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게 노력(正精進)합시다!-생사참구정진 8정도법회
한량없는 착한 법을 얻으려면
부지런함을 근본으로 하고
부지런함을 원인으로 하며
부지런함을 머리로 하나니
부지런함을은 모든 착한 법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된다.
『중아함(中阿含)』의 「유경(喩經)」에 나오는 말씀인데 공부하려는 바른 노력 즉 정정진(正精進)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게으르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한량없는 착한 법을 얻을 수 있고, 그 노력이야말로 착한 법을 얻는 근본(根本)이요, 원인(原因)이며, 머리(首)가 되는 것입니다.
'손발을 움직여야 행운도 만난다.'는 영국 속담처럼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있어야만 기적처럼 느껴지는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우리는 성현들에게서 무수히 들어 왔습니다.
오늘 배울 법문은 그냥 노력이 아닌 바른(正) 노력(精進)으로서 8정도의 다섯 번째 지분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노력인가? 바른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른 노력으로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善趣)로 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노력으로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한다.″
『잡아함경』 제28권 788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동안 우리가 공부해 온 8정도의 다른 지분처럼 세속의 바른 노력과 세속을 벗어난 바른 노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른 노력은 빨리어로 '바른'에 해당하는 삼마(samma)와 '노력'을 뜻하는 와야마(vayama)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생활(正命)을 토대로 건전하고 선한 힘에 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 같을 것 같지만 같은 물이라도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 듯이, 노력이라는 말 자체만으로 그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바른'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그 의미를 두는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제일가는 것은 다 의미가 있다'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그 방향성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같은 제일이라도 명탐정 샬록 홈즈는 도둑을 잡는데 제일이고, 괴도 뤼팡은 물건을 훔치는데 제일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하늘과 땅의 경우처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선한 상태의 힘을 기울이는 것은 그것이 생사윤회의 과정 안에서 좋은 곳으로 태어나는 공덕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기는 하지만 결국 생사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속의 바른 노력인 것입니다.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노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의욕(欲)과 정진과 방편(方便)이 뛰어나고 견고하게 섰으며 정진을 꾀하여 능히 감당해 내되 마음으로 거두어들여 늘 쉬지 않는 것을 일러 세속의 바른 노력이라 한다.”
『잡아함경』제28권 788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경전의 말씀에 의하면 세속의 바른 노력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과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노력과 또 그 일을 어떻게든 성취하기 위해 방법론을 도입하는 방편이 뛰어나고도 견고하게 서서 노력을 기울여가되 쉬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얼핏 보면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지만 작은 물방울이 돌이나 쇠를 뚫는 것처럼 지극한 노력은 그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은 이제 믿을 수 있겠지요? 이 바른 노력이 보다 더 불교적, 진리적이게 할려면 세속의 바른 노력에서 한 단계 더 차원 높은 세속을 벗어난 바른 노력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노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불제자가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도리에 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여 번뇌 없는 기억을 따르는 마음의 정신작용(心法)으로 의욕을 내고 정진하며 방편을 씀이 부지런하고 뛰어나며 견고하게 섰으며, 정진을 꾀하여 능히 감당해내되 마음으로 거두어 늘 쉬지 않는 것을 일러 성현의 바른 노력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잡아함경』제28권 788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다른 법문에서 배운바 대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사유체계는 중층적이고 점진적이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법문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특히 사성제와 8정도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8정도가 독립된 하나의 법문이면서도 4성제의 네 번째 법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4성제의 결론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또한 그렇습니다.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노력은 바로 이 4성제에 대한 지극한 수행(修行)을 통해 열반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올바른 정진에는 불교수행의 근본인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4정근(四精勤)이 필수적으로 소용됩니다.
그것은 첫째,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나쁜 것, 불건전한 것 즉 악(惡)의 발생을 방지하는 율의근(律儀勤)과 둘째, 이미 생겨나 버린 나쁜 것, 불건전한 것 즉 악(惡)을 제거해 버리는 단근(斷勤), 셋째,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것, 건전한 상태 즉 선(善)이 일어나도록 하는 수근(修勤), 넷째 이미 일어난 좋은 것, 건전한 상태 즉 선(善)이 더욱 늘어나고 유지되도록 하는 수호근(守護勤)의 네 가지입니다. 여기서 근(勤)은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나쁜 것을 끊어 버리고 좋은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는 단(斷)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의단(律儀斷), 단단(斷斷), 수단(修斷), 수호단(守護斷)이라 하기도 합니다.
율의단과 단단에서 끊어버리고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하는 나쁜 상태는 다섯 가지의 장애(五障)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첫째, 애탐(愛貪), 둘째, 악의(惡意), 셋째, 혼침수면(昏寢睡眠), 넷째, 도거악작(悼擧惡作), 다섯째, 의심(疑)입니다.
애탐은 감각기관의 즐거움인 오욕락(五欲樂)에 탐착하여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이나 부, 권력, 명예 등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의는 증오, 원한, 혐오 등을 통해 화를 내므로써 성불하는데 강력한 장애를 나타내게 됩니다. 혼침수면(昏寢睡眠)은 정신적으로 아둔하고 무겁고 가라않아 졸리듯 의욕이 없는 분별력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도거악작(悼擧惡作)은 마음이 정해지지 않고 흔들리며 그 결과에 따라 나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의심은 어리석음으로 귀결되는 믿음의 결여, 진리에 대한 무지 등에 의해 의심을 유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려면 '눈으로 형상을 보되 현상(現相)을 취하지 않고, 그 수상(隨相)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상을 보되 겉모습이나 사소한 특징에 매달리지 않아야 있는 그대로 보고 호흡을 같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으로 그러한 것처럼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기관 역시 겉특징이나 사소한 특징에 휘둘려서는 안 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율의단을 수행하고, 나쁜 것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좋은 것을 생각하고 긍극적으로는 좋은 것마저 없애 버리므로써 ‘안으로 마음이 안립(安立)되고 하나로 집중되는’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수단(修斷)의 공부는 37조도품의 7각지(七覺支)인 염각분(念覺分), 택법각분(擇法覺分), 정진각분(精進覺分), 희각분(喜覺分), 경안각분(輕安覺分), 정각분(定覺分), 사각분(捨覺分)의 수행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①마음을 새겨서 ②진리를 판별하고 ③정진해서 얻은 ④기쁨으로 ⑤평안함과 ⑥마음의 집중을 이뤄내고 ⑦평정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수호단(守護斷)의 공부는 연기(緣起)해서 생긴 존재의 긍극적 괴로움 즉 죽음을 수반하는 현실의 처참함을 명상의 진전 즉 삼매(三昧)를 통해 앎으로써 연기해서 생긴 존재를 싫어하여 그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해탈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정진(精進)은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있고, 가방만 들고 다닌다고 해서 공부가 아닌 것처럼 선방에 앉아만 있다고 해서, 절에 와 부처님 앞에 엎드려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 정성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 학교, 직장 등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사회적 삶을 살면서도 늘 부처님과 진리와 스님들을 향하는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누구이며, 왜 이 일을 하고, 이 사람들을 만나는가를 골똘히 사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불자의 노력하는 삶입니다.
선암사에 주석하셨던 침굉(枕肱)스님은 늘 팔꿈치를 베고 주무시듯 하루를 보낸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대중들이 울력을 하자고 하면 ‘나는 더 바쁜 일이 있소’하면서도 모양은 늘 그대로 조는 듯 했습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한 대중들이 불만스러운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어느 대중 공양시간에 침굉스님 이 천수(千水) 당번이 되어 어기적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나가 대중스님의 발우에 물을 따를 때 뒤에서 은사스님이 엉덩이를 걷어 차 내렸습니다. 침굉스님도 넘어지고 물통에 들어있던 물이 방바닥 사방에 쏟아진 것은 물론이었지요. 그 때 침굉스님은 급히 손으로 바닥에 쏟아진 물을 주워 통에 담았는데 한 방울도 빠지지 않고 돌돌 말아져서 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대중들은 그 후로 침굉스님이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고 그 일에 매진하되 특히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바른 노력의 의미를 분명하게 아시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날이 하루빨리 오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