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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 이 참사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와 격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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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 참사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와 격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억지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위로와 격려를 받건 보답이나 상급을 받건
받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받는 나와 받지 않아도 되는 나 가운데
어떤 내가 더 낫고, 어떤 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받는다든지 도움을 받는 것과
풍족하여 돈이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요 충족 차원에서는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
그래서 받지 않는 편이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떻습니까?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관계는 사랑이 전혀 없는 관계가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격려와 위로를 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고
격려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뭐든지 자신만만하고,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복하여
‘나는 격려와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하는 것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상태가 오히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답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답도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까?
사랑을 역시 기준으로 할 때
보답을 바라고 뭘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고 심지어 뇌물이며
그래서 그런 행위로는 보답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보답을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것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것을 논하는 것이니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인간끼리 주고받을 때 그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함과 같이
위로와 격려도 인간에게서 받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일지라도 받은 것이
인간적 사랑에 그치고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는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도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불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참사를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 부모에게 우리가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표해야겠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로는 그 부모들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을 때
우리가 받은 그 같은 위로와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참사자들의 부모들에게도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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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그리고 2017년에는 연중 제33주일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로 발표하시고,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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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유족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치료를 받는 분들의 빠른 쾌유를 희망합니다.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에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드리고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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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뉴욕의 단풍도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이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면, 내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단풍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있고, 아름다운 호수와 계속이 있고, 한적한 산책로가 있는 곳의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빌딩 숲 한 가운데 있는 단풍은 외롭기 마련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단풍도 색이 바란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도, 아름다운 산에 있어도 단풍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삶은 하느님 은총의 빛 속에 있어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선악과와 십자가’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알았고 하느님과 같아질 것 같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 역사에 드러나는 폭력, 전쟁, 살인, 갈등과 분열은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신의 입장에서 드러냈기에 그와 같은 고통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선악과를 몰라서 예수님께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기준에서 받아들였고, 선악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의 현장에서 낯부끄럽게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는 것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당의 공동체가 서로 갈라져서 다투는 것도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신들의 입장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장의 슬픈 독백입니다. “저는 가족을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도 안 돌보고 열심히 일 했습니다. 그러난 어느 날, 제 아이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대들면서 말하였습니다. ‘아빠!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해 준 것이 뭐가 있어요? 덩달아 제 아내도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욱하는 성격에 한바탕 싸움하고 이혼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야! 공부나 잘해!’ 그리고 제 아내에게 해 준 말은 ‘밥 줘! 나 피곤해! 당신이 알아서 해!’ 이 세 가지 말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가정에 선악과는 있었지만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 십자가를 다르게 해석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진 재물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고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본인도 걸인이면서 더 어려운 걸인들에게 밥을 나누어 준 최귀동 할아버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꽃동네’로 열매 맺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당연히 상대도 같은 생각하고 있을 것(선악과)이라는 착각이 바로 가정을 깨어 놓았습니다. 내가 상대가 되어주는 것(십자가)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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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과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선포인 힘찬 크로키 퍼포먼스를 기억하십니까?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화가는 그림을 다 그린 후 발로 낙관을 찍었지요. 바로 수묵 크로키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의수 화가 석창우입니다.
그는 1984년 29,000볼트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을 잃었습니다. 이때의 나이는 29세. 너무 젊은 나이에 소중한 두 팔을 잃은 것입니다. 이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4살인 자녀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라서 참새를 그려줬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의수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하늘에서 건강한 두 팔을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안 받아요. 내가 양팔과 헤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숙명입니다.”
그러면서 팔이 있었던 29년보다 팔 없는 30년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의 이유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행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됩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초대하라는 내용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초청받고 초청하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초상이 나면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가 문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어떨까요? 즉, 초청하는 이유가 초대받기 위한 것이고, 문상가는 것도 나중에 초상났을 때 문상하러 올 것을 대비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은 선행의 장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고 자선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 나라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혹시 이것들을 나눌 때,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나누는 것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물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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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활을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니콜라 드 콩도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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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랑이 답이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엊그제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해 할 말을 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세월호에 이은 대 참사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대 참사입니다. 이처럼 만추의 아름다운 계절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마음이 후둘후둘 떨립니다. 10월31일 오늘 “핼로윈 데이”라는 우리와 무관한 유럽과 미국인들의 축제가 못마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제 오후 10시20분 현재 사망자154명 부상자 132명이고 사상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벽 뉴스입니다. 대부분 10대-20대 젊은이들이고 빈소마다 무너진 부모들의 통곡이 가득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새벽 지인 자매로 부터의 메시지도 마음 아팠습니다.
“신부님, 이태원 사고로, 노엘이 반 친구가 하느님 품으로. 김민경이라는 아이입니다. 기도부탁드립니다.”
내일 11월 위령성월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참으로 온 국민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10월의 끝 날을 보내고 내일 11월 모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 첫날부터 깨어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새삼 기도의 계절, 가을은 회개의 계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11월 한 달은 이태원 참사로 죽은 젊은 영혼들을 위한 연미사 봉헌하려합니다.
어제는 제 경우도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했던 둘째 베네딕도 형님의 14주기 기일미사를 형 댁에서 봉헌하였습니다. 14년전 2008년 11월 강론집을 찾아 당시 장례미사(11.3)때의 강론을 읽으면서 감동했습니다. 그때나 14년 후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써온 제 강론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오랜만에 본 조카들도 성실하게 살아 온 모습들이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매일 밤1시 전후로 기상하여 하루를 시작하기에 오후는 꽤 피곤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하루를 충만히 가족들과 함께 지낸 후 늦게 수도원에 들어왔고 “잘 도착하여 잡니다. 감사합니다!” 원장에게 귀원을 알렸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새벽에 잠깨어 읽은 답신의 평범한 메시지도 마음에 깊은 평화를 주었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말없는 마음으로 깊은 위로와 격려의 기도와 사랑이 절실한 만추의 계절 가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잔잔한 말씀이 깊은 평화를 선사합니다. 공동체는 어디나 문제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요, 바오로 사도가 서간을 보낸 필리비 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필리비 신도들과 하나 된 바오로에게 이들의 사랑의 친교는 바오로의 기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청이 참 절실하게 들립니다. 마치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더욱 순수하고 깊은 사랑을 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오로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 아가페 순수한 사랑을 명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이 말씀, 하루의 양식인 말씀으로 삼아 마음에 담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예수 성심을 닮아갈수록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불쌍한,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 하시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 두 끼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겸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자주 먹는 것 같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이런 끼리끼리 있는 이들끼리 주고받는 초대를 즐겨 찾지 말라 하십니다. 이런 관행에서 단호히 떠나 참으로 필요한 이들에게 무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실천을 즐겨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에게 참 많이 선물했고 그림으로 그려 나눴던 참으로 감동적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눈속에서 3개월”과 “어린왕자”란 책과 더불어 평생 보관하며 읽고 싶은 책이요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선사하는 책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과 다음 이 말씀도 마음에 깊이 담고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너희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바라는 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사랑의 삶을 즐겨 실행하는 사람들이 의인들이요, 이런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주님 친히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둔 아름다운 사람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사랑과 희망의 사람들로 변모시켜줍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침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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