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0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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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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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lBrtD-Rswo&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3오병웅 베드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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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예수님께 던지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오만불손하고 배은망덕한 말인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오 복음 12장 38절)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 날이면 날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이 다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매일 당신 백성에게 건네셨던 신선하고 명쾌한 말씀이 표징이었습니다.
오랜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이미 목숨이 끊어져 버린 사람들도 당신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세우셨는데, 이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또 어떻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앞에 예수님께서는 ‘표징의 종결자’로 ‘사람의 아들’ 카드를 제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현존 자체가 가장 극적이며,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표징임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 세상 육화 강생 그 자체, 당신의 현존 자체가 가장 큰 표징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습니다.
사실 황공하고 송구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다는 것, 이것처럼 큰 표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셔도 좋을 텐데, 때로 아비규환이고, 때로 냄새나고, 때로 진흙탕 같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면 더 송구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랍니다. 정말 하찮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각자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부당만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 더 큰 표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역시 그 옛날 율법학자들와 바리사이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도 해가 뜨고,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고, 또다시 생명으로 초대받은 것은 명백한 표징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과분하게도 성찬례에 초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며, 그분과 한마음 한 몸이 되는 것, 엄청난 표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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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표징 다음이 설교>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평생을 오상의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하러 가서 그분의 유해를 보니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오상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돌아가시면서 오상이 사라지고 다시 살로 덮였다는 것입니다.
막상 오상의 흔적을 볼 수 없다 보니,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불경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분이 보여준 순명과 인내, 겸손의 모습에서 오상의 흔적이 지워진 것은 그분을 존경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표징은 그 사람에게 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지면 표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기를 원치 않아 안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당신이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것을 보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나 예언자와 남방 여왕을 예로 드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큰 도시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기적을 본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멀리서부터 왔습니다. 표징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우러 와서 믿음까지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믿으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표징 없이 설교만 듣고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더 높은 수준인데 설교를 들으러 와서도 계속 표징만 요구하는 의도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치 않아 핑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와서 설교를 듣고 있다면 표징은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표징은 그 자리에 오게까지 하는 힘만 발휘하면 충분합니다.
기적은 감정을 자극합니다. 만약 이 기적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정에서 이성으로 넘어가지 않는 표징은 이내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표징에 집착하며 믿음을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은 쉽게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적은 타 종교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전에 기적이었던 것이 요즘은 일상이 된 것도 많습니다. 이전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폐렴을 주사 한 방으로 손쉽게 고치는 것을 보면 모두 기적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도 많이 합니다.
표징은 잠깐 감정을 자극하여 시선을 유도하는 목적이 있어서 그 표징만 찾아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하늘의 표징을 찾기 위해 하늘만 바라보다가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분 앞에 왔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해하면 표징은 소용이 없어집니다.
기도할 때 손이 떨린다든지, 하늘에 표징이 나타났다든지, 성체 영할 때 혀가 뜨거워졌다든지, 병이 치유되었다든지 등의 표징들은 이제 이성적으로 공부하라는 이정표로 여기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표징을 자신들이 특별해서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표징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이상한 종교집단을 만듭니다.
표징을 보여주시는 단계는 아주 낮은 단계입니다. 그 위가 이성으로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감성적인 것에만 머무르려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표징 다음이 설교입니다.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보면서도 젖을 먹었던 것을 기억 못 한다고 다시 젖을 달라는 자녀가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습니까?
하느님을 이성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했는데도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는 악하고 비뚤어진 세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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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러분 삶의 의욕의 정도를 측정해 드립니다>
무엇을 잃으면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무엇을 찾으면 삶의 의욕을 찾을까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 사는 지니는 요술램프를 소유한 주인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지니가 당신에게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제가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하느냐면 이 대답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가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계 제일 부자인 빌 게이츠에게 같은 질문했을 때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이 묵상글의 끝에 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유튜브에 매일 복음 묵상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 교리서 해설, 영성 서적 해설, 성서 해설까지 올리니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많이 알아야 하는 건가요? 시골 할머니의 단순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많이 알아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저는 당황하여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셨다면 배우는 게 좋아서 그러셨겠죠.”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해도 잘 못 하는 이유는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허술한 대답에 답이 다 있습니다. 삶의 이유는 더 배워서 뱀에서 소로, 모기에서 예수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배움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삶의 의욕은 결국 비례합니다.
아기가 진정한 성장을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부모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물으며 배움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성장을 멈추는 때는 언제일까요?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배움을 멈추는 때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알았으니 더는 부모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심지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따라 하면서 참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이 자신도 부모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것 이상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려는 이에게 주이지는 시간도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배운다면 말입니다.
워런 버핏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니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며 물을 때 빌 게이츠는 이것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청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자세가 곧 인생에 대한 자세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절대 없다고 평하십니다. 왜냐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실 표징이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표징은 무언가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표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배워서 회개한 것입니다. 이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아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습니다.
인생에 대한 자세가 배우려 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얼마나 더 배워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냐가 얼마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느냐와 비례합니다.
지니가 다시 한번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아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발전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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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38-42: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38절) 하며 유혹을 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39절) 라는 말은 하느님을 유일한 신랑으로 알고, 사랑받는 배필로 사는 삶을 버리고, 즉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버리고 악과 거짓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간음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리를 꼬투리 잡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쓰러지고, 표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알려는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불신앙 속에 갇힐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4).
예수께서는 요나가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이, 당신이 고난을 받고 사흘째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시한다고 하셨다. 유다인들은 니네베 사람들에 비교되면서 책망을 듣는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기에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1절) 하신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2절). 여왕은 여인의 몸으로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하였다. 지혜를 원하는 것만큼 힘이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솔로몬에게 가서, 그의 말을 직접 들으려 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도 그를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지혜를 하찮게 여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니 주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떠나고 만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보아도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고, 두 사람은 종이기 때문이다. 이 종들의 말에 다른 민족들도 귀를 기울이는데, 주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의 말과 행위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삶을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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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8-41)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4-25)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없으니, ‘직접적인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는 말은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뜻으로는 그냥 ‘당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달라고 요구한 일이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일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한 일이고,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면서 사도들도 자주 겪었던 상황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당신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선포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시오.”라고 요구할 때, 그때 사도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할 때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은 그런 대답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적인 물증을 요구합니다. 사실 신앙과 복음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질 때 ‘말’만으로는 그 논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적대감과 박해만 더 심해질 뿐입니다. 신앙과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또 자신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바로 증언하는 사람 자신의 ‘삶’입니다. 따라서 ‘순교’는 우리의 신앙과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최고의 증거가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사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참 종교라는 것을, 또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 우리 자신의 ‘삶’이 그 요구에 대한 대답입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조금만 힘들어도 금방 흔들리고 절망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과 희망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또 신앙인이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의 첫 단계가 됩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살아야 한다.”, 또는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을 탓하기 전에 먼저 신앙인 자신의 삶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라는 말씀은,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표징을 보이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하늘에서 표징을 내려 보내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인이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려면 먼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악하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이고, ‘절개 없다.’라는 말은,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재물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보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것은 죄라고, 최후의 심판 때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증인 자격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이 증인 자격을 얻은 것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고, 요나의 선포를 믿었기 때문이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요나 3,5)>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요나는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요나보다 ‘더 큰 이’, 즉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이지만, 재림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일과 회개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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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수녀님들과 8일 피정을 하면서 ‘두 개의 깃발’을 묵상 주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는 사람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겠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담배를 끊겠다고 말은 하지만 운동은 하지 않고 담배는 계속 피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였지만 유혹이 찾아오거나 시련이 다가오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늘 다짐하지만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서 끝까지 주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순교로써 기꺼이 목숨을 내 놓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같은 분입니다. 끝까지 달릴 길을 다 달렸던 바오로 사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3가지 겸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운전이라면 ‘준법운전’과 같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교통사고는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머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겸손은 계명을 잘 지키면서 계명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부모에게 전화를 자주 하고, 찾아가서 용돈도 드리는 것입니다. 운전이라면 ‘안전운전’과 같습니다. 빨리 가겠다는 차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양보하는 것입니다. 장거리 여행을 가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겸손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난한 삶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놓는 것입니다. 운전이라면 ‘양보운전’과 같습니다. 짐을 들고 가는 어른이 있다면 세워서 모셔다드리는 운전입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는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을 하였던 요나는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이야기했던 요나는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 요나는 이제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다. 바로 세 번째 유형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바로 세 번째 유형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여러분을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사실 여러분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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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요나의 설교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였던 니네베 사람들과는 달리,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신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은 메시아의 신원을 증명하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백성들이 메시아를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닐 뿐더러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모습 또한 무례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든 사람(마태 12,9-14 참조)과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 못 하는 이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습(12,22-32 참조)이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소개된 것을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한 것은 표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하였을 때 요구와 질문이 많아지는 때도 있습니다. 요구와 질문은 순수한 바람이나 궁금증이 아니라, ‘난 네가 싫어.’ 또는 ‘하기 싫어.’라는 메시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도 “회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거부의 표현입니다.
성경을 읽고 싶지 않은 만큼, 기도하고 싶지 않은 만큼, 자신의 잘못을 보고 싶지 않은 만큼 교회와 사제, 동료들을 향한 요구는 많아집니다. 그런 그들을 변화시킬 만한 동기는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돌 같이 굳어 버린 자신의 마음에서 그 변화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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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
내가 나이거늘
내가 나라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내가 나라는 표징을
달리 보여줄 수 있으랴
내가 나라는 표징을
설사 보여준다고 한들
내가 나라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있으랴
내가 나라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나를 나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거늘
굳이 표징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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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더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듣고 이제는 초연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라고 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이요, 절개 없다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선하고 절개 있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내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표징을 아무리 많이 보여줘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준비 없이 심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열면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마음을 열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요, 기적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면 나머지는 감당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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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제오늘의 상황은 아니지만 요사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더욱더 실감하는 현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이 변화와 다양함은 더욱더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어 나의 미래와 현실에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나의 신앙이 미지근할 때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지난 1984년 신앙 전래 200주년 행사가 여의도광장에서 있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하늘에서 십자가 모양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기적이 일어났다고 환호를 질렀던 상황이 기억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이상한 일이 조금만 일어나도 찾아가 확인하고 맹신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치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고정해버리고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신비는 외적인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과 성체 안에서 더욱더 뚜렷이 드러나고 우리의 신앙을 오랫동안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께 표징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표징이 없으면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를 모르는 이 세대를 한탄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고 기적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한탄스럽게 고향을 떠나가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이지만 그 자체로는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기적이 항상 인간의 편에서 이해되고 한정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적을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눈을 가지게 함이요, 기적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이미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기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안에서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날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요. 기도할 수 있다면 무딘 나의 마음을 변화시킨 하느님의 기적이며 미사성제를 통해서 감사와 구원의 은혜를 느낀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입니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늘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신앙의 변화가 나의 삶을 이끄는 주님의 은혜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이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조그만 물리적인 변화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물러 있는 신앙의 신비에 눈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우리는 참으로 심오한 기적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돈독히 만들어 줄 것이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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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기적은>
앤소니 드 멜로라는 신부님께서 적은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이 이슥할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웃 사람 하나가 가로등 아래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열쇠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 대답을 듣고 집으로 가던 그 사람도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같이 찾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쭈그리고 앉아서 잃은 열쇠를 한참을 찾았지만, 열쇠를 찾지 못하자 그 사람이 이웃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리셨는데요?"
이웃 사람이 "가로등 저쪽 어두운 데서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서 찾고 있습니까?" 하고 재차 물으니 이웃 사람이 대답하길: "여기가 더 밝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밝은 곳에서와는 무엇이든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 무엇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는 것도 역시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지닌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혼동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어려운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에게 쉽고 다가오고 좋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진리인 양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권능을 통하여 당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믿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어지러운 오늘의 세태를 반영이나 하듯이 많은 사람이 기이한 현상들이나 환상들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그러한 행위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그러한 현상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손길을 직접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가고 생활 태도를 조용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복적인 신앙이 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기적의 의미에도 맞지 않는 것일뿐더러, 그 사람 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실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으로 불릴 수 있는 현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한 현상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우리의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결코 내가 초자연적인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믿음에 근거를 두고 행한 나의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곤경에서 벗어나 주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은 믿음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될 수 있으며, 어쩌면 오늘날 더 많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기적은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수단이며,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또다시 이 믿음은 초인간적인 힘을 우리에게 주어 정상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신앙으로 인하여 나의 삶의 근본 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사랑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만 가능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를 참으로 그리스도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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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합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기적이 진리를 보증해 주는 것처럼 요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신앙 안에서 기적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현대인들은 기적을 보면서 당혹감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기적은 본질에서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려고 행하시는 자기 과시나 보증 수표가 아니고, 자녀 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청하는 이들의 간절한 마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기적은 우리 자신을 깊은 회개에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미리 잘 준비되어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고,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를 오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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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커다란 행운이 갑자기 찾아오길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 큰 부자가 되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승진되고, 무엇보다 저절로 최고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 그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요?
지출을 줄이면서 조금씩이라도 저금을 계속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에 부자가 됩니다. 매일의 열심한 노력을 통해 상사에게 인정받아 원하는 승진을 하게 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꾸준한 연습으로 인해 어느 순간 자기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됩니다.
아는 신부가 자기 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글쎄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는 것입니다. 한 10kg 감량을 위해 수영을 시작했는데, 1시간 동안 그렇게 힘들게 운동하고 나면 겨우 500g 정도 빠진답니다. 그런데 물 한 잔 마시고서 체중을 재면 다시 원래의 몸무게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수영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포기했습니다.
단 한 번의 운동으로 10kg 감량하게 된다면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잘못된 운동을 하는 것이고, 몸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매일의 운동으로 조금씩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의 크기가 너무 작았을 뿐입니다. 작다고 해도 그 변화가 합산될 때 인생의 질은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단번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큰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까요? 커다란 기적을 통해 더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을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면서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표징이 필요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이야기하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합니다. 이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는 것이지요. 즉, 요나 예언자보다 훨씬 크고 높으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큰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회개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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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 파스카의 삶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는 분이시다.”(시편54,6)
새힘을 북돋아 주는 시편 입당송이 은혜롭습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의 앞부분은 사람을 대할 때 마다 늘 상기하고 싶은 구절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참 소중하고 경이롭게 대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어마어마한 일은 그와 함께 주님이 오기 때문에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2014년 안식년해 산티아고 순례는 제 후반부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된 해입니다.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이 사용했던, 또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사용할 강론 주제는 ‘여정’입니다. 특히 늘 염두에 두는 바, 일일일생, 내 삶을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는 시점에, 지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일일생, 아침 6시 시작하여 저녁 6시로 끝나는 하루로 압축할 때는 오후 4시쯤, 또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는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벌써 수차례 강론에 소개했을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하루하루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회개의 여정, 파스카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게 합니다.
1.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2.삶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3.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회개의 삶이자 파스카의 삶이다.
늘 화두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좌우명 같은 말씀으로 회개의 여정, 파스카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말마디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야 말로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적 처방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주님을 닮은 참나의 참사람이, 주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하늘 비 내린 며칠동안은 불암산 계곡물 흐르는 옆길을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걸었습니다. 맑게 노래하며 흐르는 물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 끊임없이 맑게 샘솟는 우물, 바로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파스카의 삶을 상징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미카서의 미카 예언자나 복음의 예언자 우리 예수님이 촉구하는 바, 바로 회개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정녕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고,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해 내었으며 너희 앞으로 모세를, 아론과 미리암을 보냈다. 내 백성아, 기억해 보아라.”
망각忘却이 죄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감사하며 새롭게 살아내야 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 미카는 회개한 영혼들에게 참다운 경신례의 정신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6,8)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참 아름답고 소중한 구절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느님과 함께 걷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이 말씀을 맨처음에 만나 감격한 것은 바로 지금까지 살아있는 99세 최장수 전임 미국의 제39대 카터 대통령(1924- )이 취임식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약속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45년전 1977년, 제가 29세 청년 교사로 신림초교 6년을 담임했을 때 카터 대통령 취임식 때 이 성서 구절을 대하고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고 감동했던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있는 우리 주님이자 스승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신의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때로는 인간의 진보가 과연 가능한지,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가 아닌지 회의할 때도 잊지만 그러나 역사는 조금씩 진보한다 믿으며, 이에 우리의 부단한 회개와 파스카의 삶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무수한 하늘 나라 표징을 체험했으면서도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의 무지無知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무수한 하늘나라의, 회개의 표징들인데 말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 연도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들이요 회개의 표징들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산책시 즐겨 부르는 1945년 해방후 유행했던 옛 노래중 마지막 연입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 가슴엔 언제나 봄바람분다.
어화어화데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회개의 결정적 표징인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때 그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주님은 요나 예언자와 남방여왕을 회개의 표징으로 열거하신후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오늘 여기 지금 현존하시는 당신이 회개의 결정적 표징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요나보다 더 큰 참 예언자이시며 솔로몬보다 더 큰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시종여일始終如一, 한결같이 회개의 여정,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이 나를 공경하나니,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는 하느님 구원을 보여 주리라.”(시편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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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12,39)
<십자가 표징의 예표인 요나의 표징!>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그들을 두고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라고 하시면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12,40)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하고 절개 없는 사람들(세대)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과 당신의 십자가(죽음) 표징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시기까지 사흘 동안 땅속에 있었던 표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표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는 '이 표징 밖에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우리도 주님께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미카6,1-4.6-8)는 그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6,8)
그것은 곧 '회개'입니다. '내가 죽는 회개'입니다. '그것도 오늘(지금)!' 그런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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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Jyz1wWeT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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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 39)
자기정화가
필요한
우리들
세대이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사람이
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게 된다.
참 사람이
여기에 계신다.
실천하시는
사람이 있다.
가장 큰 표징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다.
하늘 나라가
되시는 분이
여기에 계신다.
기다려주시며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사람의
주님이시다.
회개와 지혜가
빠져버린 길은
참된 길이
아니다.
우리는
회개의
구경꾼이 아니라
회개가 절실히
필요한
회개의 사람들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로
사람을 다시
찾으시는
예수님이시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큰
한 사람이
사람을 살리신다.
회개의 시작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 예수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보라,
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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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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