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경건하게(godly,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성경말씀은 증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 때문에 받는 핍박에서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핍박'이란 복음 때문에 받는 어려움만 해당됩니다.)
(딤후 3:12, 개역한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우리의 육신과 새롭게 되지 못한 생각으로 인해 오는 마찰이 아닙니다.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런데 문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핍박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받을 수 있는 핍박이라면 아무리 친절하게 접근을 해도 예수님 얘기만 하면 과격하게 변하는 사람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 경험을 봐도 이런 경우는 거의 없고 상대방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런 것은 핍박도 아니지요.
제가 사역을 시작한 뒤, 정말 말도 안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예수님을 섬기다 받은 고난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뭣한 것들입니다. 일반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전임 사역자인 저조차 "복음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았구나" 하고 정직하게 직면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래는 바울이 주님을 위해 받은 고난입니다. 길더라도 한번 꼼꼼이 읽어봅시다.
(고후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고후 11: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엄청난 수고를 했고 감금도 됐습니다. 매도 많이 맞고 죽을 뻔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태장,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는 곤장을 195대나 맞았고 죽도록 돌에 맞은 적도 있습니다. 또 타고 가던 배가 파선하여 몇 날 며칠 밤낮을 바다에 떠다니기도 하고 빠른 강 물살에 휩쓸리고, 강도를 만나고 유대인들에게 이단 시비도 받고 광야에서 굶주리고 거짓 형제에게 위험도 당합니다. 잠 못 자고 굶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추위에 떨면서 옷도 못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면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것 즉, 힘든 것이 있는데 교회에 대한 염려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염려는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염려가 아니라 성도들의 괴로움을 함께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힘들어하면 자신도 함께 힘들어지고 누군가 애타하면 자신도 애를 태우면서 연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도들과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자신이 받는 고난보다 더 자기를 눌리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어떤 과장이나 자랑이 없는 것을 하나님도 아신다고 합니다. 또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온 적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친다면 63빌딩에서 곤돌라 같은 것을 타고 내려오는 것 정도가 되겠지요. 재미로 타는 것 말고요, 복음 때문에 도망가면서 겪은 일입니다.
이 사람 바울은 태생이나 교육이나 당시 최고였습니다. 빼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처럼 고기 잡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오직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고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당한 고난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중에 옥에 갇힌 것은 가장 참을 만한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이 여러 가지 고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런데 그는 자기가 받은 고난을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에는 조금이라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엄청나게 억울해하면서 힘들어하는데 바울이 저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억울해하지 않았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자신이 유죄가 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저 고난들을 경한 것, 가벼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는 미래로부터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시각, 영원이라는 기준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지금 받고 있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해 보니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또 영원히 누릴 영광과 비교해 볼 때 '이 고난은 아주 잠시 받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크리스찬 두뇌 과학자 캐롤라인 리프에 따르면 우리 두뇌 전두엽 쪽에는 나 자신을 제 3자로 여기고 내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 능력을 자기 객관화라고 하는데 (요즘은 메타인지 라고도 함)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사용하는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울과 같은 제 3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아, 그랬겠구나'하고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객관화입니다. 나를 제 3자로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핍박)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고 그랬다 해도 앞으로 받을 영광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