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와 선
제자들이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의 눈높이에 눈을 맞추어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악령을 쫓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순히 구마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의 이해 지평 안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 치유하지 못했던 한 아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더러운 영에 걸린 아이는 도무지 사람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게 굴었고 그런 아이를 사람들은 쉽게 단정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의 율법의 잣대로 그들을 단죄하며 치유를 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죄에 대해서 논쟁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죄보다도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여 자유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였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한 그들은 그들과 쉽게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진정한 법은 그 법의 정신에 맞게 사람들에게 적용하여야 완성된다.
즉 사랑의 계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율법에만 집착을 하였던 것이지요.
현대를 살아가면서 많은 아이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정이 많이 파탄나면서 결손가정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에 아이들은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그 사랑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된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에는 이상할 수 밖에 없겠지요. 더러는 극도의 정신적 불안과 착란으로 인해 과잉행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바리사이처럼 행동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단지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사랑으로 다가서야하고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학벌이라 가문, 가정환경이라는 외부환경을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편견의 눈길을 돌릴 때에
우리는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없음은 단지 사랑의 부제이지 악은 아니지요.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은 긍정적 의미이죠. 부정적인 의미로 우리는 편견이라고 부릅니다.
그 둘의 차이는 바로 사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긍정적인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전에 한 실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한 교육실험에서 임의의 5명의 학생을 모범학생으로 지목하여 선생님에게
그 학생이 타고난 가능성을 지녔다고 알려주었답니다. 그 결과 그 아이들은 정말로 모범학생이 되었답니다.
바로 그 선생님의 믿음이 그 아이를 변화시켰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기적 곧 사랑의 마음으로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이죠.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크거나 작거나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믿고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