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扶餘 扶蘇山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
(16) 扶餘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 -사적 제5호 白馬江남쪽 扶蘇山을 감싸고 있는 山城으로 泗沘時代의 都城이다. <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泗沘城’· ’所夫里城’으로 기록했으나, 城이 있는 山이름을 따 ‘扶蘇山城’이라고 부른다. 熊津(公州)에서 泗沘(扶餘)로 遷都하던 百濟 聖王 16년(538) 王宮守護를 위해 二重城壁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東城王 22년(500)경에 이미 山頂上을 둘러 쌓은 테뫼식山城이 있던 것을 武王 6년(605)경에 지금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여 百濟城郭發達史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城郭形式은 테뫼식과 包谷式이 혼합된 複合式山城이며, 東·西·南門터가 있고, 北門터에는 白馬江쪽에 排水口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城內에는 軍倉터·건물터·迎日樓· 泗沘樓·皐蘭寺·落花巖등이 남아있으며,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有事時에는 軍事目的으로, 平常時에는 白馬江과 扶蘇山의 아름다운 景觀을 王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인 듯하다. 扶蘇山城은 泗沘時代의 中心山城으로 百濟가 멸망할 때까지 首都를 방어한 곳으로 歷史的意義가 있다. (*蘇: 되살아날 소 *泗: 물 이름 사 *沘: 강 이름 비 *熊: 곰 웅 *遷: 옮길 천 *郭: 둘레 곽 *皐: 언덕 고) *테뫼식山城: 山頂上을 중심으로 7~8부稜線에 돌아가면서 성벽을 쌓은 성곽이다. 산 정상을 마치 테두리를 돌린 것과 같다고 ‘테뫼식’이라고 부른다. 테뫼식은 또 ‘山頂式’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築城年代가 올라가는 山城에 많이 있다. *包谷式山城: 溪谷을 포함하여 쌓은 성벽으로, 包谷式은 城內에 水源이 풍부하고 活動空間이 넓으며 外部에 잘 露出되지 않는 長點이 있다.]
(17) 軍倉址 -충남 문화재자료 제109호
百濟때 軍用食糧을 備蓄했던 창고터로 扶蘇山동쪽에 있는 扶蘇山城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軍倉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가 밝혀졌다. 百濟때 이軍倉址를 朝鮮時代에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東西南北으로 건물을 배치해 ‘口’字 모양을 이루고 있다. (*倉: 곳집 창 *址: 터 지 *糧: 양식 량 *蓄: 모을 축)
(18) 迎日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扶蘇山 동쪽봉우리에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멀리 公州 鷄龍山의 連天峯이 아득히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迎日臺가 있어 鷄龍山 連天峯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한다. 누각은 高宗 8년(1871) 鴻山郡守 鄭夢和가 지은 朝鮮時代 官衙門으로, 1964년 扶蘇山城으로 移建하고 이름을 ‘迎日樓’라고 했다. 앞면 3칸·옆면 2칸규모의 2층누각, 多包樣式 八作지붕건물이다. 정면에 ‘迎日樓’ 扁額을 걸었으며, 다른 官衙門에 비해 규모가 크며, 아래층기둥이 높아 키가 큰 건물이다. (*迎: 맞을 영 *鷄: 닭 계 *鴻: 기러기 홍 *夢: 꿈 몽 *衙: 마을 아)
(19) [寅賓出日] -2층 樓마루의 懸板 [寅賓出日(인빈출일)]은 <書經> 第一篇 [虞書] 第一卷 ‘堯傳 二’에 있는 말로, ‘뜨는 해를 공손히 맞아’라는 뜻이다. 迎日樓에서 靜香道人 趙柄鎬가 썼다. (*賓: 손 빈 *虞: 나라이름 우 *堯: 요 임금 요 *靜: 고요할 정 *柄: 자루 병)
*書經: 儒家 五經 중의 한 經典. <尙書>라고도 하며, 우서(虞書)· 夏書· 商書 ·周書등 당우(唐虞) 3代에 걸친 中國古代의 기록이다. 尙書는 上古의 책으로 崇尙해야 한다는 뜻이다. 二帝三王의 政權의 授受, 政敎등의 기록으로, 古代의 史的事實이나 思想을 아는 데 중요한 책이다. 당시의 史官 ·史臣이 기록한 것을 孔子가 편찬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100편이었다고 하나, 秦 始皇帝의 焚書로 散逸된 후 漢나라의 文帝때 伏生이 口承한 것을 당시 통용되던 隸書로 베껴<今文尙書>라고 한다. 그 후 景帝때 魯나라의 恭王이 孔子의 舊宅을 부수고 발견한 晉나라의 文字로 쓰인 것을 <古文尙書>라고 한다. <고문상서>는 일찍 없어지고 현재는 東晉의 매색(梅賾)이 元帝에게 바친 <僞古文尙書>가 <今文尙書>와 함께 보급되었다. (*虞: 나라이름 우 *焚: 불사를 분 *賾: 깊숙할 숙)
(20) 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百濟의 忠臣 成忠·興首·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祠堂으로, 1957년 건립하고 1981년 再建해 현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안에는 成忠·興首·階伯의 影幀을 봉안했다. 매년 10월 百濟文化祭때 三忠祭를 지낸다고 한다. (*興: 일 흥 *階: 섬돌 계 *伯: 맏 백 *幀: 그림 족자 정)
(21) 百濟 佐平 成忠公像 成忠(?-641)은 百濟 義慈王때 佐平으로, 王이 사치와 遊興에 빠져 政事를 멀리하자 極力하게 諫하다가 투옥되어 斷食鬪爭으로 餓死前 百濟에 전쟁이 일어날 것인데 이때 炭峴과 伎伐浦를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上疏했다. (*佐: 도울 좌 *諫: 간할 간 *餓: 주릴 아 *伎: 재간 기 *伐: 칠 벌 *疏: 소통할 소)
*佐平: 百濟의 벼슬等級을 나타내는 16官等 中의 第一品. *伎伐浦: 현재 忠南 舒川郡 長項邑 일대. (*舒: 펼 서)
(22) 百濟 佐平 興首公像 興首(?~?)는 百濟의 佐平으로, 義慈王을 諫하다가 古馬彌知縣(現 長興)으로 유배되었다. 義慈王 20년(660) 羅唐聯合軍이 침입하자 王이 流配地에 있는 興首에게 使者를 보내 방어책을 문의하자, 唐軍은 白江(白馬江)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新羅軍은 炭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라고 忠言했으나, 왕이 실행하지 못하고 百濟는 멸망하고 말았다. (*諫: 간할 간 *彌: 미륵 미 *縣: 고을 현) *佐平: 백제의 벼슬等級을 나타내는 16官等 중 第1品 *炭峴: 百濟의 고개로 방어용 木柵을 축조한 要衝地로, 여러 說이 있으나 ③이 유력함. (*柵: 울타리 책) ① 大田市 東區와 忠北 沃川郡 郡北面의 경계에 있는 食藏山의 馬道嶺 (*沃: 기름질 옥 *藏: 감출 장) ② 全北 完州郡 雲洲面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 ③ 忠南 錦山郡 珍山面 校村里의 ‘숯고개[炭峙] (*峙: 언덕 치) ④ 錦山郡 珍山面 方峴里와 杏亭里 사이의 方峴 (*峴: 고개 현 * 杏: 살구 행)
(23) 百濟 達率 階伯將軍像 階伯(?~660)은 羅唐聯合軍이 공격해 오자 決死隊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連山인 黃山벌(現 論山市 連山)에서 싸우다 戰死했다. (*達: 통달할 달 *率: 거느릴 솔 *階: 섬돌 계) *達率: 百濟의 16官等 중 第2位의 品官.
(24) 泗沘門 扶蘇山城의 정문으로 70㎡규모의 2層樓閣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 11월 건립했다. (*泗: 물 이름 사 *沘: 강 이름 비)
(25) 扶蘇山城入口에서 보이는 扶蘇山城숲 扶蘇山城숲은 제3회 아름다운숲 全國大會(2002년)에서 ‘22世紀를 위해 保全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어 優秀賞을 受賞했다.
(26) 扶餘 官北里 遺蹟 -사적 제428호 *扶餘 官北里 遺蹟 -史蹟 제428호 扶餘 官北里 遺蹟은 1983년 ‘충남기념물 제43호, 傳 百濟王宮址’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史蹟’으로 승격되었다. 1982년부터 忠南大學校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했다. 1983년 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고, 1988년에는 土器口緣部에 ‘北舍’라는 銘文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의 남쪽 50m지점에서 百濟時代의 道路遺蹟과 排水施設이 드러났다. 百濟의 마지막 都邑 泗沘都城의 일부 遺蹟이 밝혀진 것으로 중요한 學術的意味를 지닌다. (*緣: 인연 연 *銘: 새길 명 *排: 밀칠 배 *沘: 강 이름 비) ※扶餘 官北里 百濟遺蹟→[扶餘 官北里 遺蹟]으로 명칭변경(2011년)]
[서동요] SBS드라마 오픈세트場
*薯童謠 -韓國 最初의 四句體 鄕歌 百濟의 薯童이 新羅 제26대 眞平王(在位 579∼632)때 지었다는 民謠形式의 노래이다. 吏讀로 표기된 原文과 함께 說話가 <三國遺事> 卷二 武王條에 전한다. 武王은 과부인 어머니와 연못의 龍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 生計를 유지해 薯童이라고 불렸다. 武王이 어릴 때 眞平王의 三女 善花公主를 사모해 중처럼 삭발하고 新羅 서울 徐羅伐에 들어가 薯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薯: 감자 서 *讀: 구절 두 *伐: 칠 벌) 내용은 ‘善花公主가 밤마다 몰래 薯童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으로, 이 노래가 大闕안에까지 퍼지자 王은 公主를 귀양 보내자 이에 薯童이 기다리다가 함께 百濟로 돌아가 그는 임금이 되고 善花는 王妃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新羅·百濟間의 관계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說이 있으며, 타당한 설은 益山 彌勒寺의 緣起說話로, 百濟滅亡後 彌勒寺僧侶들이 절을 救하고자 新羅와 彌勒寺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說話라는 것이다. (*闕: 대궐 궐 *彌: 미륵 미 *勒: 굴레 륵 *緣: 인연 연) *鄕歌: 三國時代末에 발생해 統一新羅때 盛行하다가 末期부터 쇠퇴하기 시작, 高麗初까지 존재하던 韓國固有의 定型詩歌.
(27) [서동요] 드라마 오픈세트場 前景
(28) 百濟王宮
(29) 薯童亭과 王宮 智慧의 塔
(30) 百濟時代 乾魚物 모형 (*乾: 마를 건)
(31) 百濟時代 衣裳 (*裳: 치마 상)
(32) 百濟工房, 지붕이 너와집이다. *너와집[石瓦家]: 나무 널(너와)이나 얇은 돌판[石板]으로 지붕을 이은 집.
(33) 百濟가마, 도자기를 굽던 가마.
(34) 水景樓
(35) 愛蓮池 - (19) 扶餘 扶蘇山 扶蘇山城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