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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조선 전기 청백리(淸白吏) 손중돈(孫仲暾)
이장희 추천 0 조회 36 16.02.27 16: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전기 청백리(淸白吏) 손중돈(孫仲暾)

자 료 / 하얀그리움

○ 1463년(세조 9)∼1529년(중종 24). 조선 전기의 문신.
○ 자(字)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경절(景節),
○ [생원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0위,
○ [문과]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
○ 본관은 경주(慶州). 손사성(孫士晟)에 손자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유복하(柳復河)에 딸이고, 부인은 홍흠손(洪欽孫)에 딸과 최한남(崔漢男)에 딸이다,
○ 본관소재지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시조는 손순(孫順)으로 득성조(得姓祖)인 대수부의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으로 효행이 알려져 835년(흥덕왕 10)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을 알 수 없어서 후손인 손경원(孫敬源)을 기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 성종 13(148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 성종 15년(1484) 4월 부친 계천군(?川君) 손소(孫昭)에 상을 치뤘다, 부친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근신하며,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고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번번이 어버이를 위하여 외방(外方)에 보임되기를 청하였는데, 성주·진주·안동의 세 고을을 맡았을 때에 다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어졌다.
○ 성종20(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정9품)로 관직에 오르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정7품)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 연산 3년(1497)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정5품)에 이어 양산군수(梁山郡守-종4품), 김해군수(金海郡守), 성균관 사예(司藝-종4품)를 거쳐,
○ 연산 9년(1503) (司憲府) 장령(掌令-정4품)에 이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정3품)이 되었는데,
○ 연산 11년(1505) 전에 대간(臺諫)으로 재임중 체아직(遞兒職)을 내시부(內侍府)에 옮기는 것을 논계하였던 죄목으로, 형신(刑訊)을 받고,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당하였다.
○ 연산 12(1506)년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그의 아우인 진성 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이 즉위하였다,
○ 중종 즉위 후 상주목사(尙州牧使-정3품)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 중종 2년(1507) 10월 비단을 하사 받았다,
○ 중종 3년(1508) 5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부지런하고 삼가며 청렴하고 공평하여, 백성에게 근심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하고 장계(狀啓) 하였고, 이에 다음해 중종4(1509)년 1월 향표리(鄕表裏) 1습을 하사 받았다,
2월 영사 박원종(朴元宗)이 포상(褒賞)의 은전을 한갓 표리(表裏)만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아뢰니, 근실히 봉공하여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고 정적이 뛰어나니, 특별히 1자급(資級)을 올려 주라 명하였다,
【중돈은 계림군(鷄林君) 손소(孫昭)의 아들로 양산(梁山), 김해(金海)을 역임하여 모두 치적의 명성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치효(治效)가 들리게 된 것이다. 그 아버지 소(昭)가 일찍이 수령이 되어 치행(治行)이 으뜸이었으므로 세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아들로서 능히 계승을 하였으니,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겠다.
항상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청렴하고 개결함은 나로서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
이어서 10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정3품 당상관)가 되었다, 수일후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경연청(經筵廳)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다,
○ 중종 8년(1513) 3월 임금이 친히 소릉(昭陵) 망제(望祭)의 향축(香祝)을 전하였는데, 승지 등이 합문(閤門)에 나아가기 전에 상이 이미 전좌(殿坐)하여, 사람을 시켜 속히 들기를 재촉하매 허둥지둥하면서 나아갔기 때문에 다른 승지들과 같이 파직 되었다가, 8월 다시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어서 12월 사간원 으뜸 벼슬 대사간(大司諫-정3품)이 되고,
○ 중종 9년(1514) 11월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다, 12월 우의정(右議政) 김응기(金應箕)가 병조 판서 김전(金詮), 좌부승지 조원기(趙元紀) 등과 같이 청백리에 천거하여,
○ 중종 10년(1515) 2월 청백리에 뽑히고, 한자급 승진 하였다,
이해 윤4월 여러 대신과 같이 국상의 졸곡 전에 어물(魚物)을 구청(求請)하여 뒷날 쓰려고 하여 사헌부 탄핵을 받았다, 12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종2품)가 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손중돈은 본디 강직(剛直)으로 일컬어졌으므로, 수령(守令)들이 중돈이 감사(監司)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두려워 꺼리는 사람이 많았으나, 임지로 내려가서는 특별한 성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마음이 변했는가 의심하였다.
○ 중종 11년(1516) 6월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우(李?)는 청렴하고 간결하여 사(私)가 없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신공제(申公濟)는 근면하고 근신하고 청렴하고 재능이 있으며, 현풍 현감(玄風縣監) 박찬(朴璨)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요동되지 않아서, 모두 서리(胥吏)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복종합니다, 하고 장계(狀啓)하여 포상 받게 하였다,
○ 중종 12년(1517) 4월 공조 참판(工曺參判-종2품)을 거쳐, 예조참판(禮曺參判)이 되고, 7월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 경사(京師)에 갔다가 12월 돌아와 사헌부 으뜸벼슬 대사헌이 되었는데.
○ 중종 13년(1518) 3월 천자가 적에 함락되고 황태후가 승하했다는 것 등이 허언이라는 말만 듣고, 천자가 있는 곳은 탐문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크게 전대(專對)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체직 되었다,
이어서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종2품)에 임명 되었다가, 곧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 중종 14년(1519) 9월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체직 되었다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세 정승의 잉임 요청으로 잉임 되었다,
○ 중종 15년(1520) 2월 사헌부(司憲府) 으뜸벼슬 대사헌(大司憲-종2품)이 되었다, 10월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사헌부에 요청으로 들어 주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손중돈은 청검(淸儉)하고 박직(朴直)하며 용모도 그 마음과 같았다. 뒤에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때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남을 죄에 빠뜨리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근거 없는 말을 꾸며서 이리저리 퍼뜨려 같은 말로 부동하는 자가 많아진 뒤에 드디어 공론이라 하여 대각(臺閣)에서 발론하므로 아무도 면할 수 없었다.
또 유언(流言)하기를 ‘재상(宰相) 가운데에 올감[早?]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자가 있는데, 경상(卿相)들이 모두들 두려워한다.’ 하고 마침내 손중돈을 지목하여 모함하였다. 손중돈이 뒤늦게 듣고서 스스로 옥(獄)에 나아가 변명하려 하였는데 정광필(鄭光弼)이 ‘공이 혐의를 벗으면 허물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하니, 깨닫고 그만두었다.
○ 중종 17년(1522) 4월 공조 참판(工曺參判)을 거쳐, 8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 중종 18년(1523) 9월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 중종 19년(1524) 11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고, 중종 20년(1525) 7월 연임 되었다, 윤12월 예조 참판(禮曺參判)을 거쳐,
○ 중종 21년(1526) 3월 공조 판서(工曹判書-정2품)에 올랐다, 8월 자헌 대부(資憲大夫-정2품)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정2품)이 되고, 9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11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 중종 22년(1527) 4월 월성군(月城君)에 봉하여졌다, 이어서 9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0월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 중종 23년(1528) 1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8월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종1품)에 오르고,
○ 중종 24년(1529) 4월10일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손중돈은 계천군(?川君) 손소(孫昭)의 아들인데, 대대로 청검(淸儉)을 지켜 시종 변치 않았다. 여러번 남쪽 고을에 보임되고 네 번 방면(方面)을 맡았는데 다 성적(聲績)이 있었고, 상주(尙州)의 백성은 지금까지도 추모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늘 직무 이외의 일에는 방문하는 것을 일삼지 않으므로 관아의 일이 파하면 곧 바로 제집으로 돌아갔고, 정병(政柄)을 잡았어도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였다. 만년에는 권세에 빌붙는다는 비방이 있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안다.
경주의 동강서원(東江書院),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 참고문헌 - 성화 19년 계묘 식 2월일 생원진사 방목(成化十九年癸卯式二月日生員進士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선고(淸選考), 관찰사선생안(觀察使先生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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