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태계가 파괴된 세상에서는 인류도 문학도 존재할 수 없다
권혁준
ChLA(Children’s Literature Association)의 2020년 콘퍼런스의 대주제는 ‘생태 아동문학’이었다. 이 세계 아동문학 대회는 2020년 6월 초순에 미국 시애틀에서 열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ChLA 측에서 특별히 한국 아동문학 연구자들에게 한국의 생태 아동문학을 소개해 달라는 제의가 있었다. 나는 마침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 대학교에 2020년 3월부터 1년 동안 방문학자로 머물기로 되어 있던 차였다. 내가 머물기로 한 도시에서 세계 아동문학 대회가 열리다니, 이건 참 우연이었지만 나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마치 세계의 아동문학 연구자들에게 한국 아동문학의 우수함을 알리라는 계시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흔쾌히 발표를 수락하고 논문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내가 시애틀에 도착한 지 한 달 뒤부터 미국 전역에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4월에는 학교, 도서관, 미술관 등 내가 가보고 싶었던 모든 기관이 문을 닫았고 공원, 교회, 식당까지 셧다운되고 말았다. 모든 기관과 업소가 문을 닫아걸었는데도 코로나 확진자의 증가 추세는 가히 놀랄 만한 수준이었고 더 놀라운 일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코로나에 대한 인식과 코로나에 대처하는 미국 보건 당국과 병원 등의 태도였다. 이것이 세계 최강국이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을 자랑하는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정말 어이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코로나로 인해 6월 초순에 열기로 했던 ChLA의 학회도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으며, 미국에 머물 동안 계획했던 여행, 공부, 운동 등의 모든 내 일정도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ChLA의 집행부는 인도의 아홉 살 소녀 리디마 판디와 영국 전역의 수천 명의 학생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파업에 나서는 현실을 소개하면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정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녹색 운동의 필요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아동문학 분야에서 지구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려 한 것이었다. ChLA의 기획서를 보고서야 나는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에서 생태 문제의 긴급성을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구촌 전체로 번져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치 ‘이제서야 너희들이 위기를 깨달았구나, 하지만 너무 늦었어’ 하고 말하는 듯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를 망가뜨린 인간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던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내가 지난해 ChLA에서 발표하려고 했던 논문의 개요를 잠깐 소개하면서 작가, 연구자, 학부모, 교사 등 우리나라 아동문학 관계자들이 생태 문제라는 주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왜 이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말해 보려고 한다.
내가 이 학회에서 발표하려고 했던 주제는 ‘한국 생태그림책의 전개 양상과 발전 방향’이었다. 우리 그림책의 수준은 세계적으로 매우 우수하다고 인정되고 있다. 한국은 2004년에 처음으로 볼로냐 라가치 상을 수상한 이래, 2010년 이후로는 매년 꾸준히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여섯 작품이 볼로냐 라가치 상의 전 부문을 수상하여 한국 그림책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특히 2020년에는 백희나 작가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아 한국 그림책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나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이 생태 문제를 어떻게 표현하였고 그 예술성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를 연구하여 세계의 아동문학 연구자들에게 이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 환경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말에 이르는 시기였다. 한국의 생태그림책도 이와 같은 사회 현상과 맥을 같이 해서 전개되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자연이 파괴되고 강물, 토양, 공기가 오염되면서 환경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함과 더불어 그림책 작가들의 환경 문제에 관해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생태그림책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는 1990년 전반 무렵부터인데, 이 시기의 생태그림책은 그 당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던 공해 문제나 핵 문제 등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고 꽃이나 풀, 물고기, 곤충과 같은 자연물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책들은 대부분 사실을 충실하고 아름답게 묘사하였고, 생명의 성장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제시하여 어린이들에게 자연 친화적인 태도를 길러주고 있다. 세밀화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 그림책》(이태수 그림 | 보리편집부 글 | 보리) 시리즈는 지금도 많이 읽히고 있는 작품이다.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어린이들에게 생태를 보호해야 하는 당위성을 계몽하는 그림책이 출간되었고,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숲이 사라지고 환경이 오염되는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그림책이 등장하였으며, 삭막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쾌적한 자연을 꿈꾸는 이야기 그림책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들은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오염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주었지만,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생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계몽성이 앞서는 그림책들도 있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에는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더욱 극심해졌다. 이와 더불어 그림책 작가들의 생태에 대한 우려도 더 커져서 그림책에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도 더욱 강렬해졌고, 다양한 생태그림책이 출간되었다. 최근의 생태그림책은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 현장을 냉정하게 고발하고, 잔혹하게 죽어가는 동물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염원을 담은 그림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010년대 생태그림책의 또 하나의 경향은 환경의 파괴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 회복과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달 샤베트》(백희나 글, 그림 | 책읽는곰 | 2014)는 2020년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은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으로 강렬한 생태적 메시지가 예술성 있게 표현된 작품이다. 이 책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일들이 얼마나 심각한 환경 파괴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자연 회복의 대안과 간절한 염원을 판타지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넘어 인간 사회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일이 생태 문제 해결의 한 방법임을 주장하는 그림책도 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김장성 글 | 유리 그림 | 이야기꽃 | 2017)이 바로 그런 책이다.
‘동물과 어울려 사는 삶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그림에는 노란 수박꽃과 초록 수박 순이 굵고 녹슨 쇠사슬을 감싸며 자라고 있고, 수박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수박 넝쿨과 꽃이 덮어버려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녹슬고 뾰족한 쇠사슬은 전쟁을 비유하는 것이며, 높은 철조망은 한반도를 두 동강으로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 회복은 전쟁과 분단도 이겨낼 수 있다는 염원의 메시지이다.
또, 수박이 다 익고 나서 모두 함께 수박을 먹는 마지막 장면-휠체어를 탄 여인, 검은 피부의 남자, 금발의 여인, 노인과 아이들이 수박을 가운데 두고 어울려 있다-은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나 장애인, 여성이나 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도 모두 이 사회의 주인공이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전쟁, 분단, 장애, 성차별, 인종차별 같은 요소들의 철폐도 생태적 삶의 중요한 영역임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미래 세계를 살아갈 어린이들이 주인인 아동문학에서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는 긴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지구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뜨거워진다면 지금 다섯 살인 내 손자 다온이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그 애가 마흔다섯 살이 되었을 때 다온이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여전히 평온한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해서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하고, 캐나다 북부 지역에서까지 고온으로 사람이 죽어 가고, 캘리포니아에선 매년 산불이 더 번져 가고, 독일에서, 중국에서 홍수로 사람이 죽어 간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다온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지구를 상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아동문학 작가, 연구자, 도서운동가 모두 우리 분야에서라도 생태 운동을 서둘러야 한다. 생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생산하고 보급하고 읽혀서 생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야 한다.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어 버리면, 문학이란 예술도 존재할 수 없고, 사랑이나 휴머니즘 같은 가치마저 아무런 효용이 없어져 버린다. 일단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권혁준
공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회장 역임. 어린이도서연구회 자문위원. 저서에 《강의실에서 읽은 동화》, 《문학이론과 시교육》 외 다수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