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어머니
3장 '어린양 혼인잔치'는 세계를 구원하는 등불
(5) 성혼, 지상에 어린양 혼인잔치가 열리고
2천 년 전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찾아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실 일은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한을 풀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한 승리의 터를 닦을 수도 없습니다. 나의 성혼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날이며,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은 날이었습니다. 나아가 인류가 참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문 총재는 16세 때 묘두산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에는 혹독한 시련이 주어졌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광복 후 북한에서 새말씀을 전파할 때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공산당의 악랄한 탄압으로 감옥에 갇혀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흥남감옥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을 때 유엔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어 하늘이 주신 소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을 거쳐 서울에 어렵사리 정착했지만 시련은 끊이지 않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 처절한 시련은 하나님이 준비한 독생녀를 만나 어린양 혼인잔치를 맞기 위한 탕감의 노정이었습니다.
통일교회 식구들 역시 문 총재 못지않게 쓰라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을 맞이하면서 말할 수 없는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1960년은 문 총재가 태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면서 하나님의 첫 아들딸인 독생자와 독생녀의 성혼이 이루어진 축복의 해였습니다. 봄이 무르익은 3월 27일, 음력으로 3월 1일 새벽 4시에 문 총재와 나의 역사적인 가약식(佳約式)이 열렸습니다.
청파동 교회가 비좁아서 남녀 각각 40여 명을 초대했는데, 하늘신부를 보려는 식구들이 몰려들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가약식은 1차와 2차로 나누어 거행되었으며 문 총재의 축도로 성스럽게 끝났습니다. 나와 문 총재의 가약식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6천 년 역사는 참부모를 맞기 위한 애달픈 노정이었습니다. 참부모를 찾지 못한 것이 그때까지 인류 모두의 슬픔이었지만 나의 가약식은 그 슬픔을 끝내는 축복의 날이었습니다.
가약식을 올리고 보름 후인 1960년 4월 11일, 음력 3월 16일 아침 10시에 성혼식을 올렸습니다. 전국 교회에서 선발된 700여 명이 청파동 교회에 모여 성대하고 뜻 깊은 성혼식을 거행했습니다. 가약식 때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참석해 교회는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사람들도 넘쳐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식구들이 골목을 가득 메웠습니다.
식장은 교회 성전에 조촐하게 꾸며졌습니다. 벽과 바닥을 흰 천으로 덮고 현관에서 왼쪽에 단상을 만들었습니다. 흰 치마저고리에 긴 면사 포를 쓴 나는 신랑의 팔짱을 끼고 성가 〈사랑의 봄동산>에 맞춰 2층 계단에서 내려왔습니다. 역사에 길이 기억될 성혼식은 하객 식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거행되었습니다.
성혼식은 그 의의와 가치로 보아 만민이 찬양과 영광, 송영을 올려야 할 대 경사였으나 오히려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았습니다. 문 총재는 성혼식 전날까지도 기성교단의 고발로 인해 내무부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밤 11시까지 굴욕적인 조사를 받고 겨우 청파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문 총재와 나는 지금까지의 아픔을 말끔히 잊고 담담한 마음으로 어린양 혼인잔치를 치렀습니다.
첫 번째 식은 서양식으로 치르고, 두 번째 식은 한국 전통의 사모관대와 족두리에 활옷 차림으로 올렸습니다. 성혼식은 내가 우주의 어머니이자 평화의 어머니로 인류 앞에 새롭게 등극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독생자와 독생녀가 성혼하는 어린양 혼인잔치는 아담과 하와가 이루지 못한 우주적 참부부, 참부모의 이상을 실현하는 자리였습니다.
식이 끝난 뒤 나와문 총재는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한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평범한 부부라면 당연한 것으로 즐기는 신혼여행은 물론 신혼의 단꿈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교회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한복으로 갈아입은 우리 부부는 식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기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신부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식구들의 요청에 나는 〈봄이 오면>을 불렀습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봄은 새로움을 뜻합니다. 나는 소망의 계절인 봄을 좋아합니다 이제까지의 차가운 겨울에서 벗어나 생명이 약동하고 꿈을 일깨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통일가의 역사도 이제 봄을 맞아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지상에 참부모 가정이 출현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사는 새로운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생사의 살얼음판을 지나오는 아슬아슬한 나날들을 거쳐 치러진 성혼식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날이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신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잔치가 바로 일찍이 잃어버린 독생자 독생녀를 신랑신부로 맺어주어 참부모로 세우시는 성스러운 축복 예식입니다. 나는 남편과 부부 인연을 맺으면서 하나님 앞에 굳게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힘들게 걸어오신 탕감 복귀 섭리 역사를 내 당대에서 청산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종교적 분열은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일입니다. 기필코 매듭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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