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를 위한 인적 네트워크: 바오로와 리디아 그리고 루카
사도 16,11-15; 요한 15,26-16,4 / 부활 제6주간 월요일; 2024.5.6.
오늘 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리디아와, 이 독서인 사도행전을 쓴 루카, 이 두 사람과 사도 바오로가 맺은 관계는 사도직 활동과 복음화 과업을 위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한 전형으로서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이 맺은 수평적이거나 수직적 인간관계의 이 인적 네트워크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내신다는 ‘진리의 영’이 이끄신 은총의 결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를 떠나 그리스를 개척하기로 하고 먼저 북부 마케도니아의 관문이었던 필리피로 들어갔는데, 그 도시의 기도처에서 리디아를 만났습니다.(사도 16,14) 개인적이고 일시적으로 될 수도 있었던 이 만남이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리디아가 지닌 배경 및 조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리디아는 소아시아 티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사도 16,14) 소아시아 중남부에 위치해 있던 티아디라는 지역 특산품이 없어서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당시 이곳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은 장사 수완이 좋다고 소문난 유다인들을 불러들여서 상업을 일으키고자 했고, 그 바람에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사도 16,14) 리디아가 티아디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취급한 자색 옷감은 천연재료로만 염색할 수 있었던 고대의 사정으로는 바닷고동으로만 그 색깔을 낼 수 있었던 까닭에, 자색염료가 워낙 비싸서 왕족이나 부유한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티아디라에서 필리피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데에는 이 고급 옷감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려고 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녀는 당시 지중해 일대를 거래처로 삼은 국제적인 비지니스를 하는 커리어 우먼(career woman)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이력을 지닌 리디아가 바오로의 인물됨을 알아보는 데에는 티아디라에서 겪은 체험이 작용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티아티라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신자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서 불륜을 저지르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는 이제벨”(묵시 2,20)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어서 큰 책망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티아티라에 있던 유다인 상인들이 조직한 조합이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조직에게 곗돈의 일부를 바치면서 은밀한 유착관계를 맺고 곗날이 되면 트림나스 신전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신전 여사제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사악한 우상숭배 풍습에 물들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겨운 풍습을 익히 보아온 리디아로서는 바오로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가 전하는 복음선포 활동을 보고 나서 그에게 사심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그가 선교사로서 교우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 몸소 천막 만드는 노동까지 하며 좋은 표양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건전한 것은 기본이고 영적으로도 훨씬 더 고귀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첫 눈에 알아보고 자기 집을 내놓는 호의를 베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리디아는 바오로 일행이 필리피에서 맞게 된 박해를 계기로 남부 아카이아 지방으로 선교를 가도록 조언하기도 했을 것이고, 다시 소아시아의 큰 도시인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2년 반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라도 귀한 양피지에 편지를 써서 이미 공동체를 세워 놓은 여러 곳에 보내서 연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습니다.(필리 1,7) 이것이, 필리피 공동체를 건설한 사도이자 바오로의 선교 활동을 든든하게 도와준 선교사로서 리디아의 면모입니다.
탁월했던 국제적 감각뿐만 아니라 선과 악 그리고 천박함과 고상함을 식별하는 안목으로 첫 눈에 바오로의 인품과 됨됨이를 알아본 리디아는 강권하다시피 바오로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필리피 선교의 거점을 자처했습니다.(사도 16,15) 뜻밖의 호의를 얻게 된 바오로는 리디아의 집을 거점으로 필리피에 복음을 전해서 나름 의미있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그 빌미는 그가 점 귀신 들린 하녀에게서 그 귀신을 내쫓은 일이었고 그 하녀가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그 도시의 행정관에게 바오로 일행을 고발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소아시아 피시디아 주의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바리사이 출신으로 짐작되는 유다인들이 또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16,16-22)
결국 바오로 일행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주어 풀려났고(사도 16,25) 필리피를 떠나 데살로니카로 가서 선교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사도 17,1) 그렇지만 리디아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사도 일행이 박해를 당하게 되면 그 일행을 인근 베레아 등지로 피신시켰다가 남부 아카이아 지방으로 선교하게 하는 기회로 삼았고, 다시 소아시아로 건너가 에페소 선교를 하게 될 때에는 물론, 에페소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라도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후원해 주었습니다.(필리 4,15)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오로는 자신이 아끼던 제자 티모테오를 필리피 공동체의 봉사자로 파견하였고(필리 2,19), 필리피 공동체는 에파프로디토스를 사도 바오로의 수행원으로 파견하여 에페소 감옥에서의 수감생활을 수발들게 했습니다.(필리 4,18) 이러한 인적 교류까지 가능했던 데에는 당시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망라하던 에게해 연안지역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리디아의 국제적인 안목과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할 줄 아는 역량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고스란히,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성령의 그림자 천사처럼 드러나지 않게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 뒷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피 공동체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고 감사하는 마음이 흘러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공유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기비허(自己脾虛)의 신앙고백은 박해 속에서도 성령 강림으로 예수의 신성을 깨달은 최초의 집단적 신앙고백이었는데(필리 2,6-11), 이 귀한 깨달음을 사도 바오로는 유독 이 필리피 공동체에만 전해주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 공동체를 동지적 호의와 감사로 표하는 마음에는 그 절반 이상이 리디아의 헌신적 도움과 활동을 염두에 두었을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바오로에게는 성모 신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공생활 당시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수많은 편지들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전혀 없고 간접적인 암시를 하는 한 줄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하지만 바오로가 제자로 삼은 루카는 마르코와 마태오가 써 놓은 복음서를 참조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를 기록하되 이방인 선교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기록하면서 복음화의 전망을 여는 한편 초대교회에서 활약한 사도들의 행적을 특히 대표적으로 베드로와 바오로의 행적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복음사가보다도 더 자세하게 언급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성모 신심은 루카의 기록 덕분이며, 특히 대표적인 성모찬송(루카 1,46-56)을 소개하는 가운데 파스카 과업을 상기시킴으로써 성모 신심이 자칫 파스카 과업인 복음화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고 신자들의 내면으로만 작동하는 개인신심화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까지 사전에 예방하였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바오로를 이끄셨던 이 위대한 그리스도교 초창기 선교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가 리디아 및 루카와 맺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룩된 섭리가 이러하였습니다. 이 섭리를 통하여 우리는, 사도직 활동은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되 파스카의 신비를 계승하여 구현해야 하는 역사적 신앙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직을 기반으로 복음화로 나아가기 위한 국제적인 안목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활용하는 태도는 그 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진리의 영’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찬송에서 강조하는 파스카 과업인 복음화에 있어서도 ‘진리의 영’이 복음적인 안목과 네트워크로 이끌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리디아는 바오로가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지중해 일대를 무대로 선교 활동을 하는 그 오랜 기간 동안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도 자신은 결코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며 사도 바오로 역시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영’이 이끄신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운명적인 만남이라 할 만 합니다. 바오로가 리디아를 비롯한 필리피 교우들과 맺었던 수평적 네트워크나, 루카와 나누었던 수직적 사제지간의 교분 역시 이 ‘진리의 영’께서 이끄신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의 영’께서는 바오로 일행을 일꾼으로 삼으시어 서방 복음화를 기획하셨습니다. 이 기획에 따른 성과와 시행착오까지도 참고로 삼아서, 이제는 동방 복음화를 기획할 때입니다. 서방세계의 복음화를 개척하던 그 시기에 힘차게 일하셨던 ‘진리의 영’이 동방세계의 복음화로 나아가야 하는 이 복음화 제3천년기의 여명을 어떻게 이끄실지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손길을 찬송하던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루카 1, 4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