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속에 핀꽃 우담바라?
어제 전철을 타고가며 희귀한(?) 장면을 보았다. 여유없는 좌석에서 내옆자리 아가씨가 책을 꺼내어 읽었다.
그랬더니 조금후 건너편의 아줌마와 책읽는 아가씨 옆에 새로 자리를 잡은 아줌마 역시 책을 꺼내었다.
이런 관경 알마만이더라? 많이 과장해서 인도불교 3000년만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 피는 전설의 꽃인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흐뭇하게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예전의 서울 지하철 안에서 너도나도 읽을거리 펼쳐든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문이든, 전문 서적이든...무엇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보아야겠다는 욕구, 그때가 우리 경제가 한창 성장할 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공부는 어느 단계에 다다르기 위한 정형적 코스이고, 사회의 공부란 정해진 지표나 총량이 없이 자유롭다.
뉴스에서 동남아의 젊은이가 우리나라 청년들이 휴대폰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감격을 했더라고 들은적 있다.
그것에서 얻어지는 지식과 정보가 많을 것이란 생각으로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무엇을 검색하는지를 알고 나서는 쓴웃음을 짓더란다.
"겨우 게임이나 즐기는 니들, 별거 아니구나..."
휴대폰 화면을 통해 얻는 것, 자극적 충동적 용어, 넘쳐나는 유행, 그리고 건전한 영혼을 잠식시키는 게임들...
사실 우리나라더러 IT선진국이라 하는데는 그분야 산업발달도 있겠지만,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다보니 기지국과 안테나가 촘촘히 서있는게 한몫을 한다고 하였다.
아침 어느 밴드 회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깐다며, 어릴적 공부 못했던 것과 힘들었던 지난 삶의 역사를 공개했다.
여기저기 동시대 사람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미인가 학교, 고등공민학교, 전수학교를 다녔다는 애기도 있다.
책보따리, 벤또, 검정고무신 애기도 나왔고, 이어 검정고시에 이어 사우디와 배고픔으로 진화되었다. 사실 그 당시는 삶의 현장이 급했고, 공부란 사치였다.
그들에겐 '이제 말할 수(터놓고) 있다'란 생각이니, 대략은 밥먹고 살만한 처지가 되었나 보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보릿고개를 아는 사람들은 세상을 흐트러지게 살지 않지요. 박수 보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가방 늘어졌다고, 인품높고 잘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공부란 책을 읽는 것만도 아니다. 삶의 영역에서 알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공부인 것이다.
어린시절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동네형이 배추농사를 지으며 야학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매우 존경스러웠다. 우리도 그래볼까? 친구들 몇몇모여 동네 조무래기들 가르치다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였다.
공부란게 별거 있겠나? 자신의 삶의 영역을 공고히하고, 진정성을 갖고 살면 되는 것을...다만 자신의 닫힌 창문을 여는데는 다소간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