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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 하느님은 내게 어떤 분? 나의 사랑은 어떤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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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은 내게 어떤 분? 나의 사랑은 어떤 사랑?
오늘 루카 복음은 미나의 비유로서 마태오 복음의 탈란트의 비유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비유입니다.
탈란트의 비유에서는 탈란트를 더 받기도 덜 받기도 하는 데 비해
미나의 비유에서는 똑같이 한 미나를 열 사람이 받습니다.
이 비유에서 미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저는 오늘 비유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비유를 대입시키니 인생 결산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내가 준 사랑 한 미나를 일생 어떻게 관리했냐고 주님께서
비유의 주인처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성찰해 보니 아버지 없어서 가난하고 고생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한 사춘기 때를 빼고는 한 번도 비유의 마지막 사람처럼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반대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입버릇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며 사랑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봉사자들과 하루 식당을 여는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가득히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이웃과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입으로는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지만
실제를 보면 저의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때가 많음을 보고,
반성이랄까 후회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런 반성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너도 비유의 마지막 종과 같이 한 미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어!
저는 비유의 그 종처럼 주님을 냉혹한 분으로 알고 있지 않고
사랑의 주님으로 알고 있고, 그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사랑으로 사랑치 않고, 내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바로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 주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랑을 고이 수건에 싸 두는가?
그 사랑을 뭣에 써먹으려고 그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는가?
혹시 나만 그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은 아닌가?
마치 형제와 나누라고 부모가 준 돈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쓰려고 지갑에 또는 금고에 숨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제게 그럴 마음은 결단코 없지만
주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음은 결과적으로
주님 사랑을 수건에 싸 둔 것이 되겠지요.
저는 오늘 이것을 묵상하고 반성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냉혹한 분입니까? 사랑이십니까?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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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 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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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자캐오는‘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노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을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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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쉽게 수락하기 힘든 제안이 있었습니다. 웬만하면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고민이 컸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도 빨간 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홍보를 못 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뉴욕에 있는 ‘가톨릭방송’을 맡으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가톨릭방송도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팬데믹은 가톨릭방송이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교구에 문의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가톨릭방송도 미국에 있는 한인 사제들과 신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없으면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신문을 구독하고, 방송을 시청하며 지면과 방송의 내용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35년 역사의 가톨릭평화신문과 30년 역사의 가톨릭방송이 앞으로도 미주지역의 한인 신자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입니다. 몇몇 뜻있는 신자들이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좋은 강의를 소개하고 싶어 했습니다. 요즘 ‘스타트 업’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자본과 조직이 없어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산뜻한 기획이 더해지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몇몇 뜻있는 교우들이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와 저명한 강사들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고, 저명한 강사 사제들과 수도자를 섭외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은 취지에 공감했고 기꺼이 강의를 수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기보다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맡아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의 주최가 되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영적인 도움이 된다면 저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줌으로 들을 수 있다면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함께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솜사탕, 별’과 같은 동요를 남겨준 작곡가 이수인 선생님은 2021년 8월 23일 별세했습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화, 문학, 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동요와 가곡을 자주 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동요와 가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쌓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정신이 황폐해지면 곧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동요와 가곡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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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젊은 부부는 자기의 아기가 태어날 때, ‘기적’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닮은 아기, 그래서인지 온갖 정성을 아기에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팔다리를 많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운동 신경이 너무 좋다고 말하고, 엄마 아빠를 빠르게 말했다면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성량이 좋아서 노래 잘 부를 것으로 예측합니다. 마구 휘저은 낙서를 보면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렇게 자주 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기 운동선수 시킬까? 아니야. 머리가 좋으니 교수를 시키자. 노래도 잘할 것 같은데? BTS 같은 아이돌 가수는 어때?”
우리 아이는 커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으며,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의 생각을 충족시켜 줄까요? 아마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는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 뜻대로 살지 않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노력보다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려고 하기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뜻대로는 절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뜻을 말입니다.
미나의 비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종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을 나눠주지요. 미나는 1탈렌트의 1/60에 해당합니다. 1탈렌트가 6,000일 치의 노동자 임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1미나는 100일 치의 임금임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이지만, 주인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만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 한 미나 마저 빼앗기고, 가장 많은 미나를 벌은 사람은 그 빼앗긴 미나를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열 미나를 벌은 사람은 재능을 많이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은 첫 번째 사람보다 조금 덜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은 재능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딴전만 부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으면서도 자기 잘못 탓보다는 주인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절대로 제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주님께서도 이야기하시지요.
여러분은 어떤 뜻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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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미소와 눈물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와 같은 것이다(바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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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삶은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입니다-
오늘 강론은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요즘 제 물음은 “계속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한 물음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니까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 종신서원 미사 강론시 제가 한 강론 제목입니다만, 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우니 여전히 떠나지 않는 물음입니다. 그당시 제 나이 44세였는데 지금은 74세이니 많이 지났습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을 방문했던 목사님들중 한분이 물었습니다. 예전에는 목사님들도 많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대답에 지극히 흡족했고 지금 묻는대도 이 대답 하나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다 오늘 지금부터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잘 죽는 선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의지대로 되는 죽음이 아니기에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물론 사막 수도승들의 공통적 충고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였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이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는 계절입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자주 상기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 오후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의 계절에 위치해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피정오는 분들 대부분이 가을, 특히 지금같은 만추의 계절에 속한 분임을 자주 확인하곤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시점을 확인할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을 조용히 성찰할 수 있는 계절의 흐름과 잘 어울리는 교회의 전례력이 참 고맙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이 끝나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회색빛 어둠은 걷히고 기다림의 환희로 빛나는 대림시기입니다.
요즘 만추의 날씨가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시 밝게 빛났던 자매님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잊지 못합니다. 11월 위령성월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로 시작되었기에 저는 우리의 희망인 성인들을 기리는 11월은 희망성월, 성인성월로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제 회개의 여정이란 제하의 강론을 하면서 회개성월이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우리 영혼의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최고, 최선의 처방은 참된 회개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1월은 성인성월로 부르고 싶습니다. 성인이 되라 부름받은 우리 모두를 위한 성인성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부르는 짧은 기도 노래가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시 부른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근거한 가사로 곡도 깊고 아름다워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선사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11월은 성인성월답게 성인축일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의 주보성녀로 베네딕도회 수녀였던 13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성녀 대 젤투르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이었고 영성사에서 에수성심의 신학자,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겼습니다.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젤투르다는 만46세 선종시 아름다운 임종어,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천상예배 장면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옥좌와 하늘나라 예배가 영적 삶의 마르지 않는 샘이되고 영적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지상 삶이 마지막이 아니라 천상 삶에 대한 열린 희망이 우리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면서 영원한 기쁨의 삶을 살게 합니다.
특히 천상예배를 반영하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지상예배인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 순례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평생 매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 찬미가는 바로 오늘 묵시록의 천상예배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당신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릴 만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당신 뜻에 의해 생겨났고 또 존재하나이다.”(묵시4,11)
또 지상전례인 미사시 ‘거룩하시다’도 천상전례의 거룩하시다를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그러니 천상전례를 그대로 반영하며 맛보게 하는 이 지상전례인 미사은총이 우리 순례 여정의 삶을 더욱 희망차고 역동적이 되게 합니다.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우리 모두 똑같이 한 미나의 인생 선물을, 똑같이 하루하루의 선물을 받습니다. 어떻게 인생선물을, 하루하루의 선물을 잘 활용하고 선용하는가는 우리 손에 달린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내일의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복음의 종들이 똑같은 하나의 미나를 선물받았듯이 우리는 똑같은 하루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나 활용과 선용에는 개인차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허무하게 시간과 정력을 탕진하고 낭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뜰히 요리하며 알차고 꽉차게 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자기 능력껏 일해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이와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이는 똑같이 주인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말씀과 더불어 큰 책임의 선물을 받습니다만, 한 미나 그대로 바친 종은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호된 질책과 더불어 완전 퇴출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 영성생할에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풍요로운 영적 삶을 위해 한결같은 항구하고 충실한 노력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용감히 앞장서서 파스카의 신비가 이루어질 예루살렘 등정 길에 오르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받은 선물에 대해 헴바쳐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너무 늦습니다. 하루하루 헴바치며 사는 것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이래야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날마다의 삶을 헴바치는 은총과 구원의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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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ㅣ한종운 시몬 신부 집전
https://youtu.be/YY8r8WeTeaU 31:33
cpbcTV가톨릭콘텐츠의모든것
2022. 11. 16.
한종운 시몬 신부 (의정부교구 탄현동 본당 부주임) 집전
** 신부님의 강론 10:46부터 10:51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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