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2. 큐티
시편 102:18 ~ 23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 빈궁한 자의 기도는 자신의 형편과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다가 그것을 넘어서서 포로상태의 이스라엘의 형편과 상황을 아뢰는 것으로 연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으로 자신의 빈궁함과 이스라엘의 빈궁함을 넘어섬을 고백했다. 궁극적으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이 소망임을 찬양한다.
관찰 :
1)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하는 것들
- 18a절.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 언제든지 역사가 온전히 기록되고 전수되는 백성들은 소망이 있다. 역사가 왜곡되거나 부끄럽다고 그 수치를 가리거나 한다면 발전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빈궁한 처지에 처하여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장래 세대들의 믿음이 더욱 세워질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실패는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갖게 된다.
- 18절b.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 장차 포로 귀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의미의 찬양이다. 하나님이 포로 된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이끄실 것을 믿으며 그러한 역사가 하나님이 새롭게 이루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으로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도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그것은 책임과 의무를 넘어서는 자발적인 열정이다.
- 19절.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 하나님은 “엘 엘리온” 이시다. 지극히 높은 보좌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절대자이시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 이 땅을 굽어보시는 것이다. 그의 통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 20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 하나님이 포로된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실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백성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바벨론, 페르시아에서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에 대한 믿음이다.
- 21절.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회복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의 처소 시온에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높여지게 하실 것임을 찬양한다. 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등을 통하여 성취되게 된다. 시편 102편을 기록한 기자가 이 시를 기록할 때, 그들 중에 존재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 22절.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단지 포로된 이스라엘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을 향한 것이었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은 장차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은혜로운 소식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함께 섬기게 되는 복음이 될 것임을 시편 기자는 믿음으로 히브리민족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백을 올리고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로 기록되어야 하는 메시지임을 밝힌 시편 기자의 믿음을 볼 수 있게 된다.
2)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경외(敬畏)
- 23절.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혈기를 부릴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님이 그 힘을 약하게 하시면 누구라도 꼼짝없다. 느부갓네살도 자신의 명철함을 자랑하다가 들판에 떠돌며 짐승같은 시간을 칠년간이나 보내게 되었었다. 알렉산더가 위대한 정복자였을 지라도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 자신의 유복자와 아내가 암살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길게도 짧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 24a절.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 솔직한 표현이다. 중년에 딸린 식구도 많은 터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겨진 가족들과 가업들이 뭉개질 것임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유약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매우 현실적인 고백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
- 24절b.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존재양식을 가지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영원이라는 시간적인 개념도 하나님을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신 분이시다. 이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인생은 그 의미의 정확한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영영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다는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이 참된 지혜이다.
- 25절.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니이다” => 천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졌음을 다시 고백한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의 가장 밑바닥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에 대한 인정이다. 이것이 없는 하나님 인정은 가짜다. 창조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선악과를 제멋대로 따먹은 인간이 범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다.
- 26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 천지는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천지는 옷을 갈아입듯이 바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주님 오시기 전에 하늘과 땅이 새로운 체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 시간과 공간마저도 지으신 분이시다. 양자물리학에서 시간이 중력에 왜곡되는 현상이 증명되는 것은 시간이 창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 세상, 온 우주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신다. 시편 기자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다.
- 27절.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온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찬양을 받으시게 됨이 위대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신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두크에 의해 깨진 그런 것이 아님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이 이방으로 끌려오게 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이들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함이 이들에게 기쁨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포로된 신분이었어도, 그 땅의 주인들에게까지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놀라운 믿음이다.
- 28절.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도 항상 이어질 것임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존하시면, 하나님의 백성들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을 기쁨으로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또한 알게 된다.
가르침 :
1) 곤고한 자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이 부르짖음은 일상적이지 않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으로 인해 비록 자신들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와 있을 지라도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에 돌아갈 것을 너무나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영원무궁하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장중에 속해 있을 때 영원무궁히 존립하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찬미하고 있다.
2) 천지가 있다가 없어지고, 새롭게 빚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포로로 끌려온 자들에 의해서 고백되어지고 있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임하게 된 환란과 고통임을 처절하게 부르짖은 이들의 믿음의 고백이다. 자신들이 비록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징계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존하심으로 인하여 다음 세대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시고 이들의 바램과 믿음대로 역사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또 하나님을 배역하지만,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외면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붙드시고, 새로운 피조물을 지으시는 일을 중단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존하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도 영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소망이다. 감사이다.
3)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성은 결국 이스라엘이 아닌 열방이 모두 주님께 돌아와 찬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한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포로 귀환을 통하여 이 일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졌고, 새로운 피조물을 통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회복을 통하여 계속하여 이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그곳에서 모든 나라와 족속이 찬양을 받으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적용 :
1) 곤고한 형편에 처하였을지라도 그것이 개인의 문제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연하여 있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겠다. 시편102편의 기자는 자신의 곤고하고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유를 자신의 죄악으로 인식하였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태도와 온전하지 않음이 언제나 문제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연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소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이 동일하게 나의 소망의 이유이다. 내가 가지는 어떠한 생각과 계획도 하나님의 무궁하심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그 중심이 열심으로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꽝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으시면 의미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모든 소망의 시작이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이 나의 소망이다.
3) 주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오늘 일하실 하나님의 앙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