독님께 대단히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화면에서는 홈 뒤에서 경기장을 조망하는 시야 안에서
투수가 공을 준비하는 장면이 중계에서 가장 많이 잡힌 장면이었는데,
마침 그 장면을 영화 속에서 보는 순간 그 투수의 이름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당시는 헷갈렸던 이름이라는 것도 기억났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TV를 꺼버리신 바람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양시철인지 양수철인지 헷갈렸던 실력 있던 고교 투수의 이름을 다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말아서 얼마나 아쉬웠던지...
오라버니랑 내기를 하였는데 이름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기가 무산되었습니다.
그 날 준우승이었기에 다음날 신문을 찾아봐도 우승한 팀의 이야기밖엔 안실려서
재일동포 야구단 명투수의 이름을 이제 영원히 알 수가 없게 되었구나...하는
땅을 치는 후회와 아쉬움에 한 동안 신문 스포츠란은 죄다 뒤적였지만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는 게 내내 아쉬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투수분 성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영화를 보고서 개운하였던 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 부분입니다.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개인적으로 이분 팬이었다는 걸 영화이야기하면서 잔뜩 사심을 담아 남겨봅니다.
팬이 되었던 까닭 :
투수로써 실력 자체가 좋았습니다.
차분한 성격으로 보인데다 혼자서 투구를 하여 피로가 상당히 쌓인 걸로 추정됨에도 체력이 매우 좋았던 건지 투구가 매우 안정적으로 보였습니다.
타 고교팀의 투수와 달리 거칠지 않고 행동 등이 매우 신사적이었습니다.
잘생겼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 제가 재일동포 야구단에 친밀함을 가졌던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 곳에서 오느라 일단 고생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한 학교도 아니고 일본 전국에서 모여서 오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기 오면 아는 사람도 없고 응원해줄 사람도 적어서 우리라도 응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일동포 고교야구팀이 잘하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야유가 들려서 고향이라고 와서 대접은 못 받더라도 칭찬은 못해줄지언정 왜 야유인가 싶은 마음이었고, 어린 학생들인데 얼마나 마음이 안좋을까 싶었습니다.
실력이 상당히 우수했기에 실력만이라면 우승인데 늘 편파판정을 겪어야 하고 우승후보에만 머무는 게 아쉬웠습니다. 판정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우승 몇 번은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1982년 멤버의 경우 이전보다 훨씬 정예멤버 느낌이 들었고 실력이 대단했기에 우승을 예상했었는데...
저는 이 경기의 아쉬움과 편파판정 의혹으로 이후 고교야구는 접었습니다.
물론 야구도 접었습니다.(관람만)
경기는 경기다워야 하고 거기서는 누구든지 규칙에 따라야하는 법이라 생각하니까요.
그 경기장에서 늘 초대되지만 잔칫상에서는 늘 멀게 앉아야했던 우리들의 영원한 야구단
재일동포 야구단의 이야기는
그때 당시 현역이었기에 자랑스레 얘기하던 장훈 선수의 이야기와 함께
우리 한국 야구사의 발전을 가져온 소중한 존재이자 맞수로 남아
오늘의 한국야구의 기틀을 이뤄내었던 마중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시고 동포들의 마음속에 앙금 같이 남았던 조국으로부터의 차별적 태도를,
야구실력이 낮아서 배워야만 했던 우리들 과거의 열등감의 표출을,
재일동포 고교야구단 멤버들도 알아주시고 이해해주고 계셨으면서도 한편으로
이분들도 그때는 어린 학생들이었다고 그때는 상처받는 마음이 들었을 수가 있다고
우리들 스스로가 넓은 마음으로 격려하고
다독거리는 마음이라도 가져주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가섰기에 영화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주시고
재일동포 야구단에 대한 궁금증에서 저 같은 사람을 건져주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일상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런 일상의 한 부분을 평생 잊거나 외면하기까지 하고서 살아야하는 재일동포의 이야기.
그들의 삶의 그라운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한 발짝 옆에 서서 내 동포들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마무리가 안되어서..^^;;; 제 개인적인 소감을 여기까지 적겠습니다.
첫댓글 읽어내려가다가 ‘우리가 그 한 발짝 옆에 서서 내 동포들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에서 울컥...
어제밤에 이 글을 읽고 부산영화제에서 만나뵈었던 김근님 생각이 났어요.
저는 야구를 잘 몰라서 칼있으마님처럼 야구와 관련된 깨알같은 추억조차 없지만, 그날 그 운동장에 서서 햇살과 바람과 고향의 냄새를 맡으며 주위에 있던 친구들 모르게 '참 좋다' 혼잣말을 했을 고교생 선수들의 얼굴이 떠올라 먹먹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지 그대로 느껴지는 글입니다.
그런 추억이 있으셨군요. 누구보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양시철 선수는 나이 마흔 아홉에 결혼을 하고 축산업을 하고 계십니다. 원래 야구를 더 하려고 했으나 대학시절 큰 부상을 입어 야구를 그만두셨어요. 말씀하신대로 차분하시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근님 메신져나 sns 전혀 안되더라고요.
이메일 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방법이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