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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행13:20-23)-2024.3.10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요, 합한 자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실 수 있는 최고의 평가요, 칭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과분한 칭찬을 받은 인물은 성경에 다윗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해서 자신도 모릅니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맞는 자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추기가 힘들뿐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도 힘이 듭니다. 심지어 평생을 동반자로 살아야 할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배우자의 마음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배우자도 찾기 힘듭니다. 그냥 맞추어 살아가는 것일 테지요. 그것은 모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마음에 맞는 동료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평가해 주십니다. 과연 다윗이 하나님 보시는 기준에 적합한 인물일까요? 하나님이 다윗의 인품이나 성품이 좋아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윗이 왕으로서 이룬 업적이나 공로를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혹은 흠과 점과 티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절대 인간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스펙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중심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못지않게 죄와 허물이 가득한 사람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평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믿음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믿음이었을까요?
보통 우리가 상상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남다른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 남다른 수고와 헌신, 남다른 은사와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혹은 죄를 안 지으려는 종교적인 몸부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물론 그런 것도 좋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믿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이른바 믿음의 구심점을 하나님께 두는 믿음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의 구심점을 자기에게 둡니다. 그래서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을 대체하려고 하지요. 믿음의 중심이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열심으로 종교적인 포만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하다못해 기도를 할지라도 주님의 마음을 구하기보다는 자기들의 뜻을 구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주로 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듣는 기도는 안합니다. 그러면서도 기도를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도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일방 통보이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은근히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고민을 하기 보다는 회중들이 느끼는 분위기와 감정에 신경을 쓰고 의식한다는 말이지요. 아무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지요. 당연히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이 합한 자로 여기실리가 만무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믿음은 앉으나 서나 하나님 생각, 자나 깨나 하나님 생각, 사나 죽으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지요. 모든 삶의 기준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저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 자나 깨나 하나님,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라는 과정이 믿음의 발달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의 목표는 자나 깨나 하나님 신앙입니다. 또한, 자나 깨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라면 사나 죽으나 하나님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은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 자나 깨나 하나님, 사나 죽으나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였던 것이지요.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로 여겨주셨던 것이지요. 자기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셨다는 말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기대치에는 100% 미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여겨주시는 은혜를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합한 자로 여겨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친히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구석은 하나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시는 것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로 여겨주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1) 온전히 하나님만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을 판단하시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선한 왕은 다윗의 길이요, 악한 왕은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물론 다윗이 선한 왕이었다는 말은 그가 완전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도 역시 흠과 점과 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선한 왕의 샘플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다윗을 그렇게 평가해주신 것입니다. 이유는 그가 자기 약점과 단점을 가진 채로 하나님만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가진 약점이나 단점을 속인 체 하나님을 따라갔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설교입니다. 앞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와 흡사합니다. 이 세 사람들의 설교의 공통점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바울 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들어가서 첫 번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14절).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향하여 설교합니다. 그의 설교는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였습니다. 그 역사는 구속사적인 역사였지요. 그 구속사의 중앙에는 다윗이 있었습니다. 물론 구속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울을 먼저 소개합니다(21절). 물론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어서 소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내키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사울 왕을 폐위시키시고,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다윗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다니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물건도 마음에 맞아야 구매합니다. 회사도 마음에 맞는 자를 채용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마음에 맞아야 결혼을 합니다. 세상에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과 사는 것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를 택하사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해 가십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적합한 자였습니다. 물론 윤리적인 면으로 비교해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사울이 다윗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그런 기준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기준이 아니라 영적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적인 면이나 도덕적인 면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혹은 기름진 제물을 우선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것입니다. 비록 남들보다 윤리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실력이나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만일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남들보다 강한 율법을 소유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혹은 남들보다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 의로 승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은혜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기독교는 더 이상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종교에서 추구하는 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믿음의 수준을 윤리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수준으로 평가하고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사실 이것이 진짜 무서운 복음의 적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연약함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오히려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따라갑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가 필요한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연약함이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과 더 친밀해질수록 우리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항상 연약함을 호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때입니다. 비록 그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영적인 포만감이 느껴지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영적인 병에 걸리게 되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는 순수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던 목사가 건축이 끝나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묘한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일종의 약함이 사라지고 강함이 찾아온 것이지요. 물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약함이 강함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드리고 싶은 강함은 그런 강함이 아닙니다. 주님과는 상관없는 자신감이지요. 자신 앞에 이루어진 바벨탑을 바라보고 자부심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일종의 자기 만족감 내지는 자기 성취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제 아무리 대단한 업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먼지에 불과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한번 훅 불어버리면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룬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하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를 높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차라리 없을 때는 하나님과 친했는데 오히려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차라리 연약하고 부족함이 느껴질 때는 하나님과 친했는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채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연약함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부족함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은혜라고 고백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혹은 내가 연약함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100%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약점들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것들도 많았지요.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꼭 붙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약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 하나님의 강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자라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천 번을 들어도 송구스러운 말씀이지요. 가끔 우리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과분한 평가를 받으면 양심이 무겁고 찔릴 때가 많습니다. 목사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도님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 목사를 칭찬하고 자랑합니다.
그럴 때 목사는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자기의 수준이나 자질을 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나를 자기 마음에 맞는 자라고 인정해주신다면 무슨 말을 하오리까?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평가를 이미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대 이상의 인정을 받고 사는 것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일도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2) 넘어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갈지라도 때로는 곁길로 샐 때도 있고, 딴 길로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길로 들어설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며, 주저앉기도 하지요. 그러나 믿는 자는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법을 알아야 하지요. 그래야 다시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때문에 넘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넘어진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넘어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짜 두려운 것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가 미운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죄가 더 밉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죄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절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능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실 육신의 부모님들도 연약하고 부족한 자녀들에게 더 집중하게 됩니다. 관심을 더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면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녀에게 더 큰 동정심과 긍휼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지요.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의 하나님이시오, 부족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하고 부족한 자에게 집중하십니다. 그런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런 자는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의지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를 챙겨주십니다. 이른바 그런 자를 당신의 마음에 흡족한 자로 여겨주십니다. 마음에 맞는 자로 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윗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다윗도 심히 연약한 자였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자였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만 붙어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연약하다는 조건 때문에, 혹은 부족하다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이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연약함이나 부족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오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하나님은 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이나 미련함이나 탐심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되었음에도 하나님이 무조건 가난한 자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 가운데는 가난이 마치 미덕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는 사랑하시고 부자는 미워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연약함이나 부족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십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사람입니다(22절)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를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위임하십니다. 맡겨주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입니다(22절). 인간도 자기 마음에 맡는 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합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를 택하셔서 당신의 모든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가장 큰 뜻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시는 계획입니다. 물론 세상을 구원하심은 세상에 속한 당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를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것이지요.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에도 값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맛보아야 했지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른 죗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어떤 인간도, 혹은 어떤 신도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는 죄가 없으십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의 독생자에게 우리 인간의 죄를 씌우시어 보내시는 것이지요. 이른바 죄의 옷을 입혀 우리 가운데로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른바 성육신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보내시는 통로로 다윗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축복입니까? 감히 다윗의 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바울 사도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로마서1장3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형통에서 나셨고....”라고 말입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 조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장1절은 예수님의 계보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13장 23절에서도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자를 택하시어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주십니다. 이른바 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사셔야 합니다. 나와 함께 사신다는 말씀은 나를 하나님의 성전 삼으시고 나의 주와 왕으로 사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안에 죄를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우편에서 우리 모든 죄를 영원히 탕감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머리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주가 되고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주님이 내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생각이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 복음으로 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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