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항상 있는 성벽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49:16)
옛날의 성들은 대부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져 있다. 견고하게 성벽을 두르는 이유는 적군의 침입을 막고 성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벽이 주님 눈앞에 항상 있는 성벽일까? 주님 앞에 물질의 재료로 만들어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 주님의 눈앞에 있은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님 앞에 항상 있는 성벽은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성벽이다. 새 예루살렘 성벽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 후까지 주님 앞에 항상 있는 성벽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피로 구원의 성과 곽을 쌓으셨기 때문이다.
사26:1“ 우리에게 견고한 성벽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다윗의 예루살렘 성은 견고한 성벽의 성이었지만 그 성벽은 무너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피가 없는 모형의 성벽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의 성과 곽을 삼은 성벽의 성전을 계21장에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 성벽은 12 사도의 이름이 있는 12 기초석과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열두 문이 있는 성으로 말씀 하셨다. 한마디로 “신구약 성도들의 결합체”를 새 예루살렘 성으로 말씀하셨다.
신구약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벽의 구성체가 되었다. 그것은 한 장 한 장의 피 묻은 벽돌이 서로 연결하고 첩놓이면서 크고 높은 성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보배롭고 존귀한 성벽인가? 그리고 피 묻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그냥 진흙을 짓이겨 만든 벽돌이 아니라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 하면서 만들어진 보석이요 정금으로서 결합된 성벽이다. 이와같은 성벽의 성을 새 예루살렘 성으로 말씀 하셨는데, 이 성을 계21:2절에서 신부로 9절에서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말씀하셨다.
주님의 신부들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눈 앞에 항상 있는 자들로서 보배로우신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면서 정금같고 보석 같이 공력있는 성도들이 되었다. 이들이 하나님의 눈앞에 하나 하나 나타나면서 크고도 높은 성벽으로 올라갈 때에 그 성벽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할까? 사49:16절에는 이들을 또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셨다.
이들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성벽이기에 항상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의 구성체가 되는 성벽이다. 이제 이 시대는 이 성벽의 실체가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이 완성될 때가 가까웠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새 선민 한국은 가장 하늘 새 예루살렘 성의 모의적인 성을 건축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나라이고, 세계 열국 민족들 가운데 거룩한 신부들을 불러 모으는 사명 때문이다. 그리고 불러 모은 그들을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의 구성체로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부들을 결합시켜 하나님의 눈앞에 크고 높은 성벽을 완성 시켜야 할 한국은 지금 어떠한가? 성벽이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성벽만 보이고 늑대와 여우 같은 인간들의 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가끔 보배로운 정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개체는 보이지만 연결이 되지 않고, 올라가는 성벽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 저기 눈에 뛰는 성벽 재료는 보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크고 높은 성벽이 눈앞에 보일 것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그 환상을 보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폐한 성 무더기 같은 그 속에서 탄식하면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높은 망루에서 주님이 세운 파숫꾼의 경고의 소리가 힘있게 백성들 가운데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리에 한사람 한사람 성벽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성벽으로 연결되고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삼자. 높고 웅장한 성벽이 유다 땅 전체를 둘러 진치는 광경을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