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104/농부화가 김순복]『농부어머니의 마음』
농촌의 일상을 그린 위의 그림들을 먼저 감상해 보자. 맨먼저 어떤 느낌이 화-악 다가오는가? 열이면 열, 따뜻하다와 정겹다를 떠올리지 않을까? 화가는 그림공부를 ‘1’도 한 적이 없는 60대 중반의 시골 아낙네이다. 그녀가 맨처음 딸들이 선물해준 ‘72색 색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린 때가 57세였으니,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고 5남매를 힘들게 키우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 꼭 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되겠다"는 꿈만은 잊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오랜 세월 머리 속으로만 그림을 몇 천 장이나 그렸으면,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며 멋진 농촌의 일상을 그려대는 것일까? 그림에 덧붙이는 운문(시)는 또 어떠한가? 전혀 꾸밈이 없으면서도 정제된 느낌. 농촌출신이 아니어도 이 그림시집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화가가 아니면 또 어떠한가? 감동은, 감탄은 이런 ‘무지랭이’ 아줌마 농부화가에서 우러나는 것이거늘. 우리 할머니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고대로 재현되고 있질 않은가!
『농부어머니의 마음』(김순복 지음, 황금알 2018년 펴냄, 15000원)이라는 책을 전라도닷컴 3월호 기획기사 <그림씨앗을 묻고 토닥토닥 하였으니>를 보고 알았다. 서울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그 마음 역시 농부화가마냥 따뜻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선물. 이런 그림들을 보며 초보 농사꾼의 우울과 스트레스를 날려보내라는 뜻인 것같다. 그런데, 진짜 힐링이 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사를 어떤 마음으로 짓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그림과 시들. 70년대 말인가, 전북 임실의 한 초교교사가 쓴 <들밥> <섬진강> 등 농촌시들이 주었던 감동과 감흥을 오랜만에 맛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비 오는 밤>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자.
<낮이면 들일에 부대끼고/밤이면 집안일에 부대끼며/텔레비젼 연속극/배우 얼굴에 자식 얼굴 겹쳐 보고/덩그러니 누운 밤/빗소리 방안에 들어옵니다//함석지붕 두드리는 빗소리에/전화벨 소리 묻힐세라/귀 여겨 뒤척이는/어머니의 밤/꿈속에는 비 맞으며/밭 언저리를 걷습니다>
쉽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어디 밭농사만 농사랴? 농사 중에 최고의 농사는 자식농사일 터이지만, 이 아줌마 보아라. 밤에는 홀로 그림농사와 시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소문이 나 해남에서 서울까지 상경, 시청에서 “참 진짜 참기름처럼 고소한 그림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단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두 모판 옮기고, 배추모종 심고, 고구마 마늘 양파 캐고, 고추 말리고, 대파 봄동 거두는 촌살이와 촌사람들이다. 화가는 말한다. “평생 농사 짓는 학교를 다니며 자식들 건사한 이 어매들한테 박사모를 씌워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렸다”고. 어쩌면 석양에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밀레의 그림을 보는 듯도 하다. <농부의 힘>이라는 그림에 써넣은 글귀를 보자. 작중의 화가가 “에구 허리야. 내가 아짐 연세 되믄 아짐같이 일할 수 있을까요?” 묻자 불특정 할매가 “걱정말어. 칠십살 되믄 칠십살 힘이, 팔십살 되믄 팔십살 힘이 생기는겨. 건강하기만 혀” 어찌 정답이 아니랴. 암것도 모르는 할매라도 평생 농사지으면서 ‘칠십살 되믄 칠십살 힘이 생긴다’는 것을 체득한 단언이다. 건강하기만 하면 되야! 보약의 말씀이다.
화가가 지은 시 <땅의 이름> 일부를 보자. <너를 무엇으로 만들어주랴/무슨 이름으로 만들어주랴/투실투실 영근 고구마밭이라 하랴/속잎 쏙쏙 올라오는 배추밭이라 하랴/나풀대는 시월 마늘밭이라 하랴/... 너에게 꿈을 심고 이름을 붙이고저/귀퉁이가지 고운 살 다듬어/씨앗 묻고 토닥토닥 하였으니...>. 멋지다. 씨앗을 묻고 토닥토닥주해주며 그 땅의 이름을 궁리한다. 참 얼마나 마음이 고우면 이런 시가 줄줄줄 나오는 것일까? 그 예쁜 마음처럼 농약이나 비료를 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농사를 진다고 한다. 그대로 한 편의 그림이 된다. 문득 떠오른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보다 내공이 더 깊은 것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땅은 참깨밭, 호박밭, 콩밭 등등등 무슨 밭이든 될 준비가 돼 있다. 땅의 이름을 지어주는 의무와 권리는 오직 농사꾼에게 있다. 나도 봄을 맞이하였으니 서둘러 땅의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여기는 땅콩을 한 알 한 알 심었으니 땅콩밭, 저기는 옥수수밭. 얼마 전에는 산취들을 캐와 취밭을 만들었는데, 지나가는 이웃아줌마가 말한다. “밭에다 심으면 골짝에서처럼 취향기가 하나도 안나. 이상혀” 자연은 왜 그렇게 신기하고 신비한 걸까? 아지 모게라!
'겉 거죽만 풍경만 보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알록달록 담아낼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농부화가 아지매, 오래오래 그 속에서 행복하시기를 빈다.
첫댓글 아, 귀향하고파.
다래,냉이,쑥캐서 된장 고추장에 비빔밥 해먹으면, 뿅!
단순 소박한 농촌 삶을 너무 멋지게 그려내는 그 아낙네,매력 짱!
농부 애찬가 우천의 글 잘 읽었소이다