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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깨어있는 조직된 힘
2024년 3월 30일 오후 7:15
제931회 사드배치반대 김천촛불집회
저녁 8시 김천역 광장에서 사드배치반대 평화촛불집회가 오늘도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김종희 사회자 여는 발언>
김천에 8년을 살면서 날씨와 농사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매주 목요일이 되면 오늘의 촛불 집회를 준비를 시작합니다. 일요일의 사회자이기에 이번주 집회를 생각하면서 혼자 잉크와 펜대를 잡으며 폼을 잡아봤습니다. 그러다 문득 문익환 목사님의 시가 떠올라 옮겨적어 봅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늦봄 문익환 목사(1918 – 1994)-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중략>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문익환 목사님은 1989년 1월에 이 시를 쓰시고 3월에 평양을 가셨습니다. 2021년 김천에도 남북평화철도 잇기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행사 주최자는 ‘평화와통일을 여는 사람들’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고영대 대표가 “남북평화철도를 가지고 휴전선을 넘어갈 때 유엔사에서 못간다고 막고 총으로 쏘려고 한다면 쏴라 나는 넘어갈꺼다” 이렇게 외치는 고영대 대표를 직접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 저는 참으로 울컥했습니다.
사드를 철거하는 것이 이땅의 자주를 이루는 길이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며, 외세에 의한 분단의 고착화를 극복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드를 철거하는 것이 김천과 소성리의 평화를 되찾는 길이기도 하지만, 70년 피흘리며 적대하는 대결을 끝내는 평화의 시작이기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힘차게 오늘의 집회를 시작합시다.
이 땅의 완전한 자주와 통일을 위해 먼저 가신 순국 열사님을 위한 묵념과 의레를 하겠습니다.
<오늘의 강사 : 구자숙 기록팀장>
오늘 3월 24일은 1919년 3.1운동 때 네 번이나 시위를 한 개령 만세시위 운동 첫날입니다.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촛불집회가 강변공원, 농소면사무소, 율곡동 안산공원, 김천시청을 거쳐 김천역 평화광장에 정착했던 첫날, 제가 조금 늦게 나왔더니 이미 사람들이 꽉 차 있어 놀랐습니다.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어떤 사람이 “저거 김천 사람 아니다. 다 딴 데서 저만큼 온 사람들이다.”고 외쳤습니다. 남편이 사우나 할 때도 사람들이 그랬대요. “김천 사람들이 그래 나올 리가 없다. 다 다른 데서 온 거다.”
그런데 놀란 것은 자리에 앉은 김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 김천이 이런 적이 있었나?”
그런데 김천근현대사를 공부해보니 웬일인게 아닌 걸 알게 되었습니다.
미스터 선사인에 “30년 전 싸우던 그들의 자식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나?”였던가 아님 “그들 부모 30년 전 어떤 일을 했나?”였는지 하여튼 그 같은 말을 친일파 관료가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포수 아버지는 신미양요때 강화도에서 열악한 무기로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들과 끝까지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죠. 고애신 부모는 일본에서 지하 의병 운동을 하다가 죽었지요.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 그 자식 세대들이 나선 겁니다.
그럼 김천은? 100년 전 김천은? 또 그 100년 전 김천은 어떠했나요? 그렇게 물어보며 거슬러 올라가면 김천에 저항하는 민중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62년 전국에서 농민들이 가혹한 수탈에 항의해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나친 세금과 부역, 공무원들의 횡포 등에 반발한 겁니다. 개령은 향반(지방토호) 김규진의 지도로 개령장날 일어나기로 했습니다. 이를 미리 안 관청에서 김규진을 잡아가자 농민들은 개령장터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더 기다리지 말자며 그 길로 관아로 쳐들어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구해내고 횡포가 심한 전직 아전을 죽이고 수령의 옷을 벗겨 매를 쳐 내쫓습니다. 다른 농민항쟁보다 기간이 짧았으나 아주 과격한 항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60여 년 후 개령에서 다시 그 저항의 물결이 일어난 겁니다.
3월 24일은 마침 개령보통학교 졸업식인데다 마을 한가운데 있던 은창서 집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날이죠. 여기서 당연히 화제는 고종황제 승하와 3.1만세 시위였겠죠. 서울에서 배재학교를 다닌 김태연에게 상황을 물어봤을 겁니다. 이에 김태연은 마을 주민과 집안 사람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그 길로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유동산(산이 이동했다 해서 이동산이라고도 부르는)으로 행진하여 이 중 김태연·허철·김종수·최영돈이 체포되어 태 90대를 맞았습니다. 태 90대를 하루 만에 맞으면 초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사흘에 걸쳐 나누어 때렸다고 합니다.
김태연, 우리가 보통 아는 김단야 선생은 이후 상해, 블라디보스톡, 모스코바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격문을 써서 국내에 들여오려 했던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손녀이신 김현숙 님의 노력으로 독립장을 서훈받았지만 시신이 없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었는데 작년 국립묘지법이 개정되어 현충원 안장이 결정된 계기로 서울의 6.10만세 유족회 중심으로 김단야 기념사업회 준비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준비모임에서는 1월 15일 김천시의회의장을 방문하여 항일운동 관련 지원 조례 만들기와 김단야 선생 기념비 건립과 생가터 표지석 세우기 등을 요구해서 협조하겠다는 답을 받아냈습니다.
또 올 6월 10일 김단야 학술제를 서울 글로벌센터에서 열려고 진행 중입니다. 우리 김천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김천의 독립운동가를 더 잘 아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생가터 표지석 세우기를 위한 모금운동을 네이버 해피빈에서 진행중입니다.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94024
일제가 '제일 맹렬히 잡고자' 했던 김단야
일제가 ‘제일 맹렬히 잡고자’했던 김단야. 김단야의 생가(김천시 개령면 동부리)터와 유동산 인근에 작은 표석 건립을 하고자 합니다. 뜻 있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happybean.naver.com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단야 선생을 알리고 기리는 작업은 중요하지만 개령농민항쟁때 김규진이라는 양반 없이 관아로 달려갔던 농민들처럼 개령의 평범한 사람들은 3월 24일 이후에도 만세시위를 이어갔다는 사실입니다.
4월 3일, 4일 이틀 연속 시위를 하여 문정환·홍득인·문학이·박소봉 등이 체포되어 태 90대를 맞았습니다. 특히 4차는 머슴들이 중심이 되어 뒷산(이뽀지 만데이라 했다 하는데 관학산으로 추정)에서 만세를 불러 김임천·도말영·김명길·정남준·황도석·이말용·윤광어리·최안·김타관 등이 체포되어 역시 태 90대를 맞았습니다.
김태연·허철·김임천·도말영·김타관은 서훈을 받았습니다. 최영돈은 김태연의 고모부로 원래 고령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령에서 서훈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묻혀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업적이 작은 것이 아니기에 그분의 후손들이 나서서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합니다.
김태연과 개령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어섰을까? 그 60여 년 전 개령 사람들은 왜 관아를 향해 달려갔을까? 그로부터 3세대가 지난 100여 년 후 김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모여 외쳤을까? 저는 무어 그리 큰 이념이나 이론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서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그게 자존감이라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러려면 자신들의 자유를 짓밟는 세력에 대한 저항은 자연스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오늘의 과거 모습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거듭 되풀이된다고 할 때 그때 그 결정이 오늘 이 결정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때 그분들이 가는 길에 느꼈을 외로움을 우리라고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운 자연스런 길이라 믿었듯 내가 스스로 인간다움을 증명해 보이는 길이라 믿기에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게 아닐까 개령 만세시위 그 처음이었던 3월 24일 오늘 다시 생각해 봅니다.
<최현정 부위원장 발언>
김천시가 새해가 되면서 SRF 허가를 내주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서 시청 앞에서 아침에 피케팅도 하고 반딧불 집회도 했었는데요. 기억하시죠?
설 연휴기간에 2017년 허가가 절차적 하자가 있는 것을 하승수 변호사가 서류 검토를 해주셔서 알게되었고 김천시에 허가취소를 요구했던 상황이였죠. 그런데 한 달 넘도록 무슨 법을 누가 어떤식으로 검토를 하고있는지도 알 수 없고, 시장 면담도 아니고 국장면담을 한 달을 미뤘는데 앞으로 더 한달을 미뤄 총선이후에 만나자고 하는데, 총선이랑 자기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초 계획대로 그냥 김천시에 항의방문을 하자 결정이 되어 시장에게 서한문이라도 전달하고 오려구요. 시간 되시는 분은 내일 오후 2시 시청 앞으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선거도 다가오고 있어 정부와 정당의 폐기물 정책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광장에서 숱하게 외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다들 잘 아시죠?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소각장 반대활동을 하면서 헌법 제35조를 많이 말하게 되는데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당연할 것 같은 말이죠? 헌법에서는 그렇게 정하고 있지만 많은 법들이 실상 그렇지 않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는 대기환경보존법으로 서울 수도권과 대도시 국민들로 정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석탄발전소 건립을 해당 지역에는 불가능하죠.
또 수도권과 대도시의 폐기물들이 도로를 따라 지방으로 소도시와 농촌마을에 경계없이 들어와 시멘트공장, 제지공장, 염색공장 등에 연료로 소각되고 산업단지조성보다 쓰레기 매립이 우선되어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 성주산단에도 매립장 사업자가 부도내고 먹튀하였는데 침출수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사를 봤는데
이득은 사업자가 피해는 주민이, 문제발생시 복구는 지자체가 떠맡는 이상한 일들이 전국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선을 앞두고 지난 14일 여러 지역에서 상경하여 폐기물처리 업계 1,2위인 SK와 태영본사 앞에서 규탄집회 그리고 국힘당, 민주당 당사에 정책 개선 제안을 했었는데 국힘당은 원래 답변도 잘 안하는 것으로 알고있고 민주당의 경우도 제안한 5개 항목중 중요한 3가지에 보류라고 답을해서 보냈더라구요. 그 중 환경영향평가법 개선은 소각상 건립의 민주적인 절차를 보강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보류하였더라구요.
이렇게 정부와 국회는 지방에 관심이 없습니다. 표가안되니까 정확히 애기하면 뭘해도 뽑아주니까.
최근 푸틴이 대통령 선거에서 87%의 득표율 당선됐다고 독재라고 하는데, 김천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철우가 당시 83.5% 로 재선을 했었고 전국 득표율로는 최고였던 것 같은데, 뽑아주면 뭐 해요. 사드나 들여왔잖아요. 그래서 투표가 중요한데 갈수록 정치혐오로 투표 참여도가 떨어지고 한쪽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어짜피 누가되는지 알고있으니까
경쟁도 없는 이런 선거에 당선자는 제왕적 사고를 가지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되는 것 같습니다. 득표율이라도 떨어뜨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꼭 투표에 참여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민건강 위협하는 SRF 소각시설 건축허가 즉각 취소하라!!
<정진석 가수 발언>
오늘 시도 받고, 저보고 감사하다는 말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감사한 존재가 될 수 있어 좋네요.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얼마나 감사함을 받아야 할지 가늠이 안됩니다.
저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이 미안한 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