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보다 더 정다운 정을 느끼게 합니다.
형제라는 말에는
더 이상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형제 우애, 형제 사랑, 의로운 형제 등등
아무리 좋은 말을 붙여도 형제라는 고유한 의미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형제의 길이
엇갈리는 갈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이 다르고
셈과 함과 야벳의 길이 달랐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길이 다르고
에서와 야곱의 길이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암몬과 모압의 길이 달랐습니다.
형제는 함께하고 같아야 하고
같은 길을 가야한다는 성경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형제이기 때문에
같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은
형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 아침 버스로 이동하면서
버스 기사분과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종점에서 늘 같은 버스를 타기 때문에
모르는 기사가 없고 인사를 나누지 않는 기사가 없습니다.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 안은
승객이 없고 텅 비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취미생활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사분은 프로기사에 가까운
바둑 실력자였습니다.
바둑 이야기는 탁구 이야기로 이어졌고
웰빙 건강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바둑 취미 생활과 담배는
비례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크리스챤인 것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사분의 형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교회 장로라고 하였습니다.
형님은 교회 장로인데
동생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형제의 길.....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로 나뉘었습니다.
형님네는 모두가 교회를 다니고.....
동생인 기사분의 집은 아무도 교회 다니지않았습니다.
형님따라 교회 다닐 가능성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기사분은 인상도 좋고, 웃음도 넘치고,
인정 많은 따뜻한 이미지를 가졌습니다.
형님따라 몇 번 교회 가보았는데
도무지 적응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시스템은 믿는 성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심하게 낯선 환경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가 설교 듣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어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형님의 많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은
착한 성품을 가졌지만 설교 듣는 낯선 환경을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문득.....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 설교듣는 것은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사분은 천주교와 절에도 친구 따라 몇 번 가보았는데
자신은 종교 체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종교 체질이 아닌 사람은
어떤 종교도 가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사분의 눈에 종교인은
샤마니즘적이고 미신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의 취향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무교의 자존심은
종교인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강한 자의식을 가졌습니다.
믿음과 불신으로 나누어진 형제의 길은
철로처럼 평행선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를
심하게 고민하면서 글로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