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15년 만에 종묘 다시 찾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
무한 우주를 담은 듯 종묘 정전처럼 장엄한 공간이 어디 있으랴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최정동 기자 / 중앙선데이 매거진 제288호 2012.09.16.
캐나다 태생의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83)는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걸물이다. 남들이 벽돌과 콘크리트를 애용할 때 그는 쇠사슬과 합판, 스테인리스 스틸과 티타늄 같은 독특한 재료를 골랐다. 다른 사람들이 성냥갑 스타일의 고만고만한 빌딩을 지을 때 그는 나풀거리는 치마 같은, 춤추는 연인 같은, 돛을 활짝 편 범선 같은 건물을 올렸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튀었고 논란이 됐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다. “나는 내 직관대로 설계했으며 언제나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건물을 지으려는 고객들은 일종의 판타지를 갖고 있으며 건축가는 그들의 의도와 기대를 알아내고 그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열성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프랭크 게리와의 대화』중)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미국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독일 바일 암 라인의 비트라 뮤지엄 등은 그에게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커츠상을 비롯한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 6 -스페인 빌바오 시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인테리어 /7 -마이애미에 있는 뉴월드 심포니 /8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프랭크 게리 /9 -뒤셀도르프에 있는 상업단지 데어 노이에 졸호프
올해는 그가 LA에서 건축사무소를 낸 지 50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해 부인, 두 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으로 가족여행을 왔다. 삼성의 현대미술관 프로젝트 논의를 위해 방한한 지 15년 만이다. 이번 여행에서 그는 반드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종묘(宗廟)다. 6일 오전 종묘가 채 문을 열기도 전에 정문 앞에 도착한 그들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 10 판지로 만든 의자 ‘이지 엣지스
“한국인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걸 감사해야”
6일 오전 8시50분 서울 종로구 훈정동 종묘 앞. 두 대의 차에서 벽안의 외국인들이 내렸다. 프랭크 게리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전날 삼성미술관 리움에서의 강연에 이은 만찬이 밤늦게까지 계속됐지만 그는 가족들에게 재삼 당부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다른 일정은 다 빠져도 좋은데 종묘 참관만은 반드시 우리 가족 모두 참석했으면 한다”고.
원래 종묘는 직원들의 안내를 통한 단체 관람만 가능하지만 그는 단독 관람을 원했다. 문화재청 종묘관리소는 삼성문화재단의 요청을 받고 “세계적인 명사가 요청하거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가능하다”며 단독 관람을 허락했다. 직원들의 안내에 그는 막바로 정전(正殿)으로 가겠다며 부인의 손을 꼭 잡고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정전. 19실(室)에 조선왕조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신 곳. 증축을 거듭한 기다란 맞배지붕이 순간 시야를 온전하게 채웠다. 문득 그가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종묘를 감싼 공기 한 모금조차 깊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느낄 텐데.”
남문에서 박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월대(月臺)로 올라가는 계단도 그는 성큼 내딛지 않았다. 종묘관리소 직원이 “올라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그는 “아니, 아직”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큰며느리에게 말했다.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는 정전을 보면서 그는 “민주적”이라고 했다. 똑같이 생긴 정교한 공간이 나란히 이어지는 모습에서 권위적이지 않고 무한의 우주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라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은 미니멀리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미니멀리즘이라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미니멀리즘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성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임금님이 드나들었던 동문에서 정전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둘째 아들 샘에게 말했다. “이 문의 스타일을 새로 짓는 집에 적용해 보는 게 어때?”
그때 일본 관광객 수십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는 “15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이곳을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라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나오는 길에 종묘 내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과 종묘제례 DVD를 10여 분간 관람한 게리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종묘제례가 열린다는 소리에 “그때 오면 볼 수 있느냐”라며 관심을 내비쳤다.
1시간 가까운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 게리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묘는 세계 최고의 건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형편없군요. 좀 정리됐으면 좋으련만.” 그는 친구인 클래스 올덴버그가 청계천 입구에 설치한 소라 모양의 설치물을 보고 난 뒤 호텔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차에 올랐다.
역동적 건물로 건축계 노벨상 ‘프리커츠상’ 수상
프랭크 게리는 평생을 편견과 싸워온 건축가다. 군대에서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차별한 상사와 맞서 싸웠으며 건축을 공부한 뒤로는 실험적인 재료와 역동적인 건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래서 “당신의 건물은 왜 이렇게 독특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답변에는 약간 날이 서 있었다. “부탄에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새로 짓는 건물도 옛날 것과 똑같이 지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게 하모니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건 관습일 뿐이다. 다 똑같아 보이면 조화인가. 그건 일차원적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유려하고 역동적인 곡면 건축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이제는 내 건축에 대해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 것 같다”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내 건물을 보고 많은 사람이 자신이 알던 집의 모양과 다르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또 곡면 건축은 짓기가 어렵고 돈도 많이 들 것이라고 여긴다. 편견이다. 어제 강연에서도 말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그런 어려움은 쉽게 해결된다.”(그는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 작업을 위해 2002년 게리 테크놀로지스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미라지 전투기용으로 개발된 카티아(CATIA) 프로그램을 개량한 소프트웨어는 빌딩의 각 부분을 소수점 이하 일곱 자리까지 표시한다. 이를 통해 건축면적, 체적, 기계 및 전기 시스템 등 원가 계산의 기본 요소가 되는 모든 것을 분석한다. 또 건물 모양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위로 솟아오르게 하고, 잡아당기고, 비틀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2차원이 아닌 3차원 영상으로 세밀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시공팀이 설계팀을 찾아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정교한 설계 덕분에 그는 건물을 물고기(그는 일본 목판화와 안도 히로시게가 그린 잉어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나 배(보트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즐긴다), 치마(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메릴린 먼로의 지하철 송풍구 장면 혹은 이세이 미야케의 주름 치마), 첼로(자신을 악기에 비유한다면 첼로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등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 에드 류샤 등 유명 미술가들과의 깊은 친분을 통해 건축과 미술의 교류를 실천해 왔던 그는 소문난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영감을 준 예술가가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베토벤과 피에르 블레즈(프랑스의 지휘자 겸 작곡가)”라고 답할 정도다. 일전에 한 인터뷰에서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라거나 “나는 오케스트라를 조각작품처럼 여긴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역동적인 형상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연상이 가능해진다. 종묘·인왕제색도에 반해 사무실에 사진 두고 감상
그는 아시아 문화에도 조예가 깊다. “15년 전 내한 당시 종묘 외에 정선의 ‘인왕제색도’에도 반했다”고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전한다. LA 사무실에도 이 두 사진을 걸어놓았을 정도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불상과 청자, 백자를 보고 “수세기가 지나도 느낌이 전달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며 건축도 이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건축이란 무엇일까. 그에게는 “의뢰인과의 협업”이다.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고, 가르쳐 주고, 기대를 120% 채워주는 것, 그래서 그들이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이며 그들 덕분에 내 건축도 흥미로워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5일 삼성미술관 리움 강연에서 젊은 건축가들에게 “경기 침체 등 외부적 요인 때문에 눈치보고 자신을 억누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문제없는 시대는 없었다. 이건 이런 문제가 있겠고 저렇게 하면 비즈니스가 안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건 변명이고 핑계다. 재능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건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러미 리프킨 같은 미래학자는 화석 연료의 고갈에 대비해 모든 건물이 태양열 발전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질문에도 그는 정확한 설계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50년 동안 건축을 해오면서 친구들과 환경문제를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슈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지을 때 나오는 폐기물 같은 것이다. 보통 30~40%가 쓰레기로 나온다. 설계대로 시공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만 하면 이를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에너지 회의에 참석한다며 자가용 비행기나 타고다니지 말고 이런 점부터 고쳐야 되지 않을까.”
프랭크 게리
1929년 캐나다 토론토 출생. 본명은 프랭크 오웬 골드버그. 어머니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54년 지금의 성으로 개명했다. 열여덟 살 때 가족이 LA로 이주해 USC와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에서 건축과 도시공학을 공부했다.
외할머니와 나뭇조각을 갖고 놀던 어릴 적 추억이 자신을 건축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은 쇠락하던 빌바오시를 일약 관광명소로 만들면서 ‘빌바오 효과’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판지로 만든 의자, 티파니의 보석 컬렉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유의 예술감각을 펼쳐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