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글은 끝까지 읽으셔야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모든 질문의 답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공부한 캐리스 바이블 칼리지는 물질적 형통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게다가 저는 3년차 인턴쉽 과정에서 선택전공으로 비지니스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부를 창출하여 재정의 군대로 일어설 것인가에 대해 일년 내내 배웠습니다. 저에게 이러한 배경이 있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잘 사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저는 특별히 더 애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3년간 말씀을 배우고 돌아와 순진하기 그지없었던 저에게 '현실'은 참으로 많은 실망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모두 다 각설하고 세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미혹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부강한 나라에도 팽배해 있는 "감사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을 비교해 보면 이것은 정말 점점 더 극과 극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과 "체제"는 제가 새롭게 하자고 주장하는 바로 그 '생각'의 한 모양입니다.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여 '시장경제체제'를 들이고 나니 저렇게 경제가 발전하다가도 다시 중국 공산당이 제재를 가하면서 멈춰버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렇듯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계 10위 권의 부강한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하고서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에 감사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의 손에는 어김없이 스마트폰이 하나씩 들려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녀들도 초등학생들까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매달 5만원씩 들어가는 개인 핸드폰을 초등학생들도 하나씩 가질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취직이 안 된다고 나라 탓을 하는 젊은이들도 해외여행 정도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 여기서 더 늘어놓을 필요 없이 제가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감사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재벌이나 갑부들이 하는 것을 다 해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 연예인들처럼 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점 말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지수는 언제 가장 컸을까요? 아마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다보니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있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던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굶지 않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형제자매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러면 ‘굶지 않을 정도로 살면 그냥 만족하고 불평마라 그런 소린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마음 자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삽니다. "우리나라에 부흥이 와야 할 텐데 물질적 풍요가 들어오면서 영적 부흥은 점점 더 멀어졌다. 물질적으로 어려웠을 때 더 부흥을 했다면 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경제가 어려워져야만 하는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심각한 고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보면서 "때려야 말을 들으니 때려야 하나?"와 비슷한 논리니까요. 실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야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잘못된 믿음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이것이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나 말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또는 태도의 문제였다는 것을 다음 말씀으로 증명 받았습니다.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서 향락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pleasures of this life로, '세상적인 즐거움'이라고 하면 가장 비슷한 뜻일 겁니다. 향락이라고 하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른 와 닿지 않지만 이생의 즐거움이라고 하면 더 본 뜻에 가깝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향락의 종류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해외여행, 외식, 영화, 기능이 아닌 뽐내기 위한 옷이나 가방 등등,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말라거나 이런 것들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가시밭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말씀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언급된 1) 이생의 염려, 2) 재물, 3) 향락을 순서대로 이해해 보면 1) 삶의 걱정들, 주로 2) 돈문제겠죠, 그러다 보니 3) 이생에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나도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오는 불만(상대적 박탈감), 이 세 가지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말씀의 기운을 막아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가시밭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시밭에게는 물질적 풍요와 영적 부흥이 항상 반비례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영적으로 무뎌지고 그러다 보면 풍요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 자연히 물질적인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영적인 부흥을 맞이하니 또 다시 물질적 풍요가 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이렇게 쳇바퀴 도는 요요 같은 삶을 삽니다. 가시밭의 삶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할수록 영적으로 퇴행하고 가난해 질수록 영적으로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시밭의 상태일 뿐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 해 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찾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더 많이 주고 헌금하는 좋은 밭이 된다면 물질적 풍요와 영적 부흥이 함께 성장하는 삶이 가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습니다. 이것은 영적 부흥과 물질적 풍요가 공존하는 풍성한 삶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풍성한 삶(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결론.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고 영적으로도 풍성한 삶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