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튼실한 여인의 엉덩이 또는 젖무덤같이 보이던 반야봉 두 봉우리가 오늘은 한 개로 보인다. 남쪽으로 삼각추처럼 우뚝 솟은 천황봉을 바라보며, 주능선을 오르내리면 동쪽 산동면과 서쪽 보절면 마을들과 주변의 산들이 다가오고, 전망 좋은 소나무와 바위능선길이 이어진다. 천황봉의 기세에 눌렸는지 백두대간에 우뚝 솟은 고남산도 너무 낮아 보인다. 또 보현사나 북쪽 능선에서는 거대한 암봉으로 보였던 상사바위도 밋밋한 육산으로 다가온다.
▲ 1 100년 된 무궁화 나무.2 귀정사.3 귀정사 하산길.4 귀정사 부도.
정상 아래에서 용평에서 올라오는 지름길을 만나고, 밧줄에 의지해서 암봉을 힘들게 오르면 만행산 주봉인 천황봉에 닿는다(용평교에서 2시간30분 거리). 전북산사랑회와 남원시가 설치한 이정표가 보현사를 알려주고 천황봉이란 표석이 있다.
정상에는 평평한 바위가 깔려있고, 지리산 연봉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곳을 조망할 수 있어 가슴이 후련하다. 덕과면과 남원에서 온 100여 명의 산악회원들이 일찍 도착해서 시산제를 올리고, 저마다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일출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오전 7시47분, 드디어 여명이 밝아오더니 구름 아래로 찬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국가안위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했다.
오늘따라 지리산 천왕봉보다 반야봉이 직선거리라서인지 더 우람하고 높게 보였다. 하산은 상사바위를 거쳐 보현사나 용평교, 또는 정상에서 지름길로 용평교 코스, 귀정사 코스가 있다. 고남산(송신탑)을 바라보며 눈 쌓인 동릉을 내려가면 묘소가 많고 송림과 바위가 어우러진 능선에서 북으로 팔공산, 동쪽으로 고남산이 손짓한다.
귀정사 뒤편의 느티나무숲에 닿는다(천황봉에서 1시간 거리). 눈 쌓인 모습도 정겹지만 가을이면 유서 깊은 천년고찰 귀정사 주변의 넓은 터와 산자락에 빨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어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주지 스님과 정담을 나누며 감잎차와 매실차에 담긴 그윽한 향에 산사와 산객이 취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최근 사찰 주변에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한봉을 많이 키운다. 귀정사 입구의 부도 2기 중 1기는 다른 곳에서 옮겨왔는지 머리 부분이 훼손됐다. 요동 농가 한 켠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궁화 나무(수령 100년)가 서있다. 일제시대에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모두 베어버렸으나 이 나무만 살아남아 종자를 채취하여 전국에 보급한 홀꽃 무궁화나무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지팡이를 두 개나 집고 두 마리의 개집 옆에 안내판과 함께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어 안타깝다.
시멘트도로를 걸어 나오면 대상리 한재 마을 버스승강장에 닿는다(천황봉에서 1시간30분 소요). 승합차나 승용차로 귀정사 주차장까지 진입하면 30분을 절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