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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北漢誌)에 수록된 '북한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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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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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3월 1일~3월 3일(2박3일)
글쓴 이 : 호산 박문호 (1846 ~191?)
신행인원 : 호산 외 2인 운경 우림 (총 3인)
부악산(負嶽山)과 인왕산 사이를 나와
서북쪽으로 바라보니, 산이 대치하고 있는데,
마치, 맹수가 두 귀를 쫑긋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경(雲卿) 황현(黃玹)이..
"이것이 백운대라는 것인가?"
라고 하니, 우림(于霖) 김택영(金澤榮)이.,
“아니다. 이것은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이다.”
대남문 & 보현봉.
두귀(兩耳) 남쪽에 이르러
서쪽으로 문수암을 만났는데,
커다란 바위 구멍(石穴)이 있었다.
2016년 문수사., 문수굴.
옛날 고려 대량군(大良君) 왕순(王詢)이 머리를 깎고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있다가, 후에 맞아들여
즉위하였는데, 이것이 아마 신혈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삼각산 북쪽에 구멍이 있는데, 이것보다 크니,
아마 그 곳인 것 같다고 하더라.” 라고 하였다.
대남문으로 들어가서
또 서북쪽으로 바라보니,
두 봉우리가 마치 귀 같았다.
.
이때 우림이
말하기를.,
.
"모르겠다, 옛날에 일찌기
이곳에 놀러온 적이 있지만,
중흥사(重興寺)에 이르러 멈췄기에
중흥사를 지난 뒤로는 모르겠다.”
하여, 길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아니다.” 라고 하였다.
“전해 들으니,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곳에 이르렀다가
벌 때문에 흩어져 달아나서,
날마다 객사에 머무는 자가
여러 사람이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유람하면서
성 안을 돌아다녔는데,
나와서 해를 끼치는
벌 한 마리 없으니
어째서인가?
“산벌 또한 능히
적을 물리치는가?” -운경 -
마침내
시내를
따라 내려와
중흥사에 이르니
절은 비었고
승려도 없었다.
1902년 중흥사.
하도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북한산에 승대장(僧大將)이 있어,
팔도의 승병을 총섭하였으니,
여기가 그 치소(治所) 이다.
그러므로 일을 오직
북한성 내의 승려 만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성밖의 유력자에게
13개 사찰을 빼앗겨
모든 승려들이 서로
더불어 절을 비우고
나와 다투었다."고 한다.
"산문의 사람들도
서로 다투는가?" - 우림 -
산영루.(山影樓)
마침내 절을 나와
산영루(山影樓)에 오르니,
바로 북한 서문(西門) 안이다.
대서문 & 대서문계곡.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다우니,
지는 해가 빛을 발하는 것이
볼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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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太古寺)
이어, 민가를 빌려 자고
다음날 태고사(太古寺)를 거쳐,
용암사(龍巖寺)에 오르니,
바로 용룡봉(龍瀧峯)의 남쪽이다.
북한산장 터(현재 무인산장 옛 용암사터)
드디어
두귀 사이로 나와서
나무꾼을 만나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벼랑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니 또 두 귀가 있는 곳을 만났다.
“여기가 백운대인가?” - 우림 -
나무꾼이,
“맞습니다."
.........나무꾼이 설명하기를........
"바로 용암봉과 백운대 사이입니다.
산이 도봉산 서쪽에서 오다가 한 번 솟아
용암봉이 되었으니, 이것이 남각(南角)입니다.”
“만장(萬丈) 마을의 노래에
‘나라를 진호(鎭護)하는 명산.
만장봉〔國名山萬丈峯〕’이라 하니, 이것입니다.
삼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동쪽에 흙이 꽤 얹혀 있어
초목이 자라고 있으므로 잡고 오를 수 있습니다.
.
서쪽은 노적봉이요,
남쪽으로 뻗은 것은
부악산과 인왕산 등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
두 번째 솟아
서북 쪽으로
백운대가 되었으니,
이것이 중각(中角)입니다.
.
용암봉에 비해 더욱 험하니,
사면이 깎아 만든 듯한데,
위는 평평하고
흙이 얹혀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세 번째 솟아
동북쪽으로
인수봉(仁壽峯)이 되었으니,
이것이 북각(北角)입니다.
백운대와 더불어 두 귀가 됩니다.”
‘독석(獨石)이
백운대에 비해
더욱 기이하고 험합니다.
전체에 바위가 서 있어서 연꽃이 물속에서 나왔으나
아직 피지 않은 것 같으니, 참으로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각(三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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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백운대에
오르는데.,
나무꾼이 앞에 서고,
우림이 그 다음에,
내가 또 그 다음에 서고,
운경이 뒤에 섰다.
.
백운봉 중간에 이르니,
가장 험한 곳이다.
결단암 & 바위 구멍들.
세속에서는 ‘결단암(決斷巖)’이라고 부르니,
올라가는 자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이곳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드디어 옷과 삿갓, 신발, 버선을 벗고,
손발을 구멍 속에 넣고 기어서 나아갔다.
운경이 멈추고 오르지 못했다.
“원래 여기를 오르는 자들은
서넛에서 백십 명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중에 한 사람은
오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여기에서 옷가지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무꾼 -
,
“명산 정토(淨土)에서도
도둑에 대비해야 하는가?” - 나 -
처음에 우림과 백운대에 오르기로
약속할 때는 호방하게 노래했는데,
이윽고 정신이 어질해져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통곡한 것은 다 까닭이 있었고,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가 백운대에 오르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그 또한 일찍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징계한 것이었다.
장차
내려가는데
누운채 구멍에
수족을 넣고 조금씩 내려왔다.
이윽고 운경과 서로 붙잡고 크게 웃었다.
“금강산(金剛山)의 비로봉(毘盧峯)과
망군봉(望軍峯)도 이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송악산(松嶽山)과 천마산(天馬山)도
이곳에 비하면 도리어 평지이다.” - 운경 -
“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와
관악산(冠岳山)의 연주대(戀主臺)도 이렇지 않다.” - 나-
잠시 뒤에 어떤 사람이
혼자 가서 백운대를 올라가는데,
옷과 버선을 벗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갔다.
그가 내려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보던 자들은 발바닥이 모두 시큰하였다.
“이는 필시 근심 걱정이 있어
죽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 운경 -
“이는 반드시
용력(勇力)이 있는
자일 것이다.” - 우림 -
"이는 반드시 범을 모르는 자이다.
어떤 범을 모르는 자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범을 만나서 죽였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이것은 범이다.’라고 하니,
범을 죽인 자가 마침내 놀라 소리지르며 달아났다.
이는 반드시 백운대를 모르는 자일 것이다.” - 나 -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더불어
나는 그와 이야기 했다.
“그대는 근심 걱정이 있는가?” - 나 -
“처자를 막 잃고,
궁한 나머지 의지할 곳이 없어
죽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 그 -
“그대는 또한
용력(勇力)이
있는가?” - 운경 -
그는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그대는 아까
올라간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우림 -
“모른다.” - 그 -
세 사람이
마침내 서로 보면서
크게 웃고 구경을 마쳤다.
(길잡이) 나무꾼이 인사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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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성을 나와 동쪽으로 가서
도선암(道詵菴)에 이르러 묵고,
다음날 혜화문(惠化門)을 경유하여
들어가 봉조(鳳藻) 학사를 찾아갔다.
1911년 혜화문(독일인 신부 Norbert Weber 작).
.
...봉조학사 ...
“나 또한 일찍이
백운대에 간 적이 있었다.
청컨대 삼각의 우열을 논해 보자.
용암봉은
여럿 중에서
뛰어나기는 하나
뛰어나게 기이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모두 그 꼭대기에 이를 수 있으니,
또한 싫어서 버리고 이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봉을 버리면 삼각은 완전하지 않으니,
이것이 또 삼각의 장점이다.
비유하면
문장에 재주는 부족하나
역량이 뛰어난 자와 같으니,
경모(景謨) 박문호(朴文鎬)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백운대는 기이함으로
그 기이함 만드는 것을 이겨서,
자못 사람을 떠나고자 하나 이르는 자가 항상 많다.
비유하면
문장에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자와 같으니,
운경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인수봉은 세상을 떨치고 홀로 서서,
사람을 막지 않으나 사람이 저절로 이를 수 없다.
비유하면
문장에 천품이 매우 높아
재력으로 논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우림의 문장이 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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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기록한다.
임오년 3월 3일.
(1882년, 고종 19년)
만경대.,박문호의 문장,
백운대.,황 현의 문장.
인수봉.,김택영의 문장.
세 친구의 문장을 삼각에 비유한.,이건창.
한말 3대 문장가였던.,이건창 김택영 황현.
.
.......................봉조학사 이건창...................
어린 나이부터 관직에 올라 지행합일 양명학 학풍
불의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고 백성구휼에 힘쓴 결과
각처 백성들로부터 감사의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졌다.
갑오경장 이후 모든 관직제의를 거절하고
1896년 해주 관찰사를 거부해 세번째 귀양.
1898년 47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남겼다.
.......................김택영.......................
북한산 산행 이듬해(1883년) 중국의 지식인
장첸(張騫)과의 교류로 시문을 인정받았다.
출신성분으로 관직에 못 오르다
뒤늦은 42세(1891년) 진사가 되고
그후 1905년까지 중추원 서기관,
홍문관 통정대부, 학부 편집위원
1908년 을사조약에 나라의 운명을 통탄하다 중국으로 망명여
장첸의 도움으로 한문학에 대한 정리와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1927년 망국의 한을 간직한채 중국에서 79 나이에 숨을 놓았다.
역사서 한사경(韓史警), 시문집 소호당집(韶護堂集)등을 남겼다.
..................................황현..........................
북한산 산행 이듬해(1883년)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
그러나, 2등으로 강등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귀향.
1888년 부친의 간청으로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 합격.
부정부패에 실망하고 낙향해 개혁방안을 제시
매국노를 성토하거나, 애국지사를 애도하였다.
1908년 호양학교를 세워 신학문으로 가르치던 중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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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그때 황현은., 향년 56세
구한 말. 격동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박문호..................................
고향 보은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몰두하며
호산집(壺山集)을 비롯 260권의 성리학서를 남겼다.
벗들의 죽음과 망명을 지켜보며
일제시대 중반 1918년 73세 운명.
박문호는 황현의 묘표(墓表)에
황현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썼으며
김택영은 황현의 글을 모아 중국에서
매천집(梅泉集)을 편집 간행하였다.
덧 말.
백운대 詩 - 심능규(1790~1842년) 作
白雲臺立石頭危(백운대립석두위) :
鐵索雙雙九節垂(철삭쌍쌍구절수) :
我欲攀緣猶不得(아욕반연유부득) :
中途戰股坐盤枝(중도전고좌반지) :
우뚝 선 백운대 바위도 높은데
쌍쌍 쇠밧줄이 아홉 마디로 드리웠다.
내가 잡고 오르려 했으나 오르지 못하고
중도에 무릎(다리)이 떨려 주저앉고 말았네.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1882년 3월 1일~3월 3일(2박3일)
.........당시 조선의 시대적 배경(1881~1882)............
고종은 1881년 1월 11일., 조사와 수원, 통사, 하인 등
62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신사 유람단은 '조사 시찰단'으로 불러야 더 설득력이 있다.
유람단 일원으로 발탁된 조사들은 동래 암행어사로 임명.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알지 못한채 각각 동래부를 떠났다.
그러나, 틈틈이 민정을 살피는 어사의 업무를 수행하며 갔다.
일본은 신사 유람단이 누차 공식 사절이 아님을 밝혔지만
세관, 산업, 농법, 군사 시설, 각종 기술 관람과 조사를 허용.
유람단은 시찰 후, 동래 암행어사의 자격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들은 귀국 즉시 상세한'문견사건'과 '시찰기'
즉 보고서를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하였는데
이 기록은 개화정책에 많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1882년 3월 청나라 톈진 유학생 상운(尙雲)이
귀국하면서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지고 왔다
182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 간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 6. 9 임오군란은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의
10개월 연체된 봉급을 정부가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난.
10년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 척화파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일본과 외세 배척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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