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펜 한글. 세종 탐구 기행
일시:2015년 5월 7일 목요일
장소:용산 국립한글박물관, 여주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 용산 국립 한글박물관
국제펜한국본부에서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한글과 세종 탐구로 탐방하는 기행이다. 80명이 두 대의 버스로 떠났다. 국제펜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 오성빌딩 앞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했다. 먼저 간 곳은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이다. 국립 한글박물관은 한글 관련 유물과 자료 수집 보존과 전시 그리고 한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이다. 한글 창제의 역사와 원리를 배우고, 한글의 다양한 쓰임새를 조명하여 한글의 문자적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까지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런 취지에서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국립 한글박물관을 개관했다.우리는 한글박물관에 각자 입장하여 2층과 3층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박물관 주전시실은 2층 상설전시장의 한글이 걸어온 길이다. 한글이 없던 시대의 문자, 훈민정음 해례본 어제 서문, 한글 창제의 원리 등을 알게 해준다. 또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한글이 널리 퍼지게 되는 과정과 일상 속에 자리 잡는 모습도 전시해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 사용이 금지 됐지만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낸 역사는 위대하다. 사라진 옛말과 지방의 토속적인 말, 남북한의 말을 알여주고, 세종대왕에게 편지쓰기 코너도 있다. 역사적인 한글자료도 많이 있고, 그 옛날 사용하던 타자기도 있다. 세종대왕의 훌륭하신 업적이 빛나는 공간이다. 한글이 익숙지 않은 외국인과 다문화 주민이 한글을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 배움터도 있다. 개관 특별전시실에서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테마로 다양한 예술, 영상, 설치 작품을 보여준다. 종묘 정전에서 녹음한 빗소리 설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1층에는 도서관 한글누리실이다. 어린이 한글 교육과 한글 관련 문화예술 자료 등이 많은 전문 도서관이다. 옛 책을 그대로 옮겨온 음식디미방, 홍길동전 등이 있다. 우리는 문인 부부다. 오늘도 함께 한글과 세종 탐방 기행에 왔다. 글을 쓰는 작업에서 한글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매체다. 항상 한글에 대한 소중함으로, 세종대왕에 대한 감사함으로 올바른 글을 써서 세상을 밝히고, 문인의 사명에 충실할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이곳 저곳 둘러보았다. 건물양식이 초현대적으로 아주 독특하다. 정원은 꽃과 나무를 잘 가꾸어 아름다운 조경이다. 넓게 앉은 자락이다. 학생들이 견학을 많이 온다. 우리는 한글박물관 안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놋그릇에 담아온 비빔밥으로 중식을 했다. 그리고 여주 세종대왕릉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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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세종대왕릉 영릉
서울 용산 국립 한글박물관을 떠나 2시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여주 세종대왕릉 영릉이다. 영릉이라는 이름은 다음에 탐방할 효종대왕릉과 같다. 그러나 한자가 다르다. 세종대왕릉 영릉은 英陵이고, 효종대왕릉 영릉은 寧陵이다. 이곳은 세종대왕과 부인 소헌왕후를 합장한 묘소다.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서 올라갔다. 긴 계단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세종대왕릉이 산자락에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묘지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 세종대왕, 오른쪽에 부인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다. 고개 숙여 묵념을 하고 잠시 휴식하며 세종대왕에 대하여, 한글창제에 대하여 탐구했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 4대 임금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간 재위하고, 54세로 승하하셨다. 태조 6년 1397년 음력 4월 10일, 양력 5월 15일에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탄신일에 맞추어 매년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조선 제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른 것은 총명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우리나라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매년 양력 5월 15일 탄신일에는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개최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창제다.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세종 25년 1443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어 1446년에 반포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숭상하던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였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 해시계와 자격루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다.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시켰다. 박연 등이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여러 방면에서 참으로 위대하다. 지금도 묘지 속에서 이 나라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하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토록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 지켜온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조국을 잘 지켜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묘소에서 내려왔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700m를 걸어 효종대왕릉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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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효종대왕릉 영릉
세종대왕릉 영릉에서 산길을 따라 700m를 걸어서 이곳 효종대왕릉 영릉에 도착했다. 조선 제 17대 왕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소재한다. 능원 입구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이 흐른다. 아주 넓은 자락으로 앉아있다. 영릉에 오르기 전, 산길을 걸어온 어려움으로 잠시 휴식하며 효종대왕에 대하여 탐구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광해군 11년 1619년에 태어났다. 인조 4년 1626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인조 23년 1646년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인조 27년 1649년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재위 10년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셨다. 잔디밭 길을 따라 묘소로 향해 올라갔다. 일반인에게 묘소 앞까지 개방하여 가까이 갈 수 있게 한다. 세종대왕릉과는 다른 형태다. 세종대왕릉은 부인 소헌왕후와 합장 묘소인데 이곳 효종대왕릉은 부인과 따로이 있다. 아랫쪽 묘소가 부인 인선왕후 무덤이고, 윗쪽 묘소가 효종대왕 무덤이다. 효종의 능은 현종이 즉위하던 1659년 구리시에 있었는데,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하여 1673년 이곳 여주로 옮겼다. 또한 효종의 능을 이장한 이듬해인 1674년 부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여 왕릉 앞에 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분을 마련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 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세종대왕릉 영릉과 효종대왕릉 영릉은 같은 영릉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세종대왕릉 영릉은 英陵이고, 효종대왕릉 영릉은 寧陵이다. 같은 능역 안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함께 1970년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 유적관리소에서 관리한다. 효종대왕릉 영릉寧陵 앞에서 국제펜 문인들의 단체기념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잠시 재실에 들러 탐방하고 귀가하였다. 5월의 푸르른 날에 아주 뜻깊고 보람찬 국제펜의 문학 탐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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