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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주일설교 갈라디아서6:11-18(십자가와 흔적)
본문: 갈라디아서6:11-13
제목: 십자가와 흔적
오늘은 갈아디이서6:11-18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와 흔적”이라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흔적”
저는 여러분과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16주 동안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로 17주째 마지막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큰 글씨로 쓰다.
오늘 바울은 뜬금없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지금까지 순수한 복음에 관해서
유대에서 온 거짓 지도자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서 교회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가 큰 글씨로 쓴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조하기 위한 어떤 장치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는 우리처럼 필기구나
종이가 흔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썼고,
아니면 파피루스라는 식물로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종이를 아끼기 위해
전문적인 사람이 글을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사도도 시력이 약해서 본인이 작은 글씨로
편지를 기록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안질을 앓고 있었고,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꼭 이렇게 큰 글자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글을 쓰다가 중요한 내용이거나
강조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합니까?
큰 글씨로 만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설교 원고를 기록하다가 중요한 부분에는
빨강색으로 바꾸기도 하고
글자의 크기를 키우고, 밑줄을 치기도 합니다.
바울은 왜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글자를 크게 썼을까요?
아마도 바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그렇게 썼을 수도 있고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렇게 큰 글자로 손수 기록했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바울은 큰 글자로 쓰고
그렇게 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완성한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아주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
무언가 표현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나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은
처음은 순수한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나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 본토에서 온 교사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할례를 더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학적인 혼란이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의 핵심은 할례에 있습니다.
유대 본토에서 온 거짓교사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모세가 전해준 육체의 할례를 행해야
온전하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믿고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따랐습니다.
뭔가 확실해 보였고, 표가 나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하는 것은 쉬운 길입니다.
구원이 그런 표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쉬운 길로 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은 무서운 결과를 내게 합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효가 될 뿐입니다.
인간의 행동이나 공로나 의를 촉진해서
구원이 이루러지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무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우리가 아무것도 보탤 수 없고 보태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왜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왜 그랬을까요?
할례를 가르친 자들은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가장 책망을 받고
경고를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교사들 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과 삶이 달랐습니다.
그저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짐을 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를 그 짐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육체의 자랑을 하려고
자신들의 세를 자랑하려고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몇 명이 할례를 받았는지
숫자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는 그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지
자신의 제자로 만들면 그것은 거짓교사입니다.
율법 주의자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왜 할례를 받게 했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자랑을 삼기 위함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은
성공이나 결과물에 자신의 영향력에
숟가락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교만해서 그렇게 행합니다.
그런 여자 청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사과를 깍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니 기뻐했습니다.
그 사과를 자신이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사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자리에 있는 사과를 깎았을 뿐인데
맛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사과하나 깎아 놓고 마치 자신이
사과를 만든 것인 양 숟가락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십자가와 완전히 배치가 됩니다.
교회에서나 모임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꾼이 되려는 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십자가만 자랑하라!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랑할 것이 많이 있는데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도 자랑할 것이 있고, 권력도 자랑할 것이 있고,
지식도 자랑할 것이 많은데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부를 나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들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당시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최고의 율법과정에서 받았고 정통유대인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밀릴 것이 없었고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을 무시해서 그렇습니까?
이제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만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더라는 것입니다.
배설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몸에 필요치 않은 것은
배설물이 되어서 뒤로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만나고 보니
세상의 모든 자랑들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배설물을 자랑합니까?
세상에 배설물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면
그가 대통령을 했던 최고의 상을 받았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자랑에 매이게 되면
아직도 세상 것에 따라서 살게 되면
그는 아직 복음 안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며
아직도 세상 자랑을 따라 살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3: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배설물로 버려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야 신앙생활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
그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권력을 얻지 못해서 속상하고
돈을 얻지 못해서 절망하고
명예가 실추 되었다고 투덜거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권력이 배설물이기에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속상하지 않고
돈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고 명예가 실추 되었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세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고
명예를 잃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권력이 없어도 당당하면서 십자가만 자랑한다면
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작은 권력을 얻기 위해 아부하고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명예를 얻기 위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무기로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어떻게 흔들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람을
무엇으로 누르고 억압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새로 지으심 받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 무엇을 가졌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것을 중요시 하고 많이 가진 자가 큰 소리 치고
많이 누리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 받은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새로 지음 받은 것입니까?
고린도후서5:17-18말씀을 찾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내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지음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후5:18절을 보니 “화복하게 하는 직분”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 지음 받은 자의 삶은 성령의 열매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화목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삶에서 드리는 열매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졌다면
우리의 자랑은 바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3.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라!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서
1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괴로움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괴로워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한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납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80%는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괴롭힘을 당한 문제는
사도권 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바울로서 자신의
사도권이 부인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처럼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분명히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분명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통 12제자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모든 선교 여행 때마다
그러한 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가짜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문신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짐승이나 노예나 종을 표시할 때
쇠도장을 불에 달궈 불도장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소유라는 것을 확인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사람도 그런 표식이 찍히면 그때부터 종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종은 절대 복종과 충성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종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사랑에 매인 종이라고 합니다.
진짜 소유가 되려면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종이 되면 자유가 이루어집니다.
사랑해서 복종하고 충성하는 것 진정한 종이 됩니다.
강제로 종이 된 사람은 충성해도 돈 때문이거나
두려움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을 항상 위기의 삶이 연속되었습니다.
배가 고팠고, 헐벗었으며
죽음의 고통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종이 되는 순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웠기에 무엇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통도 헐벗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에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당하던 주님 때문이었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사명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을 가진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세례 받고 어떤 직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바로 예수님의 흔적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의 생명 곧 예수님의 흔적이
내 삶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흔적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할 때
오직 예수님의 흔적이 내 삶 속에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내야 합니다.
더 나가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자로
살아가는 성도님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